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에필로그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한다니까!"
퍽!
주하은은 베개를 힘껏 집어 던졌다.
베개가 터지며 하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게임을 즐기던 벤이 고개를 모로 꼬며 주하은을 보았다.
"그거 그제 산 건데."
"알아."
"성격 좀 죽여. 돈 아깝다."
"내 돈으로 산거거든? 그리고 너, 얹혀사는 주제에 잔소리 좀 하지 마."
"흐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네 팬들이 보면 진짜 깜짝 놀라겠다. 이 굼벵아!"
"으흐흐."
벤이 소파 위에서 크게 몸을 뒤집었다.
"그런 영양가 없는 작자들에게 신경 쓰느니 게임이나 한 판 더 해야지."
"옛날처럼 클럽이라도 가던가! 너, 두 달 넘게 집에만 있었던 거 알아?"
"이젠 남자도 지겨워."
"그럼 여자라도 찾아."
"됐거든. 게임이 좋아. 게임 속 남자가 더 잘생겼다고. 현실 남자는 질렸어."
"으으, 이 오타쿠! 히키코모리!"
"왜 그래. 방세도 따박따박 내잖아. 또 아빠가 괴롭혔어?"
"그 인간 얘기는 하지도 마!"
주하은이 화를 벌컥 내며 소파 옆 거품 의자에 몸을 던졌다. 자동으로 혼력 거품이 뿜어져 주하은의 육체를 어루만졌다. 전신이 이완되는 느낌에 주하은이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벤은 소파 위에 엎드려 주하은이 거품 샤워하는 걸 지켜보았다. 워낙 오래 같이해서인지 알몸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였다. 벤이 동성애자라 더더욱 그렇고.
"차원 개척법 때문에 그러는 거지?"
"어머, 게임만 하는 줄 알았더니 뉴스도 보나 봐?"
"주하은 TV라고, 내가 즐겨보는 잔소리 방송국 하나 있어."
"흥!"
주하은은 콧방귀를 끼고는 거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열리며 거품 의자가 저절로 바닥 아래로 사라진다.
"말이 돼? 우리가 대대적으로 공격받은 게 겨우 20년 전이야. 그때 죽은 사람이 수억 명이야, 수억 명!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역으로 다른 세계를 침공하겠대?"
"인구가 빨리 느니까 그렇지. 벌써 90억이 넘었잖아. 성혼 사태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야. 100억 돌파도 시간 문제고."
"지구는 100억이 아니라 200억, 300억 명도 보살필 수 있어. 비슈누 님께서 계시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결국 한계는 있어."
"넌 차원 개척법에 찬성하는 모양이다?"
"알면서 왜 그래? 나도 반대야. 단지 찬성 쪽에도 정당한 이유는 있다는 거지."
주하은이 볼을 복어처럼 부풀렸다. 벤이 그걸 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의장님께 의사 표명해달라고 해. 간단한 인터뷰 같은 걸로. 의장님은 확고한 반대파시잖아."
"우리 엄마? 말을 안 하니 문제지. 아무리 의장이라도 그렇지, 자기 의견 정도는 말해도 되잖아."
"내 말이. 의장님은 너무 원리원칙주의자셔서 조금 그렇기는 해."
"그러게 말이야."
"하여간 정말 대단한 가족이야. 지구 의회에 셋이 다 있고."
"한 명은 가족 아냐."
"뭐, 그렇다고 해."
주하은, 김애경, 주태일.
현재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
7성 이상 각성자로만 구성되는 지구 의회에 셋 다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에 김애경은 아예 의장을 맡기까지 했다. 사실 주하은의 또 다른 신분이야말로 무시무시하지만.
현재 지구의 전력, 8성 각성자 21명에 7성 각성자 100명.
창세 직후에 비교하면 꽤 늘긴 했으나 속도가 느렸다. 마왕 대전을 준비하던 10년처럼 간절하게 수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겠지. 가장 뛰어난 스승도 사라져 버렸고.
"삼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주하은은 움찔 놀랐다.
"사령관님?"
벤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이젠 브라흐마 님이시지. 글쎄? 솔직히 짐작은 안 가. 하지만 워낙에 거침없던 분이니 한 대 세게 갈기셨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서 주 의원님은 얄밉게 굴긴 해."
"그랬겠지?"
"예전에도 비슷한 일 있었다며."
"응, 맞아."
