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더 소울(The Soul) - 성장(1)
@ 성장.
헌터 협회의 소집령이 거두어지고 연희와 철민이 돌아온 이후의 생활은 퇴근을 조금 더 일찍 해 재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건은 정말로 대학에 입학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을 보며 철민은 공부할 시간에 수련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얘기했고 연희는 목표를 이루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꼭 대학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주었다.
두 사람 모두 건의 대학 진한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건이 공부하는 걸 방해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편의를 봐주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얘기한 건 두 사람 모두 건이 결국은 경계에 소속되어 있는 소울러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는 유용하게 쓰일지 모르는 대학교 졸업증이었지만 경계의 세상에선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종이 한 장일 뿐이었다.
경계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이 가진 실력뿐이었다.
역외인의 삶을 살 게 아니라면 굳이 대학 진학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건 역시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얘길 해준 건지 잘 알았기 때문에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다.
대신 건은 그들에게 간단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소울러가 되었다고 해서 저란 인간이 전혀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계에 들어오기 전의 저도 저이고 경계에 들어온 후의 저도 접니다. 그러니…… 전 계속 이대로 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역외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만 경계와 상관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는 뜻일 뿐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건도 몰랐다.
건은 오히려 변수가 생긴다면 그 변수에 맞춰 삶을 변화시킬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변수가 없다면 그냥 계속 살아가던 대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 * * *
움찔.
너무나도 미약하고 작은 움직임.
하지만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던 건은 그 미약하고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느껴진다!’
언제나처럼 고시원 옥상에서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혼력을 살피던 건은 드디어 뭔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몸속을 관조하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자, 어디로 움직일까?’
건은 끊임없이 혼력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혼력은 아주 희미한 의지로 그 물음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건은 미약하게 느껴지는 혼력의 의지에 따라 아주 천천히 그것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진짜 너무나 미미했다.
혼력은 그저 손톱만큼만 옆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건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한 계단을 올랐다. 이제부턴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시작이 반이란 얘기가 있었다.
그 얘기처럼 건의 자신만의 영혼단련법 만들기도 이제 가장 중요한 벽 하나를 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혼력의 의지를 읽기 시작한 이상…… 건은 어떤 식으로라도 영혼단련법을 완성 시킬 생각이었다.
수레바퀴는 한 번 구르기 시작하면 스스로 탄력을 받아 좀 더 수월하게 굴러간다.
건의 몸속에 있는 혼력도 이러한 수레바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최초 혼력을 움직였던 날로부터 며칠 동안은 혼력을 겨우 원래 있던 자리에서 반 뼘도 되지 않는 곳까지 이동시키는 게 전부였지만 그 뒤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혼력은 더 빨리 움직여주었다.
특히 건은 혼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것을 움직였기 때문에 혼력의 움직임이 빨라졌다는 뜻은 그만큼 혼력이 확실하게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슴 언저리에서 시작되었던 움직임은 양어깨를 훑고 지나가 양팔 모두를 돈 후 다시 척추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곤 골반 부근에서 크게 한 바퀴 돈 후 다시 양다리를 번갈아가며 순환했다.
그 뒤엔 다시 한 번 더 척추를 타고 올라와 흔히 뇌간(腦幹)이라 말하는 척추와 대뇌가 연결되는 부근에서 멈춰 섰다.
그리곤 거기서부터는 계속 최초의 움직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혼력이 뭉쳐 있는 장소가 심장 언저리에서 뇌간으로 바뀌었지만, 건은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혼력은 소울러들마다 제각각 뭉쳐놓는 장소가 달랐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혼력을 모아놓은 곳은 소울러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소울러들은 모두 남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모아놓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건은 드디어 자신만의 영혼단련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효과가 어떻건 간에 계속해서 무리 없이 혼력이 온몸을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스르륵.
건은 두 시간 동안 혼력을 몸 전체에 열 바퀴나 돌리고 나서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분명히 조금이지만 혼력이 커졌어. 드디어 영혼단련법 완성했다!’
처음 도전을 시작한 이후로 석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건은 드디어 영혼단련법을 완성했다.
‘대단한 영혼단련법이 아닐지는 몰라도…… 내가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네.’
건은 자신이 만든 영혼단련법이 어느 정도 수준의 영혼단련법인지 몰랐다.
