# 197
마왕 대전 -3-
파멸신의 눈에 언뜻 묘한 광채가 스쳤다.
이걸 수락하다니?
김현의 성향상 분명 거부할 거라 생각했거늘……
[으하하! 잘 생각했다!]
파멸신은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속에 무슨 꿍꿍이를 가졌든 상관없다. 김현 또한 9성 신격의 화신. 직접 내뱉은 말은 어찌 됐든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힘이 약해지니까.
[오라, 또 다른 나여! 하나가 되어 새 세상을 창조하자!]
파멸신이 한껏 두 팔을 벌린다. 번들거리는 기계 갑옷과 꿈틀거리는 붉은 근육이 동시에 드러난다.
그것을 보며, 김현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의식적으로 신좌와의 연결을 차단한다. 파멸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스쳤으나 그래 봐야 뭐 어쩔 거냐는 눈빛이다. 김현의 눈알이 희번덕거리다가 어떤 형상을 갖춘 다음에는 더 그랬다.
네 개의 동공을 가진 눈.
바로 릴리스의 권능.
9성 신격의 일부가 되어 더욱 강해진 정신 계열 권능이 지구인 각성자들의 정신을 연결한다. 8성 각성자의 성혼보다 더욱 강력했다. 엇, 하는 사이 수백 명의 정신이 하나가 되었다.
그 상태에서, 김현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수만 년에 이르는 고독한 투쟁. 그 끝에서 도달한 9성 신격. 기갑계와 충왕계를 방문했던 기억은 물론 파멸의 신좌가 확장되고, 김현이라는 새로운 화신을 만들었던 것까지.
"혀, 현아! 너, 너!"
김애경이 경악하여 입을 벌린다.
하은이의 눈도 흔들렸다.
"삼촌? 삼촌이 마왕이었어요?"
묵묵히 그들을 마주 보는 김현.
이세희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마왕이 지구를 공격하지 않았던 거구나……"
날조된 진실.
하지만 김현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조금 전의 기억을 엿보면서, 여기 있는 모두가 김현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에일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Mr. 김…… Mr. 김은 어째서 혼자 그렇게 다 희생하려는 거죠? 그 짐을 우리에게도 나눠줘요! 혼자서만 그러지 말고!"
이미 늦었다.
김현은 최후의 도박을 앞두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굳이 육성으로 말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사령관님……"
사브리나가 애타는 눈빛을 보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
그러나 무시했다. 신좌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마지막 몇 단어를 남겼다.
"저는 이제 파멸신과 융합됩니다. 융합이 완전히 끝나면 모두 끝입니다. 그 전에 파멸신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저런 괴물을 우리끼리 어떻게 이깁니까?"
차오웨이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김현은 턱을 까딱여 파멸신을 가리켰다.
"제가 있을 겁니다."
"아……"
이제야 각성자들도 김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파멸신과 융합하는 김현.
융합한다고 해서 즉시 자아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동안은 남겠지. 파멸신 본인이 방해를 하는 바에야, 여기 있는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후후후.]
김현의 계획을 다 듣고도, 파멸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부에서 김현이 훼방을 놓는다고 해도 파멸신은 파멸신. 극도로 불안정하여 최강의 전투력을 내칠 수 있는 9성 신격이었다. 아무리 8성과 7성 각성자들이 때로 달려들어도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다.
김현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한 차례 진동하더니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오직 희미한 보석 하나만 남아 작별하듯 희미한 빛을 뿌렸다.
"사령관님!"
사브리나가 붙잡으려 하지만 불가.
까만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보석은 어느새 사라진 다음이었다.
"멍청하긴……"
김애경이 이를 악물고 신음하듯 욕설을 내뱉었다.
착각이었을까?
날카로운 눈매 끝이 잠깐 반짝인 것은?
김애경이 전에 없이 사나운 표정으로 각성자들을 돌아보았다.
"가죠. 현이가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엄마, 가자."
"그래."
하은이가 옆에 와서 선다. 그림자에서 거대한 금빛 존재가 생성되어 하은이를 감쌌다.
그 존재감에서, 김애경은 익숙하고도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김현.
언제나 지켜줘야 하고, 도와줘야 할 것만 같았던 녀석.
어느 날 갑자기 능력을 각성하고 자신과 하은이를 지켜주었지……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희생해가면서.
'다시 볼 수 있을까?'