주하은은 뉴욕에서 훈련소 문제 때문에 주태일이 찾아왔던 날을 기억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캐티는?"
"뻔하지. 용사 동상에 갔을 거야."
"또?"
"동생이 죽었으니까. 마음이 아플 만도 하지."
"벌써 8년이 지났는데……"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일은 있으니까."
"하아, 캐티 데리고 올게."
"왜 굳이?"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던가."
벤은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잠깐 중단했던 게임을 재개했다. 눈동자에 돌아다니는 화려한 광원을 보다 몇 번 머리를 젓고는, 옥상에 있는 차고로 올라갔다.
"어,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
마침 옥상에는 한철군과 한스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캐티 데리러 가요."
"아, 용사 동상에요…… 친구분께서 아주 힘드신가 봅니다."
"그러게요. 이제 마음 추스를 때도 됐는데."
"피붙이의 죽음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죠."
"하아, 병태는 어때요? 이번에 졸업한다면서요?"
"예. 아가씨 배려 덕에 좋은 직장을 얻었습니다."
"낙하산은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당연하지요."
한철군과 한스는 예나 지금이나 하는 일에 변화가 없다.
8년 전 창세 후 김현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재산의 일부는 부모님에게, 또 일부는 김애경에게 주고 나머지는 조카인 주하은에게 상속한다는 것.
따라서 한철군과 한스의 계약도 주하은에게 승계되었다. 워낙 유명한 둘이라 여기저기서 영입 시도가 있었으나 둘 다 뿌리쳤다. 김현이 여러 의미에서 주하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좋은 선택이었다. 둘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차원 기업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으니까.
"아가씨."
옥상 구석의 차고로 가려는데 한스가 주하은을 불렀다.
"왜요?"
"무법성에서 흘러나온 소문입니다만, 새롭게 성혼 생산 행성이 발견된 것 같습니다."
"또요?"
"예. 벌써 세 번째지요.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습니다. 불법 개척자들이 이미 떠났다는 보고가 있어요."
원래 성혼 생산 행성은 이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외계종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지구 시간으로 수백 년에 하나가 발견되어도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주하은은 인상을 팍 썼다.
"휴,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을."
"그럼 아저씨들, 다음에 봐요!"
"예, 아가씨. 살펴 가세요."
주하은은 차고로 들어가 불을 켰다.
잘 빠진 유선형의 은빛 차체가 주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신형 자동차.
저절로 문이 열렸다. 거기 들어가자 시동이 걸리며 인공지능이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하은 양. 어디로 모실까요?]
"용사 동상!"
[최단 경로를 설정합니다…… 모가디슈시 중앙 통로를 이용하여 도약하겠습니다.]
자동차가 사뿐 공중으로 떠올랐다. 차체 하부에 달린 혼력 추진 장치가 푸른 섬광을 토하고 있었다. 이내 돌고래처럼 날쌔게 차고를 빠져나가 모가디슈 상공을 주행한다.
한때 괴물들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모가디슈.
지금은 뉴욕이나 런던, 도쿄에 뒤지지 않는 번화한 도시가 되었다. 고층 건물이 탑처럼 곳곳에 삐죽삐죽 돋아 있다. 그런 마천루의 숲을 자동차와 외계 탈것이 날아다녔다.
"구아아악!"
철갑 비룡 한 마리가 아슬아슬하게 자동차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주하은은 비룡 위에 타고 있던 한 쌍의 연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주하은이 탄 자동차는 척 보기에도 최고급. 그래서 가끔 시비를 거는 족속이 있다. 자동차보다야 외계 탈것이 더 고급이라고 으스대는 것이지.
'양아치 같으니.'
예전에는 시비가 걸리면 쫓아가 탈것에서 떨어뜨려 주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귀찮다. 무시하고 자동차의 자율 주행에 모든 것을 맡겼다.
자동차는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고층 건물 사이를 지나 하늘 위의 기괴한 구조물로 날아간다.
그것은 거대한 나무.
반투명한 나뭇가지가 잎사귀와 열매를 가득 맺은 채 서 있었다. 교차하는 나뭇가지 사이로 물결처럼 출렁이는 푸른 원반 같은 것이 보인다. 구가 아니라 원. 기이한 것은 어느 각도에서 보든 납작한 원반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리 법칙에서 어긋나지만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저 원반은 신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니까.
