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더 소울(The Soul) - 흑룡(黑龍)과 백(魄) [2]
“……넌 뭐냐?”
건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돼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돼지는 아주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대답했다.
“은인(恩人)께 인사드립니다. 전 백(魄)이라고 합니다.”
“돼, 돼지가 말을 하네.”
순간 건은 깜짝 놀라며 백을 바라보았다.
그 흰 돼지가 바로 마이너스 에너지에게 몸을 빼앗기고 대마수가 될뻔한 그 영수였다.
“흠흠, 전 돼지가 아니라 백입니다. 한때 돼지라는 동물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 얘기죠. 전 달빛의 영기를 받아 영수로 다시 태어난 백입니다.”
돼지는 다시 한 번 명확한 발음으로 건에게 얘기했다.
백은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건이 보기엔 그냥 말하는 작은 새끼 흰 돼지일 뿐이었다.
건은 백이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꼬마 돼지 베이브라는 영화에 나온 그 꼬마 돼지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흐음, 그렇다고 치고……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건은 마이너스 에너지를 흡수하고 다시 그것을 되돌려받는 과정이 워낙 정신없었기 때문에 정작 마이너스 에너지가 모두 사라지면서 백이 영수의 몸을 되찾은 걸 모르고 있었다.
“제가 방금 은인을 공격한 그 검은 괴물의 본체입니다. 물론 그땐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괴물이 되어 있을 때였지만…… 은인의 도움으로 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아…… 그러니까 넌 마이너스 에너지에게 네 몸을 빼앗겼던 것이구나.”
건은 백의 얘길 듣자마자 백이 어떤 상황이었었는지 쉽게 이해했다.
아무래도 그 역시 마이너스 에너지에게 먹혀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정말 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전 꼼짝없이 괴물이 되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백은 작은 머리를 몇 번이고 바닥으로 내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근데 영수(靈獸)라는 건 뭐지? 수마(獸魔)와는 다른 건가?”
“수마와 비교하시면 섭섭하죠. 영수는 수마와 근본 자체가 다른 존재입니다. 수마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마기(魔氣)를 흡수해 태어난 존재라면 영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성스러운 기운을 흡수해 태어난 존재죠.”
“그래? 그럼 영수도 경계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아뇨, 영수는 현실과 경계를 오고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요즘엔 현실에서 저희를 볼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죠.”
“그게 무슨 말이야?”
“간단합니다. 저희는 저희를 믿는 이들의 눈에만 보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이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저희를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저희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 되었죠.”
“신기하네. 그럼 나도 현실로 나가면 널 못 보는 거야?”
“볼 수 있습니다. 경계란 곳 자체가 현실과 또 다른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경계를 알고 있는 이들은 저희를 볼 수 있습니다.”
“대충 어떤 존재인지 이해가 되네. 근데…… 영수는 원래 다 너처럼 생겼어? 내가 상상하던 영수와는 좀 거리가 있네.”
건은 백을 슬쩍 둘러보면서 물었다.
건이 보기에 백은 그냥 말하는 아기 돼지일 뿐이었다.
“크흠, 그런 건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 망할 놈에게 영기를 다 빼앗겨서 이렇게 된 거고 원래는 은인님이 상상하시는 그런 동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너도 영기를 모으면 모습이 바뀌는 거야?”
“하하하하, 전 영기를 잃었을 뿐 영기를 담는 그릇은 여전히 예전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영기만 잘 모으면 예전 모습을 되찾는 건 일도 아닙니다.”
백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실제로 그는 현재 마치 아기 돼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가지고 있던 영기가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은 여전히 영기가 쌓여 있던 공간만큼은 예전 그대로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그 얘긴 그 넓은 공간에 영기만 차곡차곡 잘 쌓으면 다시 예전의 힘을 회복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영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쌓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간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영기를 쌓아야 하는 것보단 더 쉬웠다.
특히 사람들이 한 번 갔던 길을 다시 가게 되면 더욱 쉽게 가는 것처럼 백도 한 번 모아본 영기였기 때문에 다른 영수들보단 훨씬 더 빠르게 영기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고생해라.”
건은 대충 백의 얘길 모두 듣고 일단 경계를 나가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건의 발걸음을 잡는 이가 있었다.
바로 백이었다.
“자, 잠깐만요. 은인님! 이대로 그냥 가시지 말고 제 말 좀 잠깐 들어주세요.”
다급한 표정을 지은 백은 재빨리 건의 앞을 가로막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응?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는 아니고…… 정말 죄송한데…… 혹시 은인께 잠시 동만이라도 신세를 질 순 없을까요?”
백은 우물쭈물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신세를 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지금 제 상황이 좀 많이 안 좋습니다. 원래 가졌던 영기는 다 잃었는데 쓸데없이 가지고 있는 영기의 그릇만 커서 자칫 또 다른 적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릇이라도 작으면 존재감이 작아서 영기가 좀 많은 장소에 숨어서 차근차근 영기를 쌓을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잠시 데리고 있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건에게 물었다.
“꼭 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적들로부터 널 지켜달라고 하는 거라면 사양할게.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서.”
건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백은 마구 고개를 흔들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켜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은인과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제 존재감이 묻히기 때문에 안전해서 그러는 겁니다. 제발 그냥 당분간 따라다닐 수 있도록만 해주세요. 그냥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절대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백은 계속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백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건은 살짝 백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여전히 귀찮다는 생각도 그대로 있었다.
