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더 소울(The Soul) - 백(魄) [2]
백의 정신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약한 통제권을 사용했다.
백의 정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서만큼은 그게 아주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멈칫!
순간 건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던 백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물론 그 멈춤이 길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1~2초?
아주 짧게 멈칫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짧은 멈춤은 오히려 상황을 역전 시켰다.
원래는 건이 백의 공격을 받아내는 형국이 되어야 할 것이 반대로 백이 건의 공격을 받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이 차이는 정말 컸다.
한 마디로 건의 공격은 완벽하게 완성되어 백에게 꽂히는 것이었고 반대로 백의 공격은 중간에 끊기는 느낌으로 건에게 꽂히는 것이었다.
본래 백의 공격이 완벽하게 완성되고 건의 공격이 중간에 끊기는 느낌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게 완벽하게 뒤바뀐 것이었다.
꽈광, 우드득!
퍼퍼퍼퍽! 콰득!
건의 오른 주먹이 먼저 백의 턱아래에 꽂혔다.
그리고 그에 이어 백의 양발이 건의 가슴을 때렸다.
백과 건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동시에 뒤로 튕겨져나갔다.
주르르륵, 콰과과광!
똑같이 튕겨져나갔지만 입은 충격은 건보다 백 쪽이 더 컸다.
‘크으…… 갈비뼈가 서너대는 부러졌겠네.’
건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큰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재빨리 혼력을 이용해 응급조치했다.
혼력은 몸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혼력을 이용하면 지혈을 하거나 상처가 커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소울러들이 지닌 혼력마다 천차만별의 효율을 자랑했지만, 척준경의 혼력은 최소한의 치유력을 지니고 있었다.
온몸에 난 상처들을 지혈하고 부러진 갈비뼈를 혼력으로 대충 고정한 건은 자신이 날려버린 대마수, 아니 백 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번 충돌에서 더 큰 충격을 입은 건 백이었다.
백은 건에 온 힘을 다해 쳐올린 오른손 어퍼컷 한 방에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마이너스 에너지가 똘똘 뭉쳐져 만들어진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그 뼈대가 되는 몸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건의 화염 어퍼컷은 마이너스 에너지를 뚫고 그 뼈대가 되는 몸체에 충격을 입힌 상태였다.
“크륵, 크르르.”
백은 머리를 마구 흔들며 그 충격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제대로 먹힌 건가? 근데 그 순간 왜 멈칫거린 거지?’
건은 자신의 공격이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멈칫거림.
그것이 서로의 입장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었다.
‘뭐, 덕분에 난 이득을 봤지만…… 근데 이거 그냥 이대로 도망치는 게 맞으려나?’
건은 아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척준경의 전투본능은 무작정 적을 향해 달려드는 대책 없는 용기(勇氣)만 부여하지 않았다.
척준경이 대무신이라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는 전투 중에 수없이 이루어지는 냉철한 판단이었다.
당연히 척준경의 혼력을 받아 전투본능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얻은 건도 이러한 냉철한 판단력을 이어받았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에서 마구잡이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지 않고 일단 정확한 상황판단을 먼저 선택했다.
‘대마수는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한데…… 일단은 도망치기도 쉽진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인가?’
한 번에 깔끔하게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도망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백이 지금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건은 백보다 몇 배는 더 느렸다.
그 얘긴 건이 경계와 현실을 나누는 경계선을 찾아 도망치더라도 백이 금방 건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설프게 도주를 선택했다간 오히려 뒤를 잡힌다. 차라리 저 녀석의 상태가 이상한 지금이 기회일지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판단에 필요한 정보도 한없이 부족했지만 결국 건은 결정을 내렸다.
도주보단 정면 승부.
지금은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통혼을 최대수치로!’
결정을 내린 건은 곧장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통혼이었지만 건은 최대한 통혼의 출력을 올렸다.
그러자 건의 몸으로 조금 더 많은 양의 혼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소 무리가 될 수도 있는 통혼이었지만 건은 어차피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있는 힘껏 혼력을 끌어당겼다.