통로, 비슈누의 길, 거룩한 나무의 축복이라 부르는 저것.
예전 아차원 공간과 인공 지구를 통한 공간 이동을 완벽히 대체한 축복이었다. 저길 통과하면 원하는 지점으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 방법도 쉬웠다. 컴퓨터에 목적지를 입력하거나 스스로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팟!
비슈누의 길에 접어드는 자동차.
세계가 푸르게 물들더니 이내 시야가 트이며 드넓은 바다가 망막에 맺힌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
예전에는 독도라는 작은 섬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섬 전체에 거대한 동상을 세웠다.
수백 명을 함께 표현한 동상.
굳게 다문 입술에 결연한 눈을 빛내는 남자가 중심에 있다. 하늘을 향해 굳게 쳐든, 기계 질감을 표현한 왼팔이 인상적이다.
김현.
다른 사람들도 있다.
김애경, 이세희, 사브리나, 에일리, 심지어 주하은과 벤, 캐티, 등등.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서경태와 피터, 캐시마저도.
용사 동상에는 마왕 대전에 참전했던 354인만 담지 않았다. 김애경과 이세희의 강력한 주장으로 혼흔을 남겼던 이들도 모두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자동차가 주차장에 내려앉자 주하은도 하차했다.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쓴 상태.
언제나 있던 곳에 그녀가 있다.
한반도에 자리 잡은 비슈누에게서 등을 돌리는 방향. 캐시가 옛날 그 모습으로 애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 그곳, 난간 바로 옆에.
"어?"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다.
주하은은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30대 흑인 여성. 실상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 중 하나, 바로 사브리나였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하은이구나."
사브리나의 어투는 언제나 그러했듯 무뚝뚝했다.
캐티가 고개를 들더니 우울한 눈으로 주하은을 보았다.
"왔어?"
"응. 오늘도 아침부터 이러고 있던 거야?"
"그랬지."
캐티가 다시 캐시의 조각을 본다. 손을 뻗어 어루만지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걸 보면 캐시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아……"
"캐티."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아, 알았어."
주하은도 캐티의 옆으로 다가갔다. 캐티가 사브리나에게 그러는 것처럼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껴안자 움찔하더니, 이내 가만히 눈을 감고는 어떤 감정에 잠겼다.
"나 말이야."
"응?"
"지구를 떠날까 해."
"뭐라고?"
급히 고개를 돌려 캐티를 바라본다.
캐티는 주하은을 보지 않았다. 우울한 눈으로 캐시의 조각을 보다가 고백하듯 털어놓는다.
"이번에 새로 성혼 생산 행성이 발견된 건 알지?"
"그건 아는데…… 진심이야?"
"응. 거기 가려고."
"잠깐만. 넌 8성 각성자잖아. 차원의 벽은 어떻게 넘어가려고?"
"이렇게."
캐티가 입고 있던 외투 자락을 들쳤다. 그러자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드러난다.
주먹 크기, 연녹색 강렬한 빛을 뿌리는 목걸이.
그걸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걸이에 캐티의 성혼이 고스란히 담긴 까닭이다. 마치 캐티의 성혼을 추출한 듯한 모양새.
살아 있는 상태로 성혼을 추출하는 게 가능해?
캐티가 다시 외투를 추스르며 말했다.
"비슈누 님께서 도와주셨어. 내 성혼을 절반만 뽑아낸 거지. 지금 나는 4성 각성자야."
"그, 그게 가능해?"
"비슈누 님이니까. 아, 주기적으로 지구에 돌아올 거야. 내 성혼을 주기적으로 충전 받아야 해서. 이것도 나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말라붙어 버리거든."
"그렇구나……"
"네가 차원 개척법에 반대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차원 개척하러 간다고 해서 꼭 현지종을 고문할 필요는 없잖아? 최소한 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왜 가는 건데?"
"그냥 기분 전환하고 싶은 것도 있고, 그리고……"
캐티가 주하은의 눈을 피했다. 주하은은 캐티가 애써 감추고 싶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분노와 증오.
지구를 침략했던 외계종들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남은 것이다. 세월이 지나며 더욱 깊어지고 날카로워져, 지금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사브리나가 캐티의 어깨를 감싸고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은이 네 의견도 일리가 있어. 우리끼리만 살면 성혼은 충분해. 주 의원은 인구 포화를 걱정하지만 사실 의미 없는 걱정이지. 시바 님께서 주기적으로 생명을 거둬가셔서 결국은 균형이 맞춰지니까."
