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98화 (198/200)

# 198

창세기 -1-

[삼촌?]

[그래, 삼촌이다. 하은이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내 후계자가 될 생각은 없니?]

간단한 구상.

모종의 과정을 거쳐 하은이를 자신의 후계로 지정한다. 그래서 신좌의 힘을 물려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은이는 멸신의 거목과 파멸의 신좌, 두 신의 힘을 얻어 어엿한 9성 신격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나 하은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김현을 보다가, 뒤에 서 있는 김애경을 보곤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 삼촌. 난 자신이 없어.]

아무리 강력하다고는 해도,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는 해도 8성 각성자를 9성 신격으로 올리기가 어디 쉬울까. 김현이 그러했듯 시간 반복과 포식, 고통의 업을 짊어져야 한다.

9성이 되었다고 끝이냐? 그렇지도 않다. 신격으로서 세계의 유지를 위해 무한한 희생을 치러야겠지.

[그래, 그렇구나.]

예상했던 반응.

대한민국으로 치면 중학생밖에 안 된 소녀. 성혼을 일찍 자각하여 조숙하긴 했으나 한창 꿈 많을 나이다. 그런 하은이에게 무한의 고통을 선사하는 것은 김현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삼촌이랑 사람들을 도와줄 수는 있지?]

[어떻게?]

다량의 정보가 실 같은 연결을 통해 밀려든다.

정교하게 짜인 계획. 계획이 초래될 미래.

하은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때, 어떤 거대한 존재가 둘의 정신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친 짓을 하려고 하는군. 그게 될 것 같은가?]

짙은 그림자가 하은이의 정신에 드리워진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정신 공격에는 친숙한 하은이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누군가에 의해 차단당한 까닭에 하은이는 평정을 되찾았다.

[구경이나 하시지, 타락한 자.]

[후후, 재미있는 별명이야. 이봐, 네가 융합을 수락한 이상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 사실을 잊진 않았겠지?]

[융합되는 건 수락했지만, 그걸 지금 당장 한다고는 안 했는데?]

[짜증 나는군!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그걸 지금까지 기적으로 바꾼 게 나였고, 우리였지. 아니,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감을 잊은 너는 나라고 할 수도 없어. 묻겠다! 너는 뭐냐? 도대체 누구냐?]

[나는 김현이다!]

파멸신의 외침에 파멸의 신좌 전체가 진동했다. 파멸신의 부르짖음을 긍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곧, 추상같이 떨어지는 일갈에 모든 것이 파묻히고 만다.

[헛소리! 인류를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무슨 김현이냐? 사명을 저버린 주제에 내 이름을 사칭하지 마라!]

[이놈이!]

김현의 일갈이 세상을 갈랐다. 파멸의 신좌 전체가 동요하며 부르르 떤다. 그나마 제어되던 혼종들도 대리석 동상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정체성을 부인당한 충격은 크다. 9성 신격이라면 더 그렇다. 개미 같은 필멸자들도 아니고 제 화신에게 직접 그랬으니……

문제는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점. 김현이라는 이름에 집착한다면 모르겠으나 사명을 저버린 파멸신이 이름 정도 포기하지 못할 리는 없다.

사실 그것이 새로운 창세의 시작이라고 봐야지. 새로운 이름을 작명하는 것이. 그래야 옛 김현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테니.

다행히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놈! 취소해라! 나는 김현이다!]

[아니라니까.]

[나는 김현이다!]

조금은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 파멸신의 눈으로 세계를 내려다보는 김현.

개판이다.

호숫물처럼 늘어난 우주수의 체액이 세계를 녹이고 있다. 소수의 혼종들만 그에 대항하는 중이고, 발밑에는 지구인 각성자들이 혼력 집중 증폭진을 짜고 옹기종기 모였다.

팔만 한 번 길게 휘두르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만 같다.

음험한 속삭임이 들렸다.

[배고프지?]

파멸의 신좌였다.

인격을 갖추지 않아 거대하고 모호한 사념체이자 개념이라고 불러야 했을 그것이, 내부에서 치닫는 허기와 불안정성 때문에 서서히 자아가 생긴 것이다.

[모두 내 것이다.]

흉악한 괴물이 있어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리고 각성자들을 잡아먹고 싶었다.

