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더 소울(The Soul) - 변종(變種)(1)
@ 변종(變種).
남자가 계약한 영혼은 비록 7등급밖에 되지 않는 등급이 높지 않은 영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계의 세상에 널려 있는 잡귀들과는 급이 달랐다.
일단 등급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그 영혼은 명인(名人)급 이상의 영혼이란 것이었고 그건 결국 나름 후세에 이름을 남긴 영혼이란 뜻이었다.
후대에는 발승암기(髮僧菴記)란 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인 김홍연(金弘淵)이 바로 그와 계약한 영혼이었다.
김홍연의 영혼은 그에게 자신이 과거 가졌던 신력(神力)과 검술(劍術)을 빌려주었다.
물론 김홍연의 모든 힘을 사용하려면 그의 영혼을 정식으로 강림(降臨)시켜야 했지만, 강림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자, 아니 흑웅 박철만이 김홍연의 영혼과 맹약을 맺은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지만, 아직 그는 김홍연의 영혼을 완전히 강림시키지 못했다.
억지로 한다면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삼십 분도 유지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보통 강림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최소 한 시간 정도는 유지해주는 게 기본이었기 때문에 박철만과 같은 경우는 그냥 강림이 아닌 통혼(通魂)을 통해 힘을 빌려 쓰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보통 소울러들이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영혼이 가진 기본 능력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통혼이 가장 낮은 등급의 사용 방법이었다.
그리고 영혼을 몸에 강림시켜 영혼이 과거에 가졌던 힘을 100%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강림이었다.
강림은 보통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지간한 소울러들은 아예 시도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강림을 넘어서 영혼의 과거에 가졌던 힘뿐만 아니라 본래 영혼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능을 120% 발휘하게 해주는 방법이 있었으니 이를 승천(昇天)이라 불렀다.
하지만 사실 승천은 거의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소문에는 몇몇 특별한 소울러들이 실제로 사용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걸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소울러들은 이 세 가지 방법 중 가장 기본적이지만 대신 안정적이고 부담이 없는 통혼을 선호했다.
박철만도 당연히 통혼을 통해 김홍연의 영혼이 지닌 힘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왔다.
그러자 순간 그의 몸에 상당한 기운이 퍼져 나가며 과거 김홍연이 지녔던 신력과 유사한 강력한 힘이 솟아났다.
스르릉.
그뿐이 아니었다.
박철만은 통혼을 통해 과거 김홍연이 펼쳤던 검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완벽하게 김홍연의 영혼과 자신의 몸을 연결한 박철만은 곧장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
8층 건물이었기 때문에 높이가 상당했지만, 박철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타타탓!
건물의 외벽을 타고 내려오는 박철만.
이 정도는 어지간한 헌터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하압!”
강한 기합과 함께 그는 등 뒤에 차고 있던 장검(長劍) 한 자루를 뽑았다.
피잉!
금속마찰음이 들리며 자연스럽게 뽑힌 장검은 한눈에 봐도 명검(名劍)처럼 보였다.
소울러들은 각자 맹약을 맺은 영혼이 가진 힘에 따라 그에 맞는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물론 굉장히 상위 클래스의 소울러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무기를 만들어냈지만 그건 천상계라 불리는 곳에 소속된 특별한 소울러들 얘기였고 박철만처럼 평범한 소울러들은 실제 무기를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목숨과 직결될 수 있는 무기였기에 대부분 질이 상당히 좋은 무기를 들고 다녔다.
박철만이 들고 있는 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장(明匠)을 찾아가 만든 비싼 물건이었다.
파팟!
박철만은 그 비싼 검을 휘둘러 한 번에 혈아귀의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혈아귀가 강력한 암귀라고 해도 7등급 영혼과 계약한 소울러이자 정식 프로 헌터인 박철만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격을 막는 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심지어 공격을 당한 혈아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콰르르르르!
갑자기 혈아귀의 발밑이 무너져 내리며 혈아귀가 아래로 떨어졌다.
“커어엉!”
혈아귀도 깜짝 놀랐지만, 더 놀란 건 박철만이었다.
휘이잉!
너무나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혈아귀가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박철만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렇지만 지금은 검이 허공을 가른 게 문제가 아니었다.