"그럼 왜……"
"간단해. 나는 아직 원한을 잊지 않았거든. 여기 캐티도 마찬가지고, 켄트 대장과 중국 황제, 사우디아라비아 왕도 마찬가지지."
에일리는 여전히 공격대장이다. 무법성을 통해 떠돌이 괴물들을 사냥하고, 가끔은 열여덟 세계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차오웨이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주석 자리를 물려받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황조를 열었다. 수명이 거의 무한할 테니 중국의 인민은 대대손손 차오웨이의 지배를 받겠지.
사우디아라비아? 누구나 짐작했듯 무함마드가 왕위를 가졌다. 피의 숙청을 예상했으나 숙청은 없었다. 무함마드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태도로 통치를 시행했고, 지금은 평화의 대부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세희 이모는 아니에요. 테일러 이모도 그렇고요."
"이 원장님은 그렇겠지…… 원래 온화하시던 분이잖아. 그런데 테일러? 설마 그 음흉한 여자 말하는 거야? 그 여자 얘기는 하지도 마."
"왜요? 그분이 한때 실수는 좀 했어도 결국에는 우리 편으로 돌아왔어요."
"어쨌든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마."
"뭐, 알았어요."
사브리나가 질색하자 주하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묻는다.
"그럼 성혼학 연구소장님이랑 UN 사무총장님, 심지어 망명 대한민국 대통령님이나 지구 의회군 총사령관님은 어때요?"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른 거지 뭐 어때? 그리고 개척법에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아."
명망 높은 사람들.
모두 김현과 인연이 있다.
성혼학 연구소장은 바로 메리 린디아였다. 용사 도시 연구 시설을 대체하여 세계 유수의 연구 시설이 모인 성혼학 연구소장 자리를 꿰찬 것. 지금은 세계 어딜 가도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UN 사무총장? 바로 케말 압둘라히였다. 김애경의 비서에서 시작하여 모가디슈 시장, 소말리아 대통령을 거쳐 사무총장의 자리까지 오른 것.
대한민국 대통령은 신필종이다. 의회군 총사령관은 정경식이었다. 원 역사에서 그들이 경술팔적이라고 불렸다는 걸 생각하면 가히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격.
"정말 이렇게 나오실 거예요?"
"난 이해가 안 돼. 왜 그렇게까지 개척법 통과를 막는 거야? 범죄만 막으면 되잖아, 범죄만."
"이게 첫걸음이니까요. 두고 보세요. 언젠가 효율성 운운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성혼 추출하는 자가 나오고 말 거예요."
"그건 내가 막을 거야. 그런 작자 생기면 모가지를 딸 거라고."
"살인은 중범죄에요."
"흐응."
사브리나가 묘한 코웃음을 남겼다.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리자 코트 사이로 언뜻 까맣고 예쁜 손이 보인다.
"손 예쁘네요."
"그렇지? 비슈누 님은 참 고마운 분이야."
사브리나가 서쪽의 거대하고 반투명한 나무 거인을 향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
비슈누의 기적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기적이 지구 전체에 베풀어졌다.
인류의 진화.
영육 개변했던, 소수 인체 개조했던 이들 모두 인간의 육체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예전의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 김애경이나 리아처럼 환골탈태한 듯 강력하고 아름다운 육체였다.
그것은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류 전체의 평균 신장이 부쩍 자랐고, 근골은 강건해졌으며 성혼 적성은 인류 대부분이 최상급으로 올라섰다. 예전에는 그 찾아보기 힘들던 극상도 왕왕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요즘에는 비슈누 신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바 신앙도 그러했다. 비슈누 신앙에는 미치지 못해도 그 강력한 파멸의 힘에 경도되어 추종하는 무리가 일부 나타났다.
브라흐마는?
없다. 거의 없다. 그저 모가디슈 상공에 떠 있을 뿐, 별다른 기적이나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럼 내일 본회의에서 보자."
"조심히 가세요."
사브리나가 몸을 솟구쳐 빛이 되어 사라진다. 캐티도 자기 목걸이를 매만지며 사브리나의 뒤를 따랐다. 아마도 내일 본회의에 참석할 모양이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는 주하은.
무력한 자신이 밉고,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친구들이 원망스러웠다.
이럴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현.