그런 건의 표정을 읽은 백은 재빨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한 수를 던졌다.
“따라다닐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속(束)의 계약이라도 하겠습니다.”
영수가 속의 계약을 한다는 건 한 마디로 자신의 영혼을 계약 대상에게 종속되게 한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소울러와 영혼이 맺는 맹약과는 다른 약속이었다.
경계의 세상에는 이렇게 능력이 좋은 영수와 속의 계약을 맺고 힘을 얻은 이들도 종종 있었다.
“속의 계약이 뭔데?”
“간단하게 제 주인님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 속의 계약은 백이 가진 마지막 한 수이자, 될 수 있으면 쓰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한 수였다.
속의 계약을 한 영수는 아무리 영기를 쌓아도 신수가 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계약의 대상이 다시 영수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신수가 될 정도로 많은 영기를 쌓은 영수는 그 자체로 엄청나게 쓸모가 많았기 때문에 쉽게 속의 계약을 풀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건 백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족쇄가 되는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백이 이 얘길 꺼낸 건 이렇게 해서라도 사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만약 건이 백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백은 거의 99%의 확률로 이 경계 안에서 다시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족쇄가 될 수 있는 속의 계약 얘기까지 꺼내 든 것이었다.
“영수의 주인이 되면 좋은 게 있나?”
“적어도 나쁜 게 있진 않을 겁니다.”
백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건의 마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쁜 건 아니라니까 일단 거둬볼까?’
건은 백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보았다.
말을 하는 건 제외하면 진짜 한 마리의 새끼 돼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백.
하지만 어차피 손해가 없다면 녀석을 거둬준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좋아, 그 속의 계약이란 걸 해줄게.”
조금 고민하던 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어차피 나한테도 손해 될 게 없는 거잖아? 근데 속의 계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제 머리에 은인님의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려 주시면 제가 그 피를 매개체로 은인님에게 속의 맹세를 하는 걸로 계약이 완료됩니다.”
속의 계약을 하는 건 별로 어렵지가 않았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계약을 원하는 이의 피와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영수의 의지였다.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속의 계약이 완성되었다.
“좋아, 그럼 바로 계약하자.”
백의 얘길 들은 건은 망설이지 않고 속의 계약을 진행했다.
이건 백도 원했던 계약이었기 때문에 건과 백은 아주 빠르게 속의 계약을 완성했다.
파아아앗!
건의 피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영혼과 하나로 만든 백.
이걸로 백은 영혼에게 종속된 영수가 되었다.
“끝났습니다. 이제부턴 주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명령을 내리면 넌 거기에 무조건 복종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다만……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시면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제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뭐, 그런 건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자. 참, 넌 경계에서 벗어나도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네, 어차피 제가 주인님 옆에 있어도 절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
솔직히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새끼 돼지를 데리고 다니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백이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속의 계약을 끝낸 건과 백은 그렇게 경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경계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 * * *
경계에서 빠져나와 남은 강의까지 모두 들은 건은 카페 헤븐에 가기에 앞서 잠깐 고시원으로 향했다.
그가 고시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지금 자신의 오른팔에 새겨진 흑룡 문신의 정확한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건은 그 와중에 아무도 백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며 진짜 백이 영수가 맞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시원에 도착한 건은 미리 연희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얘기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용히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사이 백은 건이 챙겨준 몇 가지 음식을 바닥에 펼쳐놓고 아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원래 영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오로지 영기만 먹고 계속 살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 백은 워낙 많은 기운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렇게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백이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는 사이 건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정신을 집중한 건은 곧바로 자신의 오른팔 쪽을 휘감고 있는 흑룡 문신을 살펴보았다.
‘분명 마이너스 에너지가 고도로 압축된 덩어리였다. 그 덩어리가 지금 이 흑룡이 된 건데…… 도대체 이건 뭐지?’
건은 조심스럽게 흑룡 문신으로 변한 마이너스 에너지를 향해 접근했다.
‘일단 요놈을 어떻게 움직이지?’
건은 흑룡 문신 쪽으로 정신을 집중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갑자기 흑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헛!”
그냥 생각했을 뿐인데 흑룡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가? 혹시…… 통혼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혼력처럼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건은 감았던 눈을 뜨고 흑룡이 휘감고 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그 흑룡에게 전달했다.
‘일어나라!’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다시 일어났다.
스르르르륵.
건의 명령을 알아들은 것처럼 흑룡이 눈을 뜨고 천천히 오른팔을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오…….”
건은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스윽.
건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린 후 손을 펼치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뒤집었다.
‘나와라!’
그리곤 흑룡에게 명령했다.
츠츠츠츠츠츳!
이번에도 흑룡은 건의 명령을 듣곤 그대로 움직였다.
건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나오는 한 마리의 흑룡!
흑룡은 그렇게 건의 몸 밖으로 튀어나와 마치 실제로 살아있는 것처럼 건의 몸을 휘감았다.
오른팔에서 튀어나온 흑룡은 문신으로 있을 때보단 더 커졌다.
길이는 대략 2m 정도였고 몸 두께는 건의 팔 두께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빛을 완전히 제거한 묵빛을 띈 한 마리의 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