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창세기 -2-
[탁월한 선택이다.]
[흥……]
우주수가 탐탁지 않다는 듯 나뭇가지를 뻗었다. 뱀처럼 파멸신의 다리를 감고 기어오른 나뭇가지가 정확히 파멸신의 심장을 꿰뚫는다.
파멸신도 비슷했다. 거검을 들어 내리꽂았다. 무한히 길어진 거검이 거목계와 신좌를 동시에 관통했다.
그리고 하은이.
김현의 통제에 따라 파멸신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십수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파멸신의 머리까지 닿았다. 지구인 각성자들이 함께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악마의 뿔이 돋아난 두상 위에서 하은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빛나는 검을 쥐고 높이 들어올린다.
"하압!"
한 마디 기합과 함께 단숨에 내리찍었다.
두개골을 파고드는 금빛 검.
검에 담긴 힘이, 그 속성이 짧은 순간 파멸신에게 부여되었다. 검게 물들었던 두 눈이 일순 화사한 별빛이 되어 쏟아진다.
[시작하지.]
창세를.
김현은 입안으로 그 단어를 굴려 삼켰다.
[흥.]
[훗.]
파멸신과 우주수는 빈정거리며 조소할 뿐.
둘은 하이에나와 같다. 김현이 워낙 완고하게 나왔고, 자칫 상대에게 기회가 넘어갈 것 같아 김현에게 동조한 것에 불과했다. 잠깐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바로 배신하고 물어뜯을 것이다.
상관없다. 이 정도 어려움 정도는. 외줄 타기는 김현의 특기였으니까.
손을 젓는다.
하은이로부터 빌린 속성이 전신에 거칠게 휘달린다.
심장으로 집중되는 힘.
명룡신왕.
황금빛 거대한 힘이 호호탕탕 나뭇가지를 타고 흘러들었다.
우주수가 거칠게 몸을 떨었다.
[크흠……]
[긴장하지 말고 내 설계를 따라.]
[널 어떻게 믿고?]
[날 알잖아? 너희 둘에게서 인류를 지킬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못 믿겠으면 반항하던가. 그럼 너와 나는 확실히 패배하고 파멸의 신좌가 모든 것을 가져가겠지.]
[흐흐흐.]
파멸신이 음험하게 웃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주수는 명룡신왕의 힘을 받아들였다.
어려운 일이다.
불안정하다고는 하나 멸신의 거목 또한 9성 신격. 틀을 뒤흔들어 변형시키고, 새로운 신성을 정립하기가 어디 쉬울까.
하은이의 도움을 받아 명룡신왕의 힘을 재조립한다.
명룡신왕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
영, 용, 신.
명왕의 힘부터 시작했다. 멸신의 거목도 유명계를 바탕으로 비롯되었으니까. 여기에 박탈된 자들의 한(恨)과 엘페리아의 세계수가 더해진 것이 멸신의 거목이라고 보면 되겠다.
'어렵구나.'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얼른 흘려보낸다.
실패는 곧 인류의 전멸. 지금 이것이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
딱 한 걸음.
그것만 잘 내디디면 끝이다. 이제는 안식을 찾을 수 있다.
박탈된 자의 한은 천천히 흐트러뜨린다. 우주수가 발악하며 꿈틀거리려고 했으나 용의 지혜와 영광으로 보듬었다. 미래의 권세와 영광을 약속하자 상처 입은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세계수에는 신이 깃든다. 정확히 말하면 거인이다. 나무 괴물 같던 세계수가 조금씩 인간 형태로 변했다. 신좌 내부를 가득 메웠던 체액도 증발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크윽."
갑자기 머리 위에서 누군가 신음을 내뱉었다.
한 7성 각성자였다. 혼력 집중을 너무 오래 지속한 까닭에 슬슬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버텨, 버텨."
옆에 있던 각성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각성자들 모두 하은이를 통해 현재 상황을 전달받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류 최후의 전투. 자신들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지 잘 알았다.