김애경, 하은이……

특히 그 둘.

한꺼번에, 아니 팔다리부터 조금씩 뜯어먹으면 얼마나 별미일까? 지구에서 맛보았던 어떤 진미도, 뭇 차원계에서 공수된 어떤 특산품도 상대가 안 되겠지.

[흥.]

어마어마한 욕구의 파도가 휘몰아치건만, 김현은 한 번 코웃음으로 유혹을 뿌리쳤다.

'시작하자.'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이 세상, 파멸의 신좌에 개입하기 시작.

기이한 일을 벌인다.

커다란 달걀같이 생긴 신좌의 한쪽 벽을 잡아 벌린 것이다. 차원 균열이 거대하게 생성되면서 바깥의 광경이 엿보였다.

[정말로 그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냐?]

[물론이지.]

[어리석긴. 난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다. 네 계획은 실패할 것이다.]

[김현도 아닌 것의 방해는 두렵지 않아.]

[이놈이 계속!]

파멸신이 노호하며 정신 공격을 가해온다.

김현은 묵묵히 버텼다. 가끔 파멸신이 냉정해지려고 하면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을 건네며 뚜벅뚜벅 당초 계획대로 걸어가기만 했다.

평탄하지만은 않다.

파멸의 신좌가 속삭이는 소리가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으니까.

새로이 구성되는 자아가 구체화 되는 중이라는 뜻.

무시하고 앞을 본다.

반투명한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차원 균열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뿌리 표면에 사람 어금니를 닮은 돌기가 있어, 신좌의 겉면을 마구 갉아대고 있었다.

하나가 별안간 차원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다. 고무처럼 쭈욱 늘어나더니 신좌 내부를 채운 우주수의 체액에 꽂힌다.

[으흐흐.]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맙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온전한 9성 신격을 얻겠구나.]

글쎄, 과연 그럴까?

잠시 침묵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보자.]

[뭐냐?]

[네 이름은 뭐지?]

[후후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상황. 우주수 또한 김현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잘 알았다.

[지금은 멸신의 거목일 뿐이다. 곧 진실한 이름을 얻겠지.]

역시나.

듣고 있던 파멸신이 경악하여 소리친다.

[이놈! 설마 우리를 팔아넘길 생각이냐? 이 반역자!]

[반역자는 너지. 인류에 대한 충성과 저항군의 맹세를 저버린 괴물 주제에 주절주절 소리 지르지 마라. 머리 아프다.]

[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좋다, 파멸의 화신 김현. 그대가 내게 합류한다면 지금과 같은 위치를 보장하겠다. 그대를 흡수하지 않고 내 화신으로 삼지.]

[이, 이놈이!]

구오오오!

파멸신이 아니라 파멸의 신좌 전체가 분노했다. 갈팡질팡하던 혼종들도, 저 달걀 껍질 같은 차원의 벽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옥좌도 모조리 기괴한 외침을 토했다.

바닥이 크게 출렁이는 바람에 지구인 각성자들의 진형이 한 차례 흐트러졌을 정도.

김현은 단호히 선언했다.

[거절하겠다.]

[어째서?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만.]

[너도 결국은 지구를 잡아먹으려고 할 테니까. 아냐?]

[그건 그렇지. 저렇게 풍족한 성혼을 생산하는 곳은 전 차원계를 다 찾아도 드물다. 혼돈계에 버금가는 강력한 세계를 만들 수 있을 터. 내 새로운 세계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 때문이다.]

[아쉽군. 마음대로 해라.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푸화학!

신좌 내부에 차 있던 체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잔해를 온통 뒤덮어 버린다. 지구인 각성자들도 부리나케 하늘로 날아오른 다음 입체 진형을 짰다.

이제 신좌 내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우주수의 체액뿐. 파멸신의 무릎까지 체액이 찼을 정도이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알 만했다. 따끔한 통증이 발과 종아리에서 올라오고, 옥좌의 아랫부분도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녹기 시작했다.

파멸신이 한탄하며 부르짖었다.

[네가 우리를 다 죽이는구나!]

[천만에. 지금부터 시작이야.]

김현은 파멸신의 육체에 동기화하여 왼손을 뻗었다. 내려가는 왼손이 각성자들을 덮친다. 각성자들이 경기하듯 움찔했으나 하은이가 각성자들을 안심시켰다.