츠츠츳!
원래 건은 대략 척준경의 지닌 혼력의 10% 정도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크게 무리를 하며 한 번에 끌어당기자 대략 15%의 혼력이 건의 몸으로 끌려왔다.
물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한계 시간은 아무리 길게 쳐줘도 삼십 분이었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한다!’
지금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잘 아는 건이었기 때문에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어쨌든 척준경의 혼력을 15%까지 끌어당겨서 사용하게 되자 건은 지금까지와 달리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힘 다섯 가지 중 네 번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번째 힘이었던 전투본능과는 또 다른 네 번째 힘.
그것은 바로 무쌍투기(無雙鬪氣)였다.
건은 이 힘을 불과 보름 전에 간신히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당연히 모든 게 불완전한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걸 꺼내 든 것이었다.
전투본능이 전투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일종의 패시브 능력이었다면 무쌍투기는 순간적으로 모든 대상을 강화시키는 액티브 능력이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무쌍투기를 팔에 주입하면 팔의 근력이 무지막지하게 상승하면서 동시에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건 물론이고 거기에 무쌍투기 고유의 오러까지 맺혀져 그 자체로 굉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무쌍투기는 신체 어느 부위에도 주입할 수 있었고 어디에 주입되느냐에 따라 효과가 조금씩 달라졌다.
또한, 효율은 조금 떨어졌지만,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물에도 주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무쌍투기의 완성은 그 투기를 전신(全身)에 두르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되려면 척준경의 모든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물론이고 통혼은 물론이고 강림과 승천까지 모두 통달해야 가능한 일인지라 아직 건에게는 멀고 머나먼 일이었다.
어쨌든 건은 짧은 시간일지라도 이런 무쌍투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지금은 겨우 주먹 하나에 맺히게 하는 게 전부인가?’
건이 사용할 수 있는 무쌍투기의 양은 아주 적었다.
한쪽 팔도 아닌 주먹 하나 정도만 강화할 수 있는 적은 양의 무쌍투기.
하지만 건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츠츠츳.
건은 무쌍투기를 오른 주먹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오른 주먹이 변화했다. 뼈대와 근육, 그리고 피부는 모두 강철보다 더 단단해졌고 푸른색의 오러가 주먹에 맺혔다.
그 밖에도 몇 가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변화가 있었다.
무쌍투기로 강화된 건의 오른 주먹.
건은 이걸 ‘철권(鐵拳)’이라고 불렀다.
파팟!
철권을 완성한 건은 곧장 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은 여전히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건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빠르고 간결하게 백을 향해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하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백이 뜻밖에 건의 공격에는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파파팟!
가벼운 몸놀림으로 건의 공격을 피하는 백.
아무리 백의 머리와 몸이 서로 통제권을 두고 싸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통제권을 가진 쪽은 몸이었다.
그렇기에 위험에 반응하는 속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역시 빠르군.’
자신보다 훨씬 빠른 백의 움직임을 보며 건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백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건은 백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백이 건의 공격을 피한 건 맞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원래는 공격을 피하고 그 뒤에 반격 같은 다른 무언가로 이어져야 위협적이었다.
백이 진짜 대마수였다면 이게 당연히 이루어지면서 건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백의 정신이 거의 발악을 하며 계속 통제권을 쥐고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건은 아주 편하게 자신이 공격을 주도할 수 있었다.
타타탓!
건은 다시 한 번 빠르게 움직이며 백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쏟아냈다.
백은 이번에도 계속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크아아아앙!”
이런 공격과 방어가 몇 번 반복되자 백은 아주 짜증스러운 외침을 쏟아냈다.
몸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건까지 계속 자신을 위협하지 짜증이 폭발한 것이었다.
백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는 아주 지독한 부정의 힘이었다.
이 힘은 스스로 뚜렷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짜증이 폭발하자 오히려 마이너스 에너지는 더욱 강하게 요동치며 오히려 백의 덩치가 마구 커지기 시작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짜증과 함께 부정의 기운이 증폭된 느낌이었다.