그러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티고는 있으나, 최근 승급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으으으……"
한 남자가 신음을 뱉다 말고 세계 한쪽을 돌아보았다.
차원 균열이 있는 곳.
이제는 사람 손처럼 변한 나뭇가지 너머로 푸른 지구가 보인다. 몽환적으로 아름답고, 뭇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우주의 보석.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들, 나 먼저 가네."
"잠깐, 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차피 더는 못 버텨! 자, 이걸로 몇 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힘들 내!"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가장 가까이 있던 각성자가 손을 뻗어보지만 실패. 이미 남자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며 순수한 혼력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방어막. 방어막이 혼력을 가둔다.
짙은 비애가 각성자들의 정신을 타고 달렸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하은이. 남자가 최후의 순간 뿌린 혼력을 온전히 흡수하여 김현에게 보냈다.
[하은아!]
김애경이 비통하게 소리쳤으나, 하은이는 전에 없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듀크 씨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저버릴 수는 없어요.]
[그건…… 그렇지.]
[속행하죠. 잠시 쉽니다. 4교대로 1명씩 죽을 때마다 1조씩 쉬겠습니다.]
지독히 냉정하고 현실적인 상황 판단. 김애경은 약간의 생경함과 차가움, 그리고 대견함을 동시에 느꼈다.
한 가지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용사.
하은이가 그 이름에 어울리게 성장했다는 것을.
이야기 속의 열혈 순수 용사는 아니나, 현실에 용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때 김현은 막바지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변형이 거의 완료되었다.
파멸의 신좌 바깥, 신좌를 갉아먹고 있던 나뭇가지가 변형되어 하나의 사람 같은 형체로 변했다. 식물과 인간이 결합한, 상서로운 기운을 풍기는 거인이었다.
그 크기가 엄청나다. 머리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 있었다. 반면 완전치 못하여 몸의 밀도가 균일하지 못하고, 신체 말단에서는 자꾸 변형이 일어나 원래의 식물 형태로 돌아가려고 했다.
[힘이 필요하다. 임시 변형에 불과해.]
[나도 알아.]
[방법은?]
[간단하지.]
김현은 새로 탄생한 거인의 발가락 하나를 땅에 박았다. 식물이 뿌리를 뻗듯 발가락에서 촉수가 한 가닥 튀어나와 북쪽으로 뻗어나간다.
정확히 말하면 노고산 쪽. 거인이 위치한 곳에서 지척이다. 예전에는 대한민국의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김현이 대한민국으로부터 조차하여 설립한 성혼 농장이 하나 있었다.
성혼 농장에 접촉한 촉수. 이내 그곳에서 순수한 성혼을 벌컥벌컥 흡수한다.
우주수, 아니 거인이 신음하듯 몇 마디를 내뱉었다.
[부족해, 부족해……]
[이것도 먹어라.]
거인의 발바닥에서 촉수가 무수히 뻗어나간다.
인천의 어떤 섬, 경기도의 어느 호수, 강원도의 소담한 봉우리……
거인은 세계의 성혼 농장이란 성혼 농장에 모두 뿌리를 뻗쳤다. 김현은 촉수를 인도하며 상황을 살폈다.
지난 11년간 지구에 건설된 성혼 농장은 총 1만여 개. 매일 생산하는 성혼의 양이 엄청났다. 인구가 늘었을뿐더러 각성자들의 질과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으니 가능한 일.
이내 충만한 힘이 거인을 가득 채웠다. 대신 지구인 각성자들만 죽어 나갔다. 명룡신왕 성혼을 유지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후읍, 후읍.]
[기분이 어때?]
[오랜만에 포만감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부족하다. 단순히 성혼을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당연하지.
신성은 성혼의 응축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으니까.
그러나 조건은 이미 갖추어졌다.
격, 틀, 힘, 전부.
부족한 것은 단 하나.
정체성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속성이자 개념이며, 권역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했다.