어릴 때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조금 커서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보호자였던 사람. 그리고 인류 최고의 각성자인 것을 알고 내심 무척 자랑스러워했었지.
삼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누군가는 말했다.
김현이 남아 있었다면 차원 개척법을 상정하지도 못하게 했을 거라고.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 김현은 차원 개척법을 통과시켰을 거라고. 누구보다도 인류를 사랑하던 이였으니.
"모르겠다."
고개를 젓는 주하은.
짙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8성 각성자, 즉 반신의 육체. 피로가 느껴질리 없으나 최근의 격론으로 인해 주하은은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삼촌, 보고 싶어."
휘적휘적 걸어가 자동차에 탑승한다.
인공지능이 윙윙거리며 자신을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널브러지듯 좌석에 앉아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러자 인공지능이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방향은 남서쪽.
주하은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교차하듯 달리는 비행 자동차와 탈것들, 그리고 거대한 비행선 및 공중함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슈누를 보러 온 관광객, 혹은 신자들이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했어……'
자동차는 비슈누의 길을 통하지 않고 계속 비행했다. 초음속은 이미 돌파한지 오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모가디슈 상공에 도착했다.
"삼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 높이 떠 있는 금빛 별.
주하은은 자동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행 정도는 쉽다. 금빛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 금빛 별로 다가간다.
비슈누나 시바와 같이 반투명한 상태. 여러 차원에 겹쳐진 까닭이다. 주하은은 습관처럼 금빛 별에 손을 뻗었다.
기껏해야 직경 2미터의 구.
하얀 손은 허무하게도 황금색 구를 통과하여 지나갔다. 마치 유령을 만지는 것과 같다. 비슈누나 시바와는 다르게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허망할 뿐.
"삼촌,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8년.
그동안 인류는 주하은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주었다. 마왕 대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탓인지, 지구 최강의 각성자라는 칭호를 새롭게 얻어서인지 김현이 사실상 갖고 있던 지구군 총사령관 직위를 준 것.
모든 각성자는 명목상으로 지구군에 소속된다. 지구가 침략당하면 주하은은 어떤 각성자에게든 생살여탈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제 20대 아가씨인 주하은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김애경도 자기 일이 바빠 신경을 못 쓰니……
그리웠다.
든든하던 사람이. 보호자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애써 웃으려고 했으나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어디론가 도망치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리 하은이, 많이 힘드니?]
그리운 목소리.
듣고 싶은 목소리.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굵직하고 낮은 그 목소리.
"사, 삼촌?"
[그래, 나다.]
"어떻게?"
[어떻게긴.]
순간 금빛 별이 주하은을 빨아들였다.
세계가 금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잠시 후, 주하은은 어느 아파트에서 눈을 떴다.
"여긴……"
눈에 익은 곳이다.
언제인지 모르겠다. 김현이 아직은 유명해지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그래,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머물렀던 아파트다. 정확히 말하면 김애경의 아파트. 그곳에서 김현과 김애경, 이세희가 어떤 계획을 꾸미는 걸 유령에 빙의된 상태로 죽은 듯이 지켜보았지.
기껏해야 20평대의 아파트. 구조가 그때와 똑같다. 거실에 걸려 있던 TV도, 그 앞의 소파도.
딱 하나 다른 것이라면 김현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다는 점 정도.
"커피 마실래?"
"삼촌!"
주하은이 왈칵 달려들었다.
전력으로 부딪친다.
김현이 웃으며 주하은을 안아주었다. 따스한 체온과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생전의 감각 그대로였다.
"살아 있었어? 죽은 줄 알았잖아!"
"응? 내가 왜 죽니? 난 하은이보다 오래 살 건데?"
"그럼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아하, 미안. 잠자느라 말이지."
김현은 머리 꼭대기를 가리켰다. 위를 올려다본 주하은이 헛바람을 삼켰다.
거대한 금빛 거인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롱거리는 숨소리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보고 있노라니 주하은 본인까지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거인의 얼굴도 낯에 익었다. 바로 김현. 피부만 금색이지 다를 게 없었다.
주하은이 낯선 얼굴로 거인과 김현을 번갈아 보더니 묻는다.
"뭐, 뭐가 진짜야?"
"당연히 저거지. 난 화신이자 꿈이야."
"꿈……"
"그래. 나는 브라흐마가 꾸는 찰나의 꿈이자 잠꼬대, 뒤척임 같은 거야."