콰드드득.
바닥이 무너지며 아래로 떨어진 혈아귀의 몸이 순식간에 마구 꺾이며 바닥에서 치솟은 커다란 검은색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헉!”
박철만은 깜짝 놀라며 옆쪽의 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콰과광!
그의 이러한 빠른 대처 덕분에 커다란 입 모양으로 변하며 치솟은 검은 안개는 박철만 대신 콘크리트벽만 뜯어먹었다.
‘이 괴물은 대체 뭐지?’
박철만은 헌터로 활동한 것만 벌써 칠 년이 다 되어갔다.
그런 오랜 경험을 쌓은 박철만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발밑에 생겨난 검은색 안개로 이루어진 괴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 영압은 대체 뭐지?’
진짜 문제는 이 부분이었다.
처음 보는 괴물이란 사실보다 그 괴물이 지닌 영압이 마치 혼마에서 느껴지는 영압만큼 강력하다는 게 문제였다.
‘혼마인가?’
이 정도 영압이라면 혼마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혼마는 보통 등급이 있는 명인(名人)급 이상의 영혼이 일그러지며 만들어지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괴물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다.
‘일단은 혼마건 암괴건 잡고 봐야겠다.’
노련한 프로 헌터 답게 빠르게 당황스러움을 털어낸 박철만은 벽을 몇 번 더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상대가 혈아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괴물로 바뀐 것뿐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 정도 영압이라면 보상 또한 상당할 거 같으니…… 이번 달을 적자가 아닌 흑자로 끝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박철만은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의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츠츠츠츳!
김홍연의 영혼이 전해주는 혼력(魂力)이 검에 진하게 맺히며 검신을 살짝 붉게 만들었다.
박철만은 혼력을 유형화시켜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경지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최소한 혼력을 무기에 스며들게 하는 경지에는 올라 있었다.
보통 경계에서는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이들을 숙련자(익스퍼트)라고 불렀다.
“하압!”
박철만은 다시 한 번 짧고 강하게 기합을 넣으며 검은색 안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촤아아아!
그에게서 당장에라도 검은색 안개를 찢어버릴 것처럼 매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매서운 기세는 검은 안개를 가르지 못했다.
놀랍게도 검은 안개는 마치 박철만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좌우로 갈아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은 안개가 흩어지자 박철만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네놈에게서 영압이 느껴진다는 건 곧 어떤 식으로도 너에겐 혼정(魂情)이 존재한다는 뜻. 몸은 흩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혼정은 절대 흩을 수 없지!’
박철만은 노련한 헌터답게 한 번에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반짝!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반짝이는 작은 수정.
“찾았다!”
박철만은 검은 안개 괴물의 혼정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보통 혼정은 이렇게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검은 안개 괴물은 몸 자체가 안개라 쉽게 드러난 것 같았다.
혼정이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괴물도 충격을 입는 것이었다.
그 얘긴 곧 검은 안개 괴물이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안다면 어떤 식으로라도 박철만의 공격을 막을 것이란 뜻이었다.
츠츠츠츳!
역시나 흩어졌던 검은 안개들은 빠르게 당시 뭉쳐지며 박철만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박철만은 여기까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혼정을 노린 게 아니었다.
그가 노린 건 혼정을 향한 공격을 막으려고 모여들 이 검은색 안개였다.
“하아압!”
박철만은 검은색 안개가 모이는 걸 확인하곤 곧장 그 안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찌지지직!
보통의 검이었다면 그냥 허공을 갈랐겠지만, 혼력이 맺힌 검은 당연히 검은 안개를 사정없이 갈라버렸다.
박철만의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검은 안개가 형태만 봐서는 물리적인 공격에 면역인 것처럼 보였지만 검에 혼력이 실린 이상 박철만의 공격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이라 할 수 없었다.
‘베었다.’
당연히 박철만은 검은색 괴물에게 충격을 입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철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
박철만의 검에 잘린 검은색 안개가 두 개로 분열되며 조금 전 자신이 잡아먹은 혈아귀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했다.
‘분열에 이은 복제? 이 괴물은 도대체 뭐지?’