정신을 집중했다.
지구인 각성자 여럿이 더 죽어 자빠지는 것도, 뿌리가 성혼 농장을 관통하면서 생긴 혼란도 무시했다. 오롯이 멸신의 거목, 아니 새롭게 탄생하는 어린 신만을 주목했다.
[한 가지 묻지.]
[무엇을?]
[너는 누구냐?]
[나는……]
어린 신은 멸신의 거목이라고 대답하려다 말고 잠시 침묵했다.
[모르겠다. 나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존재다.]
[그럼 내가 네게 이름을 줘도 괜찮을까?]
[후후후…… 설계자여. 애초에 그러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대는 어찌 보면 내 창조자의 자아를 이어받은 자이니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
[좋다. 그럼 내가 네 이름을 짓겠다.]
잠시 심호흡.
어떤 형상을 떠올린다.
엘페리아의 세계수.
그 아름답고도 슬프던 모습을.
더불어 엘프 여왕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웅장하고 풍요로운 모습도 함께.
또 있다.
지구의 숲을 함께 상기한다.
초록빛 생명의 바다. 세계를 유지하는 근원. 삶으로 넘치고 죽음이 공존하며 빛과 그림자가 모여 바람이 불어 뭇 동물들이 지저귀며 뛰노는 그곳.
[아!]
어린 신이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환희에 찬 탄성을 지른다.
김현의 상상이 계속된다.
숲은 세계 전체를 뒤덮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굳건한 기둥이, 혹은 안온한 온실이 되어 세계를 보호했다.
행성을 뒤덮은 숲은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한쪽이 크게 돌출되어 언뜻 보면 거인 같기도 했다. 그 거인은 애정 어린 눈으로 지상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모든 장면이 어린 신의 정신을 크게 고양시켰다.
어린 신이 짧게 읊조린다.
[세계를 유지하는 자……]
김현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세계를 유지하고 생명을 융성시키는 자, 가장 거룩한 나무, 비슈누다.]
힌두 신화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전과는 많이 다른 형상이지만 뭐 어떤가. 김현은 힌두 신화에서 말하는 비슈누가 어린 신의 속성에 가장 부합한다고 보았다.
김현이 이름을 짓는 순간, 어린 신의 몸이 크게 한 번 깜빡였다. 이내 다소 불분명하던 머리가 어떤 형태로 고정되며 황홀한 연녹색 광채를 뿜었다.
[나는 유지자, 비슈누다.]
준엄한 한 마디.
그것으로 새로운 신이 탄생한다.
엄숙한 고요가 지구를 넘어 차원계 전체로 빛살처럼 퍼져 나갔다. 억조창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령한 연녹색 빛이 구름처럼 세상을 내리쬐었다.
혼란에 차 있던 이들이 비로소 평화를 되찾는다.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던 자도, 증오를 불태우며 폭력을 행사하던 자도, 슬픔에 젖어 현실에서 도피하던 자도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이들의 눈에 따스한 녹색 광채가 선연하게 맺혔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거인이 뿌리를 틀며 일어났다.
식물을 닮은 거인, 혹은 거인을 닮은 나무.
한반도가 있던 곳에 거룩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한반도는 없다. 있다면 유지자 비슈누가 있을 뿐.
그리고 뿌리.
비슈누의 뿌리는 지구 전체에 영향력을 뻗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도, 푸르른 강물 아래로도, 다 말라붙은 사막 모래 위로도 지나 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러면서 녹색 별 가루 같은 것을 뿌렸다.
"엄마, 이거 봐!"
교통사고로 두 팔을 잃은 아이가 자기 손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별 가루가 달라붙어 아이의 손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어머니가 놀라 자기 입을 틀어막는다.
"맙소사, 제이크!"
어째서일까.
두 눈에서 진한 눈물이 마구 용솟음쳤다.
지구 곳곳에서 기적이 벌어지는 것을 지구인 각성자들도 울며 지켜보았다.
