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더 소울(The Soul) - 선택받은 이들(2)
그 순간에도 건은 계속 눈을 감고 혼자 중얼거리며 척준경을 막으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척준경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정도 벽은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지? 이 꼬맹이는…….’
마음의 눈을 통해 지긋이 건을 바라보는 척준경. 그는 건의 몸을 넘어 안쪽에 있는 영혼까지 한 번에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그것’을 보고 말았다.
“헉!”
깜짝 놀란 척준경은 재빨리 자신의 심안을 거두어들였다.
‘그냥 애송이 꼬마가 아니었군.’
척준경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저 꼬맹이의 육체를 차지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척준경은 다시 한 번 건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 꽤 재미있을 거 같아.”
비록 당장은 엄청나게 답답하겠지만,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그 정도는 잠깐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의 구백 년에 가까운 세월도 참았는데 그 정도를 더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크크크, 내 인복은 영원히 진흙탕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군.’
척준경은 당장에라도 건을 집어삼킬 것 같던 흉포한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꼬맹아, 안 잡아먹을 테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봐라.”
척준경이 그렇게 말하자 건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건이 눈을 뜨니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한 명의 거대한 무인이 눈에 보였다.
“당, 당신이 척준경님이신 건가요?”
“그래, 내가 척준경이다.”
“그럼 전 이제 살 수 있는 건가요?”
“살 수 있지. 하지만…… 그냥은 못 살고 나와 계약을 해야 한다.”
“계약이요?”
“그래, 영혼과 영혼의 계약. 우린 이걸 ‘맹약(盟約)’이라고 부르지.”
“그걸 꼭 해야만 제가 살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
“그럼 하겠습니다.”
건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이게 꿈인지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이상한 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크크크크, 이거 무슨 떨이로 팔려나가는 느낌이군. 하지만…… 내가 참도록 하겠다.”
척준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난 대무신 척준경! 그대와 맹약을 원한다.”
지이이이잉.
칠흑과 같은 그 공간이 마구 흔들리며 척준경과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제 이름은 백건. 저도 당신과 맹약을 원합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건은 자연스럽게 맹약의 말을 내뱉었다.
“백건…… 이제부터 너와 나는…….”
척준경과 백건이 맹약의 선언을 하자 두 사람의 영혼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곤 강한 빛과 함께 폭발했다.
“하나다!”
번쩍!!
칠흑의 공간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하얀빛. 이로써 백건은 척준경과의 맹약에 성공하며 기적과 같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 * * *
“으으음…….”
건은 머릿속이 하얀빛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나셨군요.”
건의 옆에는 정신을 잃기 전에 잠깐 보았던 백발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아,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우선 제 소개를 먼저 하죠. 전 백무결이라고 합니다.”
“……그게 꿈은 아니었군요.”
건은 백무결을 보자 마치 꿈처럼 느껴졌던 이상한 경험들이 진짜 현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죠.”
“그런데…… 여긴…….”
“네, 당신의 방입니다. 지갑에 여기 출입증이 있길래 가깝기도 해서 여기로 왔습니다.”
이곳은 바로 백건의 고시원 방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죠?”
“지금 정확히 하루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아! 젠장 아르바이트…….’
건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떠올렸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한 것이라고 해봤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신을 잃으셨을 때……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나요?”
봉인된 영혼주에 어떤 영혼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백무결은 건이 만났을 그 영혼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예, 만나긴 했습니다.”
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나요?”
“그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건은 누군가를 만나긴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었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길을 걷는 것처럼 기억 자체가 너무나 뿌옇게 변해 있었다.
‘맹약의 흔적도 보이질 않고 그렇다고 혼마가 된 건 더더욱 아니고…… 뭐지? 영혼은 당장에라도 세상에 나오고 싶어했을 텐데 이런 허약한 계약자를 그냥 살려줬다고?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백무결은 건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맹약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건의 기억이 희미해진 건 맹약과정에서 당연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맹약의 흔적이 없다는 건 맹약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맹약을 하지 않았는데 멀쩡히 정신을 차렸다. 이건 조금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맹약을 하지 못했으면 둘 중 하나여야 했다. 그냥 그대로 죽거나 아니면 영혼주에 봉인되어 있던 영혼에게 잡아먹히거나.