김현은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 앉았다. 손에 든 커피잔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그 향기를 만끽했다.
주하은이 우울한 표정으로 김현을 주시했다.
"삼촌은 정말 죽은 거야?"
"응? 죽은 게 아니라 신격이 되어 승천한 거지. 누가 죽었다고 그래?"
"인간 김현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그래두 아직 살아 있잖아. 이렇게 나랑 얘기도 하고."
"글쎄다. 조금 있으면 사라지니까 죽었다고 봐도 좋지."
주하은이 울 것 같은 눈을 한다. 김현은 담담하게 웃으며 주하은을 안아주었다.
"울지 마라. 나는 살 만큼 살았고 하고 싶은 일은 다했어."
"그래두……"
"괜찮다니까. 난 네가 걱정이다. 왜 우는 거니? 남자친구가 괴롭혀?"
"그런 거 아냐."
"그럼?"
어느새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8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
주하은은 한참이나 김현을 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삼촌, 차원 개척법이라고 알아?"
"알지. 요즘에 방송국이라는 방송국은 전부 그 얘기밖에 안 하더라."
"죽은 사람이라더니, 뉴스도 보나 봐?"
"심심하니까. 인터넷도 하는데? 사실 가상현실 게임도 하고 있어."
"맙소사……"
주하은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쨌든 그게 왜?"
"그렇잖아. 차원 개척법 그거, 완전히 우리를 외계종으로 만드는 법 아니야?"
차원 개척법은 인류의 외계 차원 진출 및 현지종 접촉을 허가하는 법이었다. 현지종에 대한 범죄는 엄격하게 제한되지만, 사실 여기에도 맹점이 있었다.
현지종을 인간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 지금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물로 본다. 현지종을 학대해도 동물 학대와 같은 수준에서 처벌받는다는 얘기.
김현은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삼촌, 보고만 있을 거야?"
"응? 하하하, 하은아. 난 이미 퇴장한 몸이야. 이제 지구의 일은 지구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개입해서는 안 된단다."
"왜?"
"그야 이 삼촌은 현재의 별이 아니라 미래의 별이니까."
주하은이 의구심에 찬 눈길을 던진다.
그저 웃기만 하는 김현.
창세 때 브라흐마의 이명을 미래의 별이라 정의한 이유가 있다.
현재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비슈누와 시바의 몫. 브라흐마의 천명은 미래에 강림한다.
아득히 먼 미래.
수억 년, 수십억 년이 아니라 일경 년, 아니 무량대수 년을 지나 모든 차원계가 성혼을 잃고 혼돈이 넘쳐흘러 공허가 태어날 때, 브라흐마가 비로소 이 세상에 재등장한다.
주하은은 물론 김애경, 이세희 등 김현이 아는 모든 생명이 다 사멸하고, 현재의 인류가 진화하여 출현할 만신족도 멸종하고, 비슈누와 시바마저 모든 권세를 잃어 영락할 그 시점에야 비로소.
김현은 안다.
눈앞에서 입을 삐죽이는 주하은이 어떤 질곡 심한 인생을 살지, 그리하여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
그러나 개입하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항상 불행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행복할 때도 있고, 영화로울 때도 있고, 그만큼 내리막길이 있을 뿐이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울먹이며 말하자, 김현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면 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
"그래. 삼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삼촌…… 나, 확신이 없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차원 개척법을 원하니까, 내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
10년도 전에 다 자라서 자기 역할을 했던 주하은이다. 그런데 지금은 꼭 20년 전의 그 꼬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김현은 어린 조카를 위해 천기를 살짝 누설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은아. 찬성과 반대, 둘 다 일리가 있는 건 알지?"
"응……"
"차원 개척법이 통과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완전히 19번째 외계종이 되고 말아. 수많은 외계인을 학살하고, 개척과 교류,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를 만들고 말 거라고."
"맞다. 그 말은 네 말이 맞아."
"그렇지?"
"암. 그러다가 둘로 쪼개진단다."
"응?"
"한쪽은 비슈누를 믿는 진영, 다른 한쪽은 시바를 믿는 진영으로 갈려 세계 대전을 벌일 거다. 세계 대전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식민지에도 전쟁이 번지고, 급기야 열여덟 외계도 참전하여 차원 대전이 벌어진단다. 그 결과 다섯 개의 세계가 멸망하고, 비슈누와 시바도 큰 타격을 입고 긴 잠에 빠지지. 우리의 성혼 문명도 역행하여 지금 수준으로 퇴화할 거다."