아직은 별나라 이야기.
파멸의 신좌 속에 갇힌 이들은 비슈누의 생명을 나눠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도 기적을 지켜본바, 정신이 극도로 고양되고 있었다.
"나도 가지."
"헛수고로 만들지 말라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목숨을 던진다. 7성 각성자와 8성 각성자의 구분도 없다. 더 버티기 힘들다 싶으면 자신의 영혼과 육체, 성혼을 바쳐 명룡신왕을 유지 시켰다.
[내 차례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파멸의 신좌.
어느새 완전한 자아를 갖추었다. 그에 따라 거대한 공허가, 허기가 넘실대듯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낸다면 김현은 물론 갓 태어난 어린 신까지 잡아먹힐 상황.
걱정하지는 않았다. 신좌의 화신으로서, 신좌가 곧 주어질 이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네 이름, 이미 알고 있지?]
[그렇다. 하지만 직접 듣고 싶다.]
[좋아. 너는 시바다.]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전도자, 혹은 검은 흉성(凶星).
왜 이런 걸 만들었냐고? 비슈누와 힘을 합쳐서 파멸의 신좌를 몰아내지 않고?
무엇이든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기 때문이다.
비슈누가 있는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성혼이 넘쳐난다. 기적도 넘쳐난다.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결국에는 인구 포화로 문제가 생긴다. 성혼 역시 마찬가지. 과하게 풍요로운 성혼은 결국 재앙을 불러온다.
그것을 막을 존재가 바로 시바. 신에 의해 박탈된 죽음을 선고한다. 과하게 생성되는 성혼을 마음껏 빨아들인다. 그리하여 균형을 유지한다.
[그렇다. 그것이 내 이름이지. 나는 시바! 유일무이한 파괴신이며 종언의 예언자이노라!]
쩌렁쩌렁한 외침.
파멸의 신좌가 강하게 진동했다. 이어 거대하던 세계가 빠르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쏟아지는 바람에, 하은이가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삼촌!"
[그래.]
김현은 최후의 힘을 쥐어짰다. 비슈누가 탄생한 뒤 하은이가 보내오던 명룡신왕을 집약시킨 힘이었다. 그것을 망토처럼 두르고 지구인 각성자들을 껴안고 뛰쳐나간다.
황금색 혜성이 파멸의 신좌 내부를 가로질렀다. 그리하여 차원 균열이 닫히기 직전, 신좌에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다.
꾸웅!
둔탁한 굉음.
파멸의 신좌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축소되었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눈알 하나 크기까지 작아진다.
작은 점.
흑색의 별.
김현이 상상했던 검은 흉성.
그것이 도래하자 불길한 침묵이 세상에 내려앉았다.
어디까지나 잠깐에 불과했다. 강력한 파멸의 힘이 세상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꺄악!"
"아아악!"
각성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현도 신음을 겨우 삼켰다. 임시 육체로 삼았던 명룡신왕의 힘이 이 한 차례 충격으로 대부분 날아가 버렸다. 김현은 희미한 유령의 형체만을 유지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커다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기계도, 악마도, 곤충도 닮지 않은 순수한 빛 덩어리다.
빛?
아니, 지극히 순수한 어둠이라고 해야지.
보기만 해도 어두운 그것.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자극하는 공포. 죽음과 종말의 집약체이며, 온갖 생명을 포식하는 육식 동물이 게으른 미소를 지으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훌륭하구나.]
시바가 김현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하니 그 미친 계획을 성공시킬 줄이야…… 과연 설계자라고 부를 만하다.]
[과연 설계자. 이제 마무리 짓도록 하지.]
김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남은 각성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99명.
354명으로 시작했는데 255명이 죽은 것이다.
그들을 살려내기란 불가능하다. 파멸의 신좌 내부에서 소멸한 까닭에 시바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조금은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더는 누가 더 희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황금빛 유령의 모습으로 김애경에게 다가가자, 김애경이 눈물 젖은 눈으로 김현을 보았다.