왼손 위에 각성자들을 올린 김현. 손바닥이 엄청나게 광활했다. 손바닥 직경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니 당연한 일이다.

파멸신은 김현이 알아서 하라는 듯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멸신의 거목이여.]

김현은 낮은 목소리로 우주수를 불렀다.

[완전한 신격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 네 덕에 곧 신격을 얻겠지. 고맙게 생각한다.]

[틀렸다.]

[뭐라고?]

[네가 신격을 얻기 위해, 꼭 나를 잡아먹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오른손을 내뻗었다.

집게손가락을 내민다.

파멸신의 눈이 어둑하게 빛났다. 그러나 발현되는 것은 파멸신의 권능이 아니었다.

대신 하은이가 이를 악물었다. 각성자들의 힘을 모두 모아 하나의 검을 벼려낸다. 타오르는 황금빛 검을 파멸신의 손바닥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금빛 선이 질주했다. 손바닥을, 팔을, 어깨를 타고 가슴을 지나 반대편 오른팔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증폭된다.

나라 하나 부술 힘에서 대륙을, 어쩌면 행성 하나를 소멸시킬 정도의 강력한 힘으로.

파멸신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빛이 맺혔다.

찬란한 금빛 구.

유령처럼 모호하며, 황금용의 비늘을 보듯 찬란하며, 거인의 눈동자처럼 위압감이 넘쳐 흘렀다.

팟!

일직선으로 발사되는 빛.

그것이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세계의 경계까지 솟구친 후 산산이 조각나 비처럼 쏟아진다. 무수히 떨어지는 빛무리가 우주수의 체액에 스며들었다. 그에 따라 걸쭉한 고름 같던 녹색 체액이 빛나는 황금색으로 물든다.

[이걸 공격이라고 하는 거냐?]

[공격이 아니다, 멸신의 거목. 설계도지.]

[뭐라고?]

우주수가 잠깐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김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멸신의 거목, 넌 뭐지? 무슨 존재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지?]

[이름 그대로다.]

[그래, 김현이라는 신(神)을 잡아먹는 거대한 나무, 그게 네 정체성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부족해. 그것으로는 완전한 9성 신격에 이를 수가 없어.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 기생하는 존재니까. 내 존재가 없이는 너 또한 존재가 성립되지 않는다.]

[너를 잡아먹으면 다 끝나는 일이다!]

[그래, 그렇겠지. 너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융합되면 끝이니까. 안 그래? 멸신의 거목, 너는 그걸 원하지?]

[잘 아는군!]

우주수가 크게 부르짖으며 체액을 폭주시켰다. 체액 속에서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파멸신을 칭칭 감는다. 파멸신이 분노하여 오른손을 내치자 나무뿌리가 모두 끊어졌으나, 체액이 부글거리며 다시 똑같은 물체를 토해놓았다.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없어. 이제부터 내가 파멸신과 함께 널 퇴치할 거거든.]

[헛소리를!]

[정말이다.]

김현은 오로지 하나만을 떠올렸다.

미칠 듯한 허기.

끔찍한 허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증오.

그것이 파멸의 신좌를 바꿔놓은 근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본인마저 신격의 저열한 욕망에 던져 버린 결과는 컸다.

거검을 들고 내리친 파멸신.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파멸의 신좌가 아닌, 파멸의 신좌를 갉아먹고 있던 거목계가.

[아니?]

경악을 금치 못하는 우주수.

이 순간 파멸의 신좌가 뿌리는 전투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11년간 떠나 있던 화신이 돌아왔을뿐더러, 완전히 새로운 신격으로 거듭나기 일보 직전이니까. 그것이 화신인 김현의 구상대로이건 간에, 본신인 신좌의 욕구대로이건 간에.

농익을 대로 농익어 터지기 직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김현과 분리된 상태라면 모를까, 김현과 함께 한다면 우주수가 파멸신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네가 9성 신격이 되기 위해서 꼭 나를 잡아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김현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하은이가 때를 맞추어 손바닥을 금빛 검으로 그어준 까닭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신격이 되려면 널 잡아먹고 원형을 획득하는 수밖에 없다!]