하지만 건은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백무결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무결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맹약의 흔적을 얻지 못하긴 했지만 결국 그래도 경계에 발을 처음들인 선택받은 자인 건 여전히 사실이잖아? 그럼 그냥 다른 선택받은 자들과 똑같이 이끌어 주는 역할만 해주면 되겠지.’
대충 결정을 내린 백무결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시겠죠?”
“네…… 그냥 꿈을 꾼 것만 같습니다.”
“확실한 건 꿈은 아니라는 겁니다. 백건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감각이 닿지 못하는 바깥세상…… 흔히 경계라 부르는 세상에 발을 들어놓으셨습니다.”
“경계요?”
“네, 보통의 상식은 전혀 통하지 않는 비상식의 세계이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꿈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제가 왜 그런 곳에 들어오게 된 거죠?”
“왜 들어오신 게 아니라. 원래 들어오시게 되어 있던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건님은 경계에 들어올 운명을 타고난 거죠. 우린 그런 이들을 선택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저 역시 건님과 똑같이 선택받은 자입니다. 그렇게 선택받은 자들은 언젠가는 경계에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릴 때 들어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늙어서 들어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무조건 선택받은 자는 경계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겁니다. 이걸 처음부터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건님은 경계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보통 사람들의 인지를 벗어난 기이한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경계는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곳이죠. 물론 이 현실과 똑같은 공간에 겹쳐져 있긴 하지만 분명 다른 공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건님은 흔히 우리가 영혼(靈魂)이라 부르는 존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여, 영혼이 부르는 소리요?”
“네, 아주 다양한 영혼이 건님에게 말을 걸 겁니다. 하지만 함부로 답해주진 마세요. 영혼들은 건님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나오고 싶어하는데 건님이 함부로 그들에게 몸을 허락하면 건님만 고생하게 될 겁니다. 특히 건님과 같이 이제 갓 경계에 들어온 이들한테는 온갖 잡스러운 귀신들이 들러붙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등급조차 없는 잡귀에게 몸을 내어줬다간 건님의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꼭……영혼의 울림을 마음으로 느꼈을 때만 그 부름에 응답하세요.”
“울림이요?”
“네, 이건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적어도 울림을 일으키는 영혼은 등급이 있는 영혼일 것이니 부름에 응답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근데 부름에 응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간단합니다. 맹약을 하거나 또는 맹약을 하지 않거나.”
“맹약은 또 뭔가요”
“일종의 계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영혼과의 계약. 그 맹약을 통해 건님은 영혼이 지닌 힘을 빌려다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뭔가 굉장히 복잡하네요.”
“어차피 지금은 제가 모두 설명해줘도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일단 두 가지만 주의하세요. 절대 잡귀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말한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는다. 뭐, 사실 두 번째는 하셔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어요. 다만…… 건님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수 있어서 주의하시라고 한 겁니다.”
“네…….”
건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리고 앞으론 조금 위험한 일이 많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뭐, 아직 맹약도 맺지 않은 소울러를 공격할 존재는 기껏해야 동물의 육체를 차지한 수귀(獸鬼)들 정도뿐이지만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고 해도 지금의 건님에겐 위험할 수도 있죠. 어쨌든 뭔가 위험할 거 같으면…… 뛰세요. 열심히 뛰어서 잠시라도 경계에서 벗어나세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겨우 도망치는 거 말고 좀 더 확실한 방법은 없나요?”
건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백무결에게 물었다.
“확실한 건 하루라도 빨리 울림을 느끼고 맹약을 맺는 건데. 이게 뭐 쉬운 건 아닌지라…… 혹시 도저히 견디기 어렵고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찰칵.
백무결은 명함 하나를 꺼내서 건에게 건네주었다.
“무결점 철학관?”
명함에는 크게 무결점 철학관 백무결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저도 현실에선 먹고 살기가 빠듯해서……. 뭐, 나름 유명한 곳이니 혹시 신년운세 같은 거 보실 일 있으면 한 번 오세요. 건님은 특별히 제가 파격 할인가로 해드릴게요.”
“아…… 네…….”
건은 기껏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 철학관 광고로 얘길 끝내는 백무결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건 분명히 명심하세요. 경계에 들어온 이상 건님은 이제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쁜 것만은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이제 천천히 경계란 곳이 어떤 곳이 알아가신다면…… 그곳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란 걸 알게 될 겁니다.”
백무결은 마지막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