"고생했어."
"현아……"
간신히 울음을 삼키는 김애경.
"이게 끝은 아니겠지?"
"모르겠어. 하지만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너……"
"어머니랑,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줘. 알았지?"
김애경이 묵묵히 머리를 끄덕인다.
김현이 공허를 떨쳐낸 다음에는 사이가 데면데면했던 부모님이다. 그들로서는 현 김현을 아들로 완전히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나갔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이 또한 인간의 마음이려니 하고 지나갔다.
대신하여 김애경을 꽉 끌어안는다.
김현을 껴안은 김애경의 눈에서 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기에 옆에서 다가와 둘을 한꺼번에 껴안는 하은이. 이세희도 합세하여, 넷은 한동안 따사로운 체온을 나눴다.
"김현 님, 고마웠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죽는 건 아니죠?"
"네, 죽지는 않아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선생님 손자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살아 있을걸요."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도 고마웠습니다."
넷이 떨어지자 에일리가 다가온다.
여전히 미인인 그녀. 12년 전 처음 봤던, 약간은 어리숙한 모습이 현재에 겹쳐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Mr. 김도 신이 되나요?"
"전 이미 신이었습니다."
"응? 아하하, 그게 그렇게 되네요."
에일리가 머쓱한 얼굴을 하더니 김현을 격하게 껴안았다.
"피터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겠어요."
"그렇죠."
완전히 소멸하여 영혼조차 찾을 수 없게 된 피터.
피터 생각을 하자 자연히 서경태도 생각이 난다. 뒤에서 이세희가 조용히 눈물을 찍어냈다. 김애경도 괜히 비슈누를 구경하는 척 딴청을 피운다.
그리고 사브리나.
아까부터 펑펑 울고 있었다. 김현이 옅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손짓하자 사마귀 앞발을 닮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좋은 일이죠? 축하드려야겠죠?"
"그럼. 좋은 거지. 나 죽는 거 아니다."
"감사해요, 사령관님.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절 구해주셨던 때부터, 지금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캐시 일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니에요. 캐시도 천국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피터, 서경태, 캐시 모두 영혼까지 소멸했다. 하지만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 치르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사브리나가 애써 서글프게 웃어 보였다.
차오웨이와 무함마드, 신필종, 메리 등 인연을 맺은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그들과도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99인과 모두 인사를 하고 나자 몸이 투명해져서 바람에 휘날리기 직전이 되었다.
"이제는 가봐야겠습니다."
"현아……"
"김현 님……"
"Mr. 김, 조심히 가요. 즐거웠어요."
"사령관님! 보중하십시오!"
"삼촌!"
마지막으로 하은이가 김현에게 달려들었다.
이제는 깃털같이 가볍게만 느껴지는 김현.
하은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처럼 투명한 손을 내밀어 하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하은이, 오늘 정말 잘했다."
"삼촌, 난……"
"앞으로도 잘할 수 있지?"
"응, 으응."
하은이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애써 웃어 보인다.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주고 몸을 띄웠다. 황금빛 유령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김애경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건강하고!"
"누나야말로."
천천히 승천하는 김현.
아래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하은이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더는 들리지 않았다. 오열하는 이세희와 사브리나, 그리고 애써 웃는 에일리의 얼굴이 점차 멀어진다.
김현은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선언해야 한다.
인간으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인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들으라.]
세계가 정지한다.
쉬지 않고 성혼과 생명을 생산하던 비슈누도, 불길하게 운행하며 별의 영혼을 빨아먹던 시바도 김현을 주시했다.
김현은 일개 화신이었다.
그러나 두 신격의 이름을 명명한 순간 그 격이 높아졌다. 이제는 김현 또한 어엿한 9성 신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름.
김현이라는 이름.
그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신성을 갖추어 신격에 오른다.
조금은 아쉽다.
단지 12년이 아니라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으니.