또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아마도 힘들겠지.
지금까지 무수한 위기를 넘겼지만, 이번에야말로 진실로 작별하게 되리라는 강력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따라오는 하은이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때 누군가 손을 잡는다.
"언니."
이세희.
벌써 12년을 함께 한, 그래서 친자매와 같은 동생.
"이제 끝내요."
토끼 같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하지만 애써 웃고 있었다. 이세희 또한 느낀 것이다. 신촌 병원에서 시작된 여행이, 오늘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끝날 거라는 사실을.
고생했었지. 여기 있는 둘도, 각성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넘겼으나, 실은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도.
"그래, 끝내자."
각오를 다잡는다.
조금 전 알게 된 진실로 허물어질 것만 같은 마음을 곧추세우며 파멸신을 노려본다.
어느새 옥좌에 앉은 파멸신.
너무 크다. 너무 높이 있다. 그래서 표정을 알기가 어렵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저 아득히 높은 곳에서 태양처럼 타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애경은 파멸신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웃고 있다.
조금은 서글프게, 조금은 기꺼운 듯이.
'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김현이 이미 파멸신의 행동을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또한 눈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는 사실도.
"공격!"
가장 먼저 김애경과 리아, 톨가의 공격이 가해졌다.
극대파멸력, 멸망포.
세 가닥 투명한 광채가 화려하게 날아간다. 필생의 힘을 담아 공격한 참이다. 아까 그러했듯이, 파멸신이라 한들 이걸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파멸신이 성가시다는 듯 왼팔을 휘저었다. 무수히 분화되어 쏘아지는 공격을 단번에 막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첫 공격은 무효로 돌아갈 듯했다.
[크흐흠, 방해하지 마라.]
그때, 멀쩡히 움직이던 손이 갑자기 뒤집혔다. 덕택에 멸망포의 절반 정도는 무사히 손을 피해 파멸신의 두 눈을 직격한다. 척 보기에도 파멸신의 의지에 반하는 움직임.
"여, 역시!"
"이길 수 있어!"
김현의 개입을 눈앞에서 본 각성자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어 김애경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멸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후후후, 간지럽구나.]
문제는 크기.
체구가 너무 차이가 크게 났다. 인간 대 개미보다 심했다. 멸망포를 눈에 얻어맞고도 웃어넘길 정도.
'어떻게 해야 하지?'
김애경은 암담함을 느꼈다.
약점이 있으면 약점이라도 공략해 보겠으나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김현이 안에서 도와줘도 결국 쐐기는 지구인 각성자들이 꽂아야 하는데 그런 게 안 보인다.
각성자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히 공세가 주춤했다. 파멸신이 대놓고 지구인 각성자들을 비웃었다.
[벌써 끝이냐? 이런 박약아들을 위해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큰 희생을 치렀다니 참 우스운 일이구나. 자, 모두 포기하고 내 양분이 되어라.]
크게 한 번 꿀렁이는 세계.
기이한 파장이 덮쳐온다.
각성자들은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냥 드러눕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엄마!"
이때 김애경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왕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니?"
"마왕이 목표가 아니야! 저길 봐!"
하은이가 손가락질을 했다.
다른 곳이 아닌 세계 곳곳에, 지금도 신좌를 파먹는 우주수의 체액과 거꾸로 그 체액을 파먹는 혼종들을.
그걸 보자 김애경도 머리가 환히 깨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구나!"
김현의 기억에서 본 대로라면 9성 신격은 바로 이 세계 자체, 파멸의 신좌에게 부여되었다. 인격을 가진 파멸신이나 김현은 신좌의 화신에 불과하다. 따라서 파멸신을 흔들려면 신좌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곧 얼굴이 딱딱해지고 만다. 여기 있는 각성자라고 해봐야 300명을 조금 넘는 정도. 신좌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이 숫자로 내는 파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
일선에서 파멸신의 발가락을 찢던 사브리나가 탄성을 질렀다.
"맞아! 파멸신은 신좌의 중추에요! 컴퓨터로 치면 CPU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런데?"
"CPU에 과부하를 주면 뜨거워지면서 정지하잖아요! 파멸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헛!"
"일리가 있어!"
"해봅시다!"
"김 사령관께서 굳이 융합을 자처하신 게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몸을 움직여 각성자들을 돕는 것보다야 내부에서 과부하를 걸기가 훨씬 쉽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브리나의 지적이 온당했다.
