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더 소울(The Soul) - 에이스(ACE) [2]
스르르륵.
이번에는 창(槍)이었다.
길이가 대략 3.5m 정도는 되어 보이는 그 평범하게 생긴 장창(長槍)이었다.
건이 장창을 고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건은 개 머리의 암괴와 싸우면서 녀석이 근접 전투에 특화된 전형적인 인파이터(Infighter)라는 파악한 상태였다.
인파이터에겐 사거리가 긴 무기가 최고였다.
사실 장창이 아닌 활을 선택했다면 더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문제는 쏠 화살이 없다는 점이었다.
화살을 따로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흑룡아로 화살까지 만들기엔 11m의 거리 제한이 걸렸다.
이래저래 활은 아직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활 대신 장창을 선택했다.
흑룡아를 창 형태로 바꾼 건은 창의 중하단을 꽉 잡은 후 암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삼연격(三連擊)!
건이 잡은 흑룡아(창)는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암괴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창에서 펼쳐진 공격이었지만 마치 세 개의 창이 동시에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암괴는 건의 펼친 삼연격을 자신의 팔로 막았다.
놈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팔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건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우득, 콰드득!
놀랍게도 삼연격은 똑같은 한 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1초 사이에 날카로운 세 번의 공격이 같은 지점을 연속해서 파고들자 아무리 강철과 같은 강도를 자랑하는 놈의 팔이라고 해도 꿰뚫릴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앙!
건의 창이 자신의 팔을 꿰뚫자 암괴는 크게 소리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놈은 일단 건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 안정을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놈의 생각일 뿐이었다.
건은 놈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파파팟!
검은 놈을 따라 같이 앞으로 움직이며 이번엔 창의 하단을 잡았다.
그러자 건의 공격범위는 거의 1m가량 늘어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삼연격.
흑룡아(창)는 다시 한 번 암괴의 몸을 꿰뚫었다.
콰드득!
크아아아아아아!
경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울부짖는 암괴.
놈은 눈까지 붉게 충혈되며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는 놈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크아아앙!
분노한 암괴는 이번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갈 수 없다면 아예 거리를 좁혀서 마구잡이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놈의 바람일 뿐이었다.
당연히 건은 절대 놈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휘릭, 파파팟!
건은 놈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창으로는 놈의 다리 쪽을 공격했다.
그렇게 되자 놈은 건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거리는 여전히 건이 원하는 만큼 그대로 유지되었다.
애초에 건은 이러한 놈의 반응을 모두 예상하고 흑룡아를 창으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개 머리의 암괴는 분명 상급의 암괴였고 지니고 있는 힘도 꽤 강했다.
하지만 문제는 건이 놈을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은 절대 놈에게 기회를 다시 내주지 않았다.
그는 장창을 이용해 거리를 계속 조절하며 암괴를 몰아붙였고 결국 암괴는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충격을 입으며 뒤로 밀려났다.
승부는 이걸로 끝났다.
아무리 상급 암괴의 재생력과 체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다소 허무한 결말.
이러한 결말을 만든 건 바로 건의 말도 안 되는 전투 적응력이었다.
콰드드드득!
건이 강하게 찔러넣은 마지막 회전돌파(回轉突破)의 일격은 암괴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동안 끈질기게 버티던 암괴였지만 이번 한 방은 모든 걸 마무리 짓는 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쿠쿵.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암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암괴를 쓰러트린 건은 조용히 호흡을 정리하며 흑룡아를 다시 오른손으로 흡수했다.
스르륵.
건은 대략 30분 동안 암괴와 싸웠다.
그중 20분 정도는 정말 일방적으로 암괴를 몰아붙였었지만 암괴는 생각보다 끈질기게 버텼다.
‘확실히 상급 암괴는 중상급 암괴와는 전혀 다르구나.’
이번 사냥의 승자는 건이었지만 건은 만약 상대가 좀 더 까다로운 전투 스타일을 지녔었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급 암괴가 이 정도라면 도대체 혼마는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상급 암괴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최상급 암괴, 그리고 그 최상급 암괴는 비교도 하기 어렵다는 하급 혼마.
이런 걸 따져보면 확실히 혼마가 대단하긴 했다.
“……주인님, 대단하시네요!”
도망가는 것과 숨는 것만큼은 예전 능력을 전혀 잃지 않은 것 같던 백이 어느새 다시 나타나서 대단하단 표정으로 외쳤다.
“대단은 개뿔…… 정리하고 돌아가자.”
백은 대단하다고 건을 추켜세웠지만 정작 건은 지금 자신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건.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 * * *
상급 암괴로부터 얻은 전리품을 챙긴 건은 곧장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최근엔 암괴들을 조금씩 잡으면서 건의 수입은 전보다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이제 대기업에 취직한 비즈니스맨들이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건은 처음부터 그런 비즈니스맨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건이 부러워한 건 비즈니스맨들이 아니라 그들이 영위하는 평범한 삶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해 그 학벌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다 졸업하는 대학을 자신도 졸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요즘은 그나마 그러한 감정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그래도 일단 입학까지 한 대학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건은 대학에 입학한 것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게 조금 신경 쓰였었지만 그래도 강의를 들면서 틈틈이 몇몇 수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대충 가벼운 휴식 시간 정도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건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주 모범적인 대학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게 늦깎이 대학생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던 건은 별로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체육대회에 끌려나왔다.
한국대학교의 전통인 1학년 체육대회였다.
“골키퍼요?”