‘이건 또 뭐야?’
건은 순간적으로 백의 기운이 갑자기 커지자 급격히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그의 예상범위 밖의 일이었다.
마이너스 에너지가 증폭되자 그동안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백의 정신이 급격히 힘을 못 쓰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잡아먹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나름 선방하며 열심히 버텼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되어 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건이 가진 전투본능은 건에게 맹렬하게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건은 위험을 느낀 그 순간 망설이지 않고 승부수를 던졌다.
상대가 갑자기 변화하고 있는 이 순간.
건은 이 순간을 오히려 기회로 바꿀 생각이었다.
파파팟!
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백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침 백은 마이너스 에너지가 요동치며 검은색 오러가 증폭되며 사방으로 마구 뻗어 나가고 있던 순간이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건은 어렵지 않게 백의 등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백의 몸 전체에선 강력한 마이너스 에너지가 마구 요동치고 있었지만, 건은 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키이잉!
그러자 그의 오른손가락에서 20cm 정도의 날카로운 푸른색 기운이 뻗어나 왔다.
이게 무쌍투기 오른손에 집중되며 만들어진, 겉으로 보이지 않는 변화 중 하나였다.
이 다섯 줄기의 푸른색 기운은 매우 날카로웠다.
건은 그걸 알기에 힘차게 오른손을 백의 등에 박아넣었다.
푸우욱!
마치 길고 날카로운 다섯 개의 갈고리처럼 생긴 건의 다섯 손가락이 백의 등에 깊숙이 파고들며 건은 흔들리던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키아아아아아아!”
건이 자신의 등에 오른손을 꽂아넣자 몸을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건을 등에서 떨어트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은 오른손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텼다.
여기서 떨어지면 무조건 건은 백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면 끝이다.’
건은 간신히 잡은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콰앙, 콰과광!
그 사이 백는 정말 지랄발광을 하듯 미친 듯이 날뛰며 건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백이 발광을 해도 건은 놈의 등에 바짝 붙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냥 붙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츠츠츠.
건은 오른손을 이용해 완벽하게 백의 등에 매달린 후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백의 몸속에 자신의 혼력을 꽂아넣었다.
종합격투기로 따지면 백마운트 자세에서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주먹을 꽂아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다리만 네 개가 있는 백에겐 등 뒤의 포지션을 내준 게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건도 이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건은 끈질겼다.
비록 건이 지닌 가장 강력한 공격력은 오른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왼손으론 백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주기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들겼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건은 끊임없이 두들기면 결국 백도 데미지를 입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무리 백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계속 건의 혼력이 몸속으로 파고들자 점점 데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백도 뭔가 수를 내야 했다.
백은 이대로 그냥 건을 놔뒀다간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했다.
이미 십 분이 넘게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건은 여전히 등에 딱 붙어 있었다.
그 얘긴 이런 방식으로는 건을 떨쳐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건이 승부를 했듯이 백도 승부를 걸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앙!”
백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녀석의 본질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야수(野獸)와 비슷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곧장 승부를 걸었다.
촤아아아아!
백의 승부수는 마이너스 에너지 그 자체였다.
백은 몸 전체를 휘감고 있던 거대한 마이너스 에너지를 활짝 개방했다.
그렇게 되자 백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건은 그 마이너스 에너지 안쪽으로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허억!”
순간 건은 깜짝 놀라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마이너스 에너지는 끈적한 아교처럼 건의 몸에 달라붙은 후 건을 백의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젠장!’
몸 대부분이 백의 검은색 그림자와 같은 몸체 안으로 빨려 들어간 건은 이를 꽉 물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이 와중에도 건은 냉철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과연 척준경의 전투본능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평정심과는 상관없이 건의 몸은 이제 완전히 백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마이너스 에너지를 총동원해 건을 집어삼킨 백.
하지만 아직 승부가 결정된 건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