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더 소울(The Soul) - 백(魄) [1]
@ 백(魄).
언제였더라?
정확히 내가 언제부터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한 사백 년 전부터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 내가 나를 인지했을 땐 난 그저 약간의 영기(靈氣) 품은 동물일 뿐이었다.
달빛에서 흘러나온 아주 미약한 영기를 받아들여 영수가 된 난 나 자신에게 ‘백(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난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영기를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누가 설명해준 것도 아니었는데 난 내 몸속에 있는 영기를 키우면 훗날 그 영기를 통해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와 같은 영수(靈獸)들은 모두 똑같은 목표가 있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백호(白虎)와 청룡(靑龍), 주작(朱雀)과 같은 하나의 완벽한 신수(神獸)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신수들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영수들은 꽤 많았다.
다만 그 영수 중 대부분이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소멸하거나 성장이 멈췄지만 그래도 난 신수가 되는 걸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난 꾸준히 영기를 모으며 신수가 되기 위한 여러 노력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를 잡아먹으려는 수많은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물론이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몇 번이고 탈각(脫殼)을 했다.
다섯 번이었나?
탈각을 다섯 번 정도 하고 나니 이제 신수가 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십 년만 더 고생하면 될 것 같았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생을 했지만, 신수만 될 수 있다면 그 고생을 다시 한 번 더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신수를 향한 내 의지는 크고 강렬했었다.
그런데…….
이 년 전…… 이 모든 게 완전히 어그러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작은 변화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난 그저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영기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던 그 이상한 기운이 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몸속으로 그 이상한 기운이 마구 밀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한 기운은 내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난 어쩌면 그 이상한 기운을 이용해서 생각보다 더 빨리 신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건 내 삶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되었다.
이상한 기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놀랍게도 그 기운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끈질기게 모아놓았던 영기마저 집어삼켰다.
그때 난 엄청나게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그저 그 기운이 내 몸속의 영기를 집어삼키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만한 이가 있을까?
난 정말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버텨온 세월이 아까웠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신수가 되고 싶었다.
난 내가 노력을 하면 다시 이상한 기운을 몰아내고 내가 쌓았던 영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텼다.
하지만 이 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내 몸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상한 기운이 쌓였다.
이제는 이 이상한 기운 때문에 내 몸이 내가 원하지 않은 이상한 방향으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난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그 이상한 기운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그 기운은 계속해서 더 많이 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내 몸의 변화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강제로 막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뭔가 다른 수를 내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녀석을 발견했다.
차라리 이렇게 괴물이 되느니 그 녀석에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기운은 이미 내 몸을 넘어서 내 정신까지 침범한 상태였다.
시간이 없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 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했다.
그래서 난 결정했다.
차라리 그냥 죽는 걸로…….
* * * *
“크어어엉!”
대마수, 아니 백은 앞뒤 안 가리고 일단 건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적은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 머리로는 죽으려고 했는데 자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죽고 싶어서 뛰어들었지만, 몸은 어느새 건을 매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헛!”
백의 기습 때문에 깜짝 놀란 건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꽈광!
백은 건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며 바닥에 내려왔다.
백의 덩치는 건보다 더 컸다.
‘개? 호랑이? 그냥 네 발 달린 검은 괴수가 맞겠군.’
옆으로 몸을 피한 건은 백을 바라보며 잠시 놈의 생김새를 관찰했다.
“크르르르.”
그런데 정작 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머리와 일단 건을 잡아먹고 보려는 몸이 자꾸 충돌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건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크륵, 크륵.”
백은 고개를 이상하게 흔들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백의 상태는 정말 이상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일단 죽고 싶어하는 백의 머리는 몸의 통제권을 거의 상실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10% 정도의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일 때마다 움직임을 방해하며 자꾸 죽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백의 몸은 이미 이상한 기운,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너스 에너지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대마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건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사실 영수가 마이너스 에너지에 잡아먹혀 대마수가 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수가 마이너스 에너지에 대항하며 이렇게 버티는 건 더 희귀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뒤져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덕분에 백은 대마수도 그렇다고 영수도 아닌 이상한 상태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백이라고 해도 결국 마이너스 에너지에 정신마저 완전히 잡아먹히며 완벽한 대마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백은 그걸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쟤 왜 저래?’
건은 백의 이상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건은 지금이 반격하기에 딱 좋은 순간이란 걸 놓치지 않았다.
츠츠츳.
건은 통혼을 통해 척준경의 혼력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건의 몸속으로 강렬한 패기를 담고 있는 혼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혼력은 건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는 건.