"말도 안 돼……"
주하은의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이내, 두 눈에서 별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막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글쎄다. 과연 그럴까?"
"왜, 또 왜?"
"네가 작정하고 밀어붙이면, 특히 무력을 쓰면 이번 차원 개척법을 막을 수 있을 거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지. 넌 지구 최강의 각성자니까. 하지만 무한하지는 못해. 결국 외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막지는 못할 거다. 외계 거점이 생기고, 음습한 범죄가 판을 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식민지 연맹으로 발전하지. 이들은 외계를 끌어들이고, 너와 지구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에는 차원 대전으로 번지지. 이때도 비슈누와 시바는 타격을 입고 우리 문명이 퇴화한다."
"그런……"
주하은이 김현의 손을 꾹 잡았다.
"그럼 우리는 멸망하는 수밖에 없어?"
김현은 부드럽게 말했다.
"태어남이 있다면, 반드시 죽음이 있단다. 문명도 마찬가지지. 모든 문명은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어."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하은아, 네가 모든 걸 다 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라. 단,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힘껏 노력하되 대세를 따르면 된다. 네가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새로운 영웅들이, 주인공이 계속 나타날 거고 그들에 의해 우리 인류는 흥망성쇠를 거듭할 거다. 이 세계, 지금의 다차원계가 종언을 맞는 그 날까지."
"정말? 정말 그거면 돼?"
"그래."
"하지만 내가 대세를 따라도 차원 대전이 벌어진다며!"
울부짖는 주하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바꿀 수 있는 역사가 있고, 바꾸지 못하는 역사가 있단다. 차원 대전은 숙명이란다. 어떤 식으로든 벌어지게 되어 있어."
"그래도……"
"대신 거기서 인류가 끝장날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새로운 씨앗을 심을지는 네 하기에 달렸다. 우리 하은이가 당분간은 세계의 주인공이야."
김현의 존재로 인류는 한 단계를 넘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주하은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하은의 떨림이 점차 옅어졌다.
지구군 총사령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거운 책무.
세계의 주인공.
하지만 어째서인지 답답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가라. 그거면 돼. 타협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네 길을 가면 역사도 옳게 갈 거다."
"반대파를 모조리 죽이면?"
"그래도 된다. 회의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기만 해. 그러면 결국에는 희망이 싹을 피울 테니."
"세희 이모처럼 부드럽게 가는 건 어때?"
"그것도 좋지. 그때는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내해야 하고. 네 선택을 후회하고 번민해서 지그재그로 움직이지만 않으면 된다."
"피이. 뭐든 다 좋대."
"실제로 그러니까."
물론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주하은 본인에게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차이가.
그러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괜한 개입은 주하은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하은이 오롯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주하은 본인에게도,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좋다.
주하은이 김현의 목에 매달렸다.
어렸을 때처럼 귀에다가 대고 속삭인다.
"삼촌, 나중에 또 찾아와도 돼?"
"그러렴. 자고 있으면 못 데려오니까 노크하고 대답 없으면 그냥 돌아가."
"내 맘이야."
"하하하."
입을 삐죽인다.
어렸을 때 그대로의 모습에 김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세상이 거품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본신, 브라흐마가 조금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모양이다.
아마 몇 년 동안은 의식을 유지하지 못하겠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꿈속에서 세계를 구경하다가 다시 잠이 들 것이다.
"삼촌 나빠!"
주하은이 울며 소리쳤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꿈과 현실이 교차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되어 소용돌이친다.
깨었고 잠들었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가끔은 침묵했다.
유장한 시간의 흐름.
그 가운데 김현이 느끼는 것은 만족감이었다.
'난 내 사명을 다했다.'
아론, 옛 김현, 새 김현……
삼생(三生)의 사투 끝에 이뤄낸 성과.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지. 그래도 무량대수의 해가 지나간 다음에야 벌어질 일이니 이제는 쉬어도 되지 싶다.
눈을 감는 김현.
눈을 뜨는 김현.
잠자는 김현.
꿈꾸는 김현.
나른한 부유감 속에서 김현은 그렇게 강 같은 평화를 누렸다.
언제까지나……
<다시 쓰는 헌터사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