지구를 지키면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쓴 이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론이라는 이름 대신 김현이라는 이름을 썼듯이.
[나는 세계의 설계자.]
금빛 불꽃이 타오른다.
태양이 두 개가 된 것 같다.
엄숙하고 신비로운 음성이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물론 날아가던 새, 헤엄치던 물고기, 물 마시던 사슴, 노래하던 매미, 불어오던 바람, 일렁이던 파도, 흔들리던 대지까지 지구의 모든 것들이 불꽃을 주시했다. 거기서 번지는 선언을 가슴 졸여 듣고 있었다.
[신의 명명자이며 미래의 별이다.]
저 멀리, 모가디슈 앞바다에 있던 용사 도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보다 큰 인공 섬.
용사 도시에 있던 이들이 급하게 탈출한다. 모두 각성자인만큼 대피 속도가 빨랐다. 천천히 부상하던 용사 도시는 그들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속도를 올렸다.
위에서 보면 정사각형. 그러나 옆에서 보면 다르다.
피라미드.
팽이처럼 뒤집어놓은 정사각뿔 형태.
공간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용사 도시의 모든 것이 김현을 반겼다.
자신을 창조하였으며 신격의 그릇으로 쓸 그 존재를.
인지된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도시 전체가. 용사 도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공 태양부터 연구 시설, 지상의 근린 생활 시설과 수많은 학교, 차원문까지 전부. 심지어 가로등, 자율 운행 버스, 무인 자판기, 굴절 안내문과 같은 미미한 시설들조차도.
김현은 영혼, 용사 도시는 육체일지니……
이제 하나가 된다.
김현은 용사 도시의 풍향계로 바람을 느꼈고 용사 도시의 감지기로 세상을 보았다.
이어, 최후의 선언을 내리긋는다.
[나는 브라흐마다.]
꾸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범종이 울린 듯했다.
어둑한 굉음이 묵직하게 전 세계로 퍼졌다. 심장을 울리는 여파에 뭇 생명체가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변형되는 용사 도시.
응축된다.
작고 작게, 더욱 작게, 기껏해야 사람 하나 들어갈 크기로……
그래서 생긴 것은 하나의 별.
금빛 별.
지구를 똑 닮은, 오대양 육대주가 표면에 새겨진 황금색의 은은한 광채를 뿌리는 작디작은 별이었다.
어찌 보면 인공 지구의 두 번째 버전.
하지만……
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것은 보기만 해도 가슴 벅차게 하는 담담한 빛을 지구 전역에 뿌리고 있었다.
비슈누나 시바와는 다르다.
위압감은 없다. 압도적인 존재감도 없다.
내가 네 옆에 있다며 부드럽게 속삭이는, 작은 용기를 북돋워 주는 친구가 미소짓고 있을 뿐.
"현이야."
김애경이 손을 내민다.
별을 잡고 싶었던 걸까. 잡을 수는 없었다. 원시 불새를 타고 날아올라도 마찬가지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다른 차원계에 걸쳐 존재하니,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겠지.
달아올랐던 공기가 빠르게 식었다. 미칠 듯이 불어오던 바람도 그쳤다. 그것에서 다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창세가 끝났다는 것을.
"넌 결국 네 목표를 이뤘구나."
"엄마."
하은이가 김애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운 얼굴로 하늘을 한 번 보더니 김애경을 끌어당긴다.
"이제 가자."
"그래, 그래야지."
비틀거리는 김애경. 이세희가 얼른 부축했다.
"언니, 조심해요."
"걱정하지 마."
마지막으로 용사 도시가 변해 생긴 금빛 별을 한 번 돌아본다.
속으로 던지는 질문.
'넌, 내 동생이 맞는 거지?'
이내 피식 웃으며 자답한다.
'하긴 내 동생이 아니면 누구겠어.'
모두 돌아간다.
가장 가까운 도시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그곳으로.
귀환하는 각성자들을 축복하듯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