즉시 진형 교체.
선두에 나가 있던 공격수들이 모두 뒤로 돌아온다. 크게 원을 그렸다. 방어막과 축복을 겹겹이 부여하고 강화 계열 등 단단한 각성자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힘이 흐르고 흘러 진형 내부로 모여들었다.
지난 수개월, 김현의 주장으로 중점적으로 훈련했던 진형 중 하나. 혼력 집중 증폭진이었다.
중심에 선 것은 메리 린디아.
주위로 정신 계열 각성자들이 늘어섰다. 그들이 힘을 합쳐 성혼을 발현하기 시작한다. 혼란스럽게 흐늘거리던 빛을, 하은이가 금빛 창을 만들어 한 곳에 담았다.
[주 양, 지금!]
메리의 지시에 따라 하은이가 힘껏 창을 던졌다.
하늘을 가르는 금빛 선.
파멸신이 반응하여 손으로 튕겨내려고 했으나, 역시나 타격 직전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금빛 거대한 창이 정확히 파멸신의 미간에 꽂혔다.
물론 그거 하나 맞았다고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진짜는 지금부터.
광대한 정신파가 파멸신에게 쏟아졌다. 여기 있는 각성자들이 모든 힘을 모아 가하는 정신 공격이다. 릴리스나 메피스토텔레스가 살아 돌아와도 고통에 겨워 괴로워하다 미쳐 버리고 말았겠지.
[흐흐흐.]
파멸신은 옥좌에 앉은 채 음험한 웃음만 흘렸다.
정신 공격?
가소롭다.
수만 년의 시간 반복을 견딘 자신이다. 무한한 고통을 견디며 악마들을 포식하여 신격을 얻기까지 했다. 이까짓 정신 공격이야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잠시 후, 여유롭던 파멸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
'어?'
저만치 앞, 우주수가 뿌린 체액을 퍼먹던 권속들 중 일부가 일제히 하늘로 솟구친 까닭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중에서 아예 군무를 추기 시작한다.
브레이크 댄스, 혹은 비보잉이라고 할까.
머리를 땅 쪽으로 대고 몸을 휙휙 돌린다. 로봇처럼 콱콱 끊어지는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도 있다.
이 난데없는 일에 다들 얼어붙었다.
세계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춤판이 웬일이냐?
"정신 차려!"
각성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은이가 짧게 호통을 쳤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멸신 또한 하은이의 목소리에 냉정을 되찾았다.
[참 어이없는 짓을 하는구나.]
자신의 내면에 속삭이는 파멸신.
대답은 없다.
항의하듯이 권속들 한 무리가 또 튀어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뿐.
권속들은 자아가 없다. 즉, 파멸신이 중추 자아로서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상황도 그렇다. 춤을 춰라, 정도의 간단한 명령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프로그램 코딩하듯이 고관절과 무릎 관절을 몇 도 각도로 꺾고 어떤 근육을 얼마만큼 수축시켜 움직이라고 실시간으로 지정해줘야 한다.
기갑계의 요소가 섞인 까닭에 생긴 특징. 체액 포식이나 일반적인 전투 상황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전산 자원을 필요로 한다.
[얕은수를 쓰는구나.]
[글쎄, 과연 얕은수일까?]
김현의 말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미간에 꽂혔던 황금빛 창이 스르륵 녹아 사라진다. 그리고 탁한 흐름이 되어 파멸신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떠한 신호로 변화.
잡음이었다. 파멸신 내부에서 오가는 막대한 혼력 신호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권속들의 행동이 더욱 느려지고, 우주수의 체액을 흡수하는 것도 더뎌진다.
자연히 우주수가 부활.
체액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깨진 균형이 다시 깨져 저쪽으로 넘어갔다. 흡사 바다를 이루듯 신좌 내부에서 차오르기 시작하자, 파멸신의 냉정도 깨지고 말았다.
[같이 죽을 셈이냐!]
그럴 리가.
지금 상황에서는 미래가 둘 중 하나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우주수에 의한 신좌의 포식.
혹은 파멸신에 의한 우주수 소화.
둘 중 어떤 결론이 나든지 지구와 인류는 밑거름이 되어서 희생당하겠지.
김현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제 3의 선택을.
인류가 오롯이 생존하는 그 미래를……
그래서 미래의 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다.
[하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