시작부터가 전자 생명체이자, 김현의 분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네 말은 틀렸어. 너도 알 텐데? 나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본은 아니야. 복제품이지. 너를 만들기 훨씬 전부터 그랬어. 안 그래?]

[너는 유산을 받았다!]

[맞아. 유산을 받았고, 후계자이자 영혼과 육체의 계승자로서 그 사람을 자처하고 있지. 하지만 내 정체성은 내가 선택한 거야. 나는 김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어. 엄밀히 말하면 복제니까, 다 무시하고 내 인생을 찾아가는 것도 가능했지.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너도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멸신의 거목. 너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번째는 나와 싸우다가 소멸하여 내 먹이가 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준 설계도를 참고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추는 거지.]

[새로운 정체성?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긴? 충분히 가능해. 9성 신격이란 결국, 세계의 기둥이자 청사진이니까. 너 혼자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나와 파멸신이 돕는다면 가능하지.]

[멍청한 얘기다.]

파멸신이 끼어들었다.

[어렵게 갈 것 없다. 나의 분신이여, 다시 힘을 합치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저런 나무 한 그루 쉽게 뜯어먹고 새 세계를 열 수 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네 속에서 자라는 씨앗, 알고 있지?]

[음……]

[내가 장담하는데 그걸로 신격을 얻으면 네 주요 속성은 포식이 된다. 지금도 배고프지? 목마르지? 신격이 되어서도 문제야. 지구를 먹고, 인류를 잡아먹을 때는 좋아도 창세가 끝나고도 끝없는 허기와 갈증에 시달릴 거다. 지금보다 더 심하게, 수십 배는 더 강하게 말이야. 그리고 네가 직접 움직이지도 못하고 권속들이 바치는 공물로만 연명해야 하는데 그게 좋을까? 완전히 지옥이다. 지난 11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걸.]

파멸의 신좌 전체가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파멸의 신좌와 멸신의 거목 모두 속성이 포식 계열이니까. 이것은 파멸의 신좌만이 아니라 멸신의 거목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지?]

우주수가 초조한 듯한 어조로 묻는다.

잠자코 하은이와 나누었던 계획을 공유하는 김현.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미친…… 이게 될 것 같으냐?]

[모르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상황이 낫다.]

우주수와 파멸신이 서로를 쏘아보는 것이 느껴진다.

수면 아래에서 파멸신이 은밀하게 김현을 밀어내려고 했다. 포식의 본능에 따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느니 보이는 모든 것을 잡아먹으려고 한 것.

그러자 별안간 파멸신의 왼손부터 팔뚝까지가 희미하게 빛난다. 팔꿈치 정도에 옅은 균열이 생기면서 기이한 마법진 같은 게 떠오른 것.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다 수틀리면 나도 생각이 있다.]

[네가 무슨 수를 쓰든 이미 미래는 확정되었다.]

[과연 그럴까?]

어느 광경을 보여준다.

왼팔이 잘리고, 우주수의 체액에 몸을 던지는 장면.

김현의 자아가 담긴 육체였다. 그것으로 우주수는 완전성을 획득한다. 파멸신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신좌를 집어삼킨 다음, 새로운 세계의 창세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주수가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그거 좋군. 그렇게 가지.]

[놈……]

거의 캐스팅 보트.

김현이 손을 들어주는 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파멸의 신좌가 답답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자아가 더욱 단단하게 형성되는 것을 보고 나직이 경고했다.

[잘 생각해. 영원히, 수만 년도 아니고 수억 년 이상 지금처럼 배고파하며 살래? 아니면 지금 한 번 참고 허기를 완전히 떨쳐 버릴래?]

[허기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래서 너를 내가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몇 번이나 바꿨던 사람이 바로 나라고. 방법이 뻔히 보이는데 왜 벌써 포기를 해?]

[11년 전, 나는 정상적으로 허기를 없앨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너를 만들었지.]

[그땐 그랬지.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 멸신의 거목이 있으니까 파멸의 신좌에게도 새로운 방법이 생겼지.]

파멸신은 신좌의 입이 되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자아가 조금씩 결정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하은이가 재촉하듯 금빛 검으로 파멸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지구인 각성자들의 집중력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신격들의 존재감을 버티기가 힘든 모양.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고 파멸신이 탄식하듯 대답을 했다.

[좋다, 네 의견에 따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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