박철만이 알고 있기엔 암괴 중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 얘긴 눈앞에 있는 괴물이 지금까지 알려진 괴물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괴물이란 뜻이었다.
타타탓!
뭐가 됐건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괴물은 혼마만큼이나 까다로운 상대란 점이었다.
‘좋아, 이제부턴 네놈이 혼마라고 생각하고 상대해주마!’
박철만은 들고 있던 검을 고쳐 잡으며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상대가 혼마라면 여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츠츠츠츳!
박철만은 혼력을 검뿐만 아니라 전신(全身)에 충만하게 채우며 김홍연의 독문검법이었던 천웅검법(天熊劍法)을 극성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천웅검법은 한 방, 한 방이 파괴력이 큰 중검(重劍)이었기 때문에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대신 적을 찍어누르는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쩌저저정!
하지만 검은 안개는 또 한 번 박철만을 놀라게 했다.
둘로 나뉘어 혈아귀의 모습으로 바뀐 그 괴물은 놀랍게도 박철만의 천웅검법을 맨손으로 막아냈다.
‘단순히 혈아귀를 복제한 게 아니란 건가?’
공격이 막혔지만, 박철만은 당황하지 않고 계속 천웅검법을 펼쳐다.
파파팟.
천웅검법은 펼치면 펼칠수록 위력이 증가하는 전형적인 중검술이었기 때문에 박철만은 결국 혈아귀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쩌저정, 쩌저정!
하지만 두 마리의 혈아귀, 아니 혈아귀로 변한 검은색 안개 괴물들은 번갈아가며 계속 천웅검을 막았다.
‘이 녀석…… 점점 더 방어하는 요령이 늘어가고 있잖아?’
계속 두 마리의 괴물을 향해 천웅검을 펼치며 놈들을 몰아치던 박철만은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함을 느꼈다.
검은색 안개 괴물은 그와 싸우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하다.’
경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었다.
그런 면에서 박철만은 그런 본능이 꽤 발달한 인물이었다.
사실 혼마를 사냥하는 프로 헌터라면 그런 본능 정도는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박철만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며 몸을 뺄 준비를 했다.
프로 헌터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십계명 중 가장 윗줄에 있는 계명이 바로 ‘절대 무리하지 마라.’ 였다.
‘무리해서 이 녀석을 잡는 것보단 차라리 헌터 협회에 이 녀석에 대해 보고를 하고 포상금을 받는 게 나을지 모른다.’
빠르게 견적을 낸 박철만은 몸을 빼기로 결정 내렸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순간 곧장 공격을 멈추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두 마리의 혈아귀로 변했던 검은색 안개 괴물은 또 한 번 변화했다.
끄르르르륵.
두 마리의 혈아귀가 하나로 뭉쳐지며 덩치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형태를 갖추었다.
스르르륵.
변화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연히 뒤로 물러난 박철만은 그 변화를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크흠!”
변화를 지켜보던 박철만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니 완벽히 까맣게 물든 눈을 제외하곤 모든 모습이 자신과 똑같은 괴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황당한 건 그 괴물에게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혼력과 똑같은 느낌의 혼력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혼력은 소울러에겐 지문과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모든 소울러는 서로 다른 혼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혼력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서 느껴진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런 개 같은…….”
박철만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모습을 복제하는 건 경계의 세상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혼력은 달랐다.
혼력은 절대 복제가 불가능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괴물은 그걸 해냈다.
이건…… 눈앞의 괴물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란 뜻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오지게 걸린 거 같네.’
박철만은 몸을 빼내 도망치려고 했지만 지금 상황을 봐서는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프로 헌터 흑웅 박철만.
그는 이를 꽉 물며 다시 한 번 검을 고쳐 잡았다.
이게 진짜 자신의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비굴하게 도망치다 죽고 싶진 않았다.
“젠장……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박철만.
물론 프로 헌터는 굉장히 위험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언젠간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나니 아쉬운 게 너무 많았다.
아무리 특별한 힘을 지닌 소울러들이라고 해도 결국 기본은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유한(有限)함을 아쉬워하며 무한(無限)함을 꿈꾸는 어리석은 존재였기에 늘 마지막 순간엔 모든 걸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