통혼을 했을 뿐인데 그의 눈빛은 조금 전과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척준경의 지닌 다섯 가지 힘 중 하나인 전투본능이 발휘되면서 건의 감각은 극도로 발달하였고 근력과 정신력도 대폭 상승하였다.
이게 바로 척준경의 혼력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힘이었다.
통혼을 통해 전투 준비를 끝낸 건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는 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아아!
본래 척준경은 병기를 들지 않아도 강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맨손보다는 뭔가 병기를 드는 게 더 강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건은 지금 이 순간엔 가지고 있는 병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쓸만한 병기는 만물상에서 연희가 사줬던 단검이었지만 학교에 오면서 그 단검을 들고올 순 없었기에 지금은 맨손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건은 맨손으로 백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건은 그런 걸 크게 개의친 않았다.
특히 지금의 건은 척준경의 혼력 덕분에 겁이란 걸 모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절대 움츠러들 이유가 없었다.
꽈앙!
아쉽게도 건이 힘차게 휘두른 주먹은 허공을 가른 후 바닥에 꽂혔다.
제법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백은 아주 손쉽게 그 공격을 피했다.
물론 이번에도 백의 머리는 공격을 맞아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몸이 더 강력한 통제권을 바탕으로 곧장 건의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크르르르.”
백은 건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며 마이너스 에너지를 잔뜩 내뿜었다.
사실 백의 몸도 지금 상황이 짜증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백의 정신을 완전히 잡아먹고 완벽한 대마수가 되어야 했는데 자꾸 백의 정신이 그걸 억지로 막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건까지 자꾸 귀찮게 하니 더욱 짜증이 났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일단 건부터 잡아먹고 그러고 나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백의 정신을 잡아먹기로 했다.
드드드득!
그렇게 마음을 먹은 백은 곧장 자신의 몸을 변형시켰다.
지금까지는 그냥 커다란 네발 달린 검은색 그림자 같은 괴물이었던 백의 머리와 네 다리에서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돌기가 솟아올랐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돌기였다.
“젠장…… 난 무기도 없는데…….”
건은 백의 변화를 보며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백은 곧장 건을 행해 달려들었다.
건도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백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백은 건보다 더 빨리 움직이며 건을 놓아주지 않았다.
파파팟!
백의 움직임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특히 놈의 머리와 네 다리에 솟아오른 날카로운 돌기는 건의 몸 여기저기를 스치고 지나가며 선명한 혈선(血腺)을 만들었다.
건은 척준경의 전투본능으로 인해 극도로 발달한 감각을 이용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백의 공격을 피했다.
덕분에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은 전부 아주 가벼운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육체적인 능력만 놓고 보면 건이 백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게 맞았기 때문에 건은 어쩔 수 없이 이 정도의 상처는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빠르다.’
건은 왜 연희가 대마수를 그렇게 조심하라고 얘기 한지 몸으로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이미 건의 전신에는 상당히 많은 혈선이 만들어졌고 그 혈선에서 흘러나온 피는 건을 혈인(血人)으로 만들었다.
물론 이 상처들은 그저 피부가 살짝 베어진 것일 뿐이었기 때문에 건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면 결국 출혈 때문에 2차 충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뭐가 됐건 빨리 백의 공격에서 벗어나 혼력을 이용해 지혈(止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에서 벗어나는 건 고사하고 점점 더 날카롭게 파고드는 공격들을 견뎌내는 것도 힘에 벅찰 지경이었다.
‘미치겠군.’
이미 건은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최대치의 혼력을 통혼을 통해 끌어온 상태였다.
아직 건은 척준경이 지닌 힘의 10% 정도밖에 끌어오질 못했기 때문에 겨우 척준경이 지닌 다섯 가지 특별한 힘 중 ‘전투본능’만 사용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전투본능만으로는 백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크아아앙!”
백은 이제 정말 끝을 내겠다는 듯이 강하게 울부짖으며 건을 향해 양발을 빠르고 강하게 휘둘렀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
건은 직감적으로 이번 공격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선택했다.
화르르륵.
건의 오른손에 화염이 맺혔다.
‘어차피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정면으로 맞선다!’
건의 선택은 맞불 공격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이게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물론 결과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건은 척준경의 혼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마수보다 약했다.
그렇기에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분명 크게 충격을 입는 것은 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건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건을 향해 양발을 휘두른 백.
그리고 그 공격에 맞서 오행발현술을 최대한 발휘해 오른 주먹에 화염을 만들어낸 후 있는 힘껏 오른 주먹을 내뻗은 건.
결과가 뻔하다고 해도 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투지(鬪志)는 의외의 변수와 합쳐지며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만들었다.
건도 그리고 백도 생각지도 못한 변수.
그것은 바로 백의 몸이 잠깐 잊고 있던 백의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