건은 참가신청서에 이름은 올려놓았지만, 설마 자신이 진짜로 경기에 나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대충 후보로 벤치에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형님이 가장 키도 크시고 몸도 좋으시니까…… 골키퍼로 딱 맞을 것 같아요. 지금 워낙 선수가 없어서 그래요. 괜찮죠?”
1학년 대표인 정주현은 간절한 표정으로 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원래 건은 그가 예상한 대로 벤치멤버였다.
하지만 기존에 골키퍼를 하겠다고 했던 이가 며칠 전에 다리를 접질렸다면서 갑자기 골키퍼를 못하겠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정주현은 어쩔 수 없이 건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냥 골문 앞에 서 있으면 되는 거죠?”
“네, 사실 우리도 이번 경기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구색만 맞출 생각이니 적당히 공을 막는 척만 하시면 돼요.”
건의 말에 정주현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건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주현의 부탁을 수락했다.
‘젠장, 벤치에 앉아서 가볍게 흑룡아를 다루는 연습이나 하려고 했는데…….’
경기를 뛰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건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수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시간 정도는 그냥 푹 쉰다고 생각해야겠군.’
이렇게까지 됐는데 미련을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기에 건은 수련을 깔끔히 포기하고 정주현이 건네주는 골키퍼용 장갑과 영어영문학과 큼지막하게 적힌 붉은색 망사 유니폼을 받으며 운동장으로 걸어나갔다.
‘그나저나 골키퍼는 그냥 공만 막으면 되는 건가?’
운동장으로 걸어나가던 건은 축구란 스포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축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에이, 모르겠다. 대충 하자.’
건은 어차피 열심히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전혀 이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11명의 영어영문학과의 축구 선수들이 이기려는 의지가 철철 넘쳐 보이는 화학공학과 11명의 축구선수와 같은 운동장에 섰다.
삐이익!
드디어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영어영문학과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이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영어영문학과의 선수들이라고 해도 가만히 서 있진 않았다.
그들은 나름 패스를 하면서 천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들은 금방 공격권을 화학공학과에 빼앗겼다.
특별히 실수했다기보다는 화학공학과의 선수들이 치열하게 뺏었다는 게 맞았다.
공을 빼앗은 화학공학과의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선배들에게 체육대회의 만년 꼴찌인 영어영문학과에 지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들은 후였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려는 쪽과 그냥 대충 막는 시늉만 하는 쪽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그렇기 때문일까?
경기 시작한 지 불과 5분 만에 영어영문학과의 수비진이 완전히 뚫리며 공격수 두 명과 골키퍼 한 명이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건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명의 화학공학과 선수들을 바라보며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일단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었다.
보는 눈들도 많은데 진짜 가만히 서서 골을 허용했다간 괜히 더 시선을 끌 수가 있었다.
그렇단 얘긴 일단 막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건은 그냥 둘 중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TV에서 축구를 볼 때 이런 순간에는 앞으로 달려나가 각을 좁혀야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공을 가지고 있던 선수가 마치 건을 놀리듯 가볍게 옆으로 공을 패스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건은 자신의 옆쪽으로 빠르게 굴러가는 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땐 이미 공이 옆쪽에 있던 또 다른 선수의 발에 닿아 있었다.
파앙!
그 선수는 가볍게 그 공을 오른발 인사이드로 건드렸고 공은 천천히 굴러서 골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화학공학과의 벤치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1:0
화학공학과가 너무나 쉽게 선취점을 뽑았다.
즐거워하는 화학공학과와 달리 영어영문학과 쪽은 아주 조용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실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자자, 이번 골은 잊고 힘내자.”
1학년 대표이자 중앙수비수로 뛰고 있던 정주현은 동기들을 격려하려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다른 선수들은 모두 별로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 명은 달랐다.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건이었다.
‘이거 뭐야?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그는 그냥 대충 시간이나 때우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골을 먹고 보자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다.
특히 자신 옆을 데구루루 굴러가던 그 공을 떠올리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여전히 건 옆에 붙어 있던 백은 건의 표정이 굳어지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냐, 이거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막아야겠어.”
“네? 뭘 막아요.”
“적어도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이상…… 공이 이 라인을 통과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건은 슬쩍 웃으며 얘기했다.
첫 번째 골.
그게 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첫 번째 골을 먹기 전까진 애들 장난 같은 체육대회 경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이었지만 이젠 달라졌다.
“잘 됐어. 이렇게 된 이상 축구 경기도 수련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야겠어.”
츠츠츠츳.
건은 통혼까지 이루며 혼력을 끌어왔다.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모두 사용할 작정이었다.
물론 이곳은 경계의 세상이 아닌 현실 세상이었기 때문에 혼력을 통해 얻는 힘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 혼력의 힘은 규격 외(外)의 힘이었다.
혼력은 자연스럽게 건의 모든 감각과 운동능력을 증폭시켰다.
“후우우우, 이제부터 나에게 여긴 전장(戰場)이다.”
결국, 넓게 따지고 보면 축구 경기도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건은 전장에 출전한 장수의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힘을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건은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힘을 감춰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힘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나오는 영웅들은 힘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가곤 했지만, 건은 사실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별히 귀찮은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힘을 감출 이유는 별로 없었다.
물론 그래 봤자 혼력이 가진 특성상 현실에선 경계처럼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분명 ‘특별한’ 힘을 가지겐 해주었다.
건은 이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바뀐 건의 마음가짐.
이곳에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영어영문학과에 한 명의 엄청난 에이스(ACE)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