다만…… 그저 자신의 손으로 그 귀한 영혼단련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재미있는 건 엄밀히 말해서 건이 만든 영혼단련법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는 그런 영혼단련법은 아니었다.
굳이 수준을 얘기하자면 중급 영혼단련법 정도의 효율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즉, 혼력을 빠르게 증가시키는 능력만 봐서는 중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건의 영혼단련법의 특징은 혼력을 키워주는 효율에 있지 않았다.
그 영혼단련법은 혼력의 의지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경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영혼단련법보다 안정적이었다.
안정적이란 얘기는 그만큼 혼력의 기반이 튼튼하다는 얘기였다.
혼력은 그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상당히 불안정한 기운이었다.
애초에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영혼의 힘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것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불안정한 혼력을 안정시키는 수단은 오로지 영혼단련법밖에 없었다.
영혼단련법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혼력을 정착시키는 게 혼력을 안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만약 혼력을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혼력을 지니고 있어도 오히려 혼력이 폭주해 몸을 크게 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영혼단련법들은 혼력을 키워주는 효율만큼이나 안정성도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런 의미에서 건이 만든 영혼단련법은 적어도 안정성 부분에서만큼은 최상급 영혼단련법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물론 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기 자신이 직접 만든 영혼단련법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영혼단련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조각수련도 할 수 있겠는걸? 물론 그 비싼 조각을 돈 주고 살 순 없으니 나 스스로 영혼의 조각을 구하기 전까진 그림의 떡일 뿐이겠지.’
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기운이 충만한 느낌이네.”
영혼단련법으로 혼력을 전신에 순환시켜서일까?
건은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이 났다.
“진짜 그냥 혼을 자극해서 수련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네.”
건은 작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야 왜 소울러들이 그렇게 영혼단련법을 얻으려고 노력하는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진짜 소울러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게 했군. 이제 남은 건 등급이 있는 영혼과 맹약을 맺는 것뿐인가?’
경계에서 활동하는 소울러라고 해서 다 같은 소울러는 아니었다.
진정한 소울러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영혼단련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등급이 있는 영혼과 맹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는 소울러는 이름만 소울러였지 사실 진짜 소울러로 인정받질 못했다.
‘진짜 소울러가 된다면…… 앞으로 내가 경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도 대충 결정할 수 있겠지.’
건은 현실과 다르게 경계에서는 아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경계란 세상에 들어온 지 오 개월밖에 흐르지 않았고 들어올 때도 자의(自意)로 들어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은 이 신비롭고 이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나마 카페 헤븐에서 일을 하며 경계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게 된 후 대충이나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수능을 보기 전에 영혼단련법을 완성해서 다행이네.”
수능까진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아 있었다.
건은 하루빨리 영혼단련법을 완성하고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공부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했었다.
벼락치기로 하는 공부가 그리 좋은 건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건은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히 수능을 딱 한 달 남기고 드디어 영혼단련법을 완성했다.
덕분에 건은 뭔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한 달 정도는 시간이 틈틈이 영혼단련법을 수련하면서 남는 시간은 모두 공부에 집중해 보자.’
건은 예전에 방송에 나온 약간 밥맛없는 수능만점자처럼 공부가 제일 쉬운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주 지루하진 않았었다.
머리도 나쁘지 않아 이해력도 뛰어난 편이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맛도 제법 있었다.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다시 한 번 다짐을 한 건은 동이 트려고 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한 달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한 건은 미련없이 수능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가족 또는 친구나 후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들어가는 다른 수험생들과 달리 오로지 혼자 조용히 시험장에 들어간 건은 후회 없이 시험을 치르고 나왔다.
시험을 끝낸 건은 늦게나마 카페 헤븐에 출근했다.
그나마 요즘 건이 가장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카페 헤븐이었다.
“응? 오늘은 그냥 쉬라니까 왜 나왔어.”
마감 청소를 하던 연희는 건을 보며 얘기했다.
“집에 들어가다가 잠깐 들렸어요. 근데 오늘은 일찍 마감하네요?”
“아, 내가 일이 좀 있어서 일찍 마감하려고.”
연희는 카페 헤븐의 일개 직원일 뿐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권한은 거의 사장과 같았다.
“사냥이라도 가는 거예요?”
“아니, 장비들을 좀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 같아서 ‘경계의 틈’ 좀 가려고.”
“전에 말씀하셨던 그곳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