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더 소울(The Soul) - 어둠의 역습 [1]
@ 어둠의 역습.
“왜…….”
동혁은 의아한 눈빛으로 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혼자 싸운 거지? 솔직히 아무리 인질이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내가 한 제안 같은 건 무시할 수 있었잖아?”
“후회하기 싫었다.”
“후회? 그게 무슨 말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너라면 나에게 마지막을 안겨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만큼은 원하는 대로 싸우고 싶었다.
“넌 날 쓰러트리고 내 목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나?”
“만약 네가 나에게 마지막을 안겨줄 수 없는 실력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넌 나에게 마지막을 안겨줄 만한 실력이었고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온 힘을 다해 싸우고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내 목을 쳐라! 그게 내가 원하는 마지막 소망이다!”
“살고 싶지가 않은 건가?”
“무너진 세가를 위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힌 지 오 년…… 이제 할 만큼 했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까지만 하겠다.”
동혁은 단호했다.
그는 진심으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 복수는 네 목을 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상관없는 건가?”
“이미 난 너에게 목을 내놓는 순간 백련김가의 일원이길 포기했다. 이젠 세가의 안위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형님!!”
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동민은 동혁의 얘길 듣고 매우 놀라 외쳤다.
하지만 정작 동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도 결국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백련김가는 더 이상 우리가 우리의 모든 걸 걸었던 그곳이 아니다. 백련김가는 변했고…… 우리는 그 변화를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이제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형님…….”
“여기까지!! 더는 날 형님이라 부르지 마라.”
동혁은 동민의 말을 가차 없이 끊고 건을 바라보았다.
“백건! 왜 망설이는 건가? 설마 그 사이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건가?”
“아주 잠깐……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설사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길을 걸을 순 없을 같네.”
“퉷, 늙은 호랑이로 죽고 싶은 나에게 늙은 개로 삶을 연명하라고 하면 그걸 받아들일 것이라 보나?”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휘릭, 파아아앗!
건은 그 말과 함께 망설이지 않고 동혁의 목을 날려버렸다.
망설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정말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동혁의 목이 날아갔다.
그 순간 동민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동혁의 머리가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였지만 막상 동혁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지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노오오옴!”
파팟!
건을 향해 달려드는 동민. 하지만 건은 마치 이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표정으로 도를 들어 올리며 동민을 막았다.
어차피 건은 동민은 물론이고 뒤에 묶여 있는 동명, 동훈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피에는 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은 건이었다.
그런 건이었기에 그의 마음속에 자비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건은 그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전 동혁이 자신의 목만 가져가고 나머지 세 사람은 살려달라고 외쳤을 때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었다.
예전의 건이었다면 몇 번이고 망설였을 테지만 지금의 건은 달랐다.
척준경의 영혼은 건을 변화시켰고 적어도 지금의 건은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철보다 더 단단하고 얼음보다 더 차가운 건의 마음.
독심(毒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강해진 건의 정신력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음에도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게 해주었다.
* * * *
“후우…….”
건의 목을 노린 백련사웅은 네 사람 모두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건은 그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다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신을 바닷속에 정리하고 나서 통혼을 해제하자 건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통혼이 유지될 땐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던 그였지만 통혼을 해제하자 주체할 수 없는 역겨움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웩…….”
건은 결국, 역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토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소울러를 상대하는 건 암괴나 혼마 같은 괴물들과는 달랐다.
물론 통혼이 해제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척준경의 영혼과 오랜 시간 동기화되어왔던 효과로 어느 정도 정신력이 강해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그 느낌은 건을 생각보다 힘들게 했다.
“후우…….”
토하고 나니 역겨움은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것도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건은 확실히 경계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경계는 단순히 초인적인 힘을 이용해 괴물들을 잡고 돈을 버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언젠가 연희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는 마치 살벌한 야생의 세계와 같은 곳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모든 적이 치명적일 수 있는 곳…… 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세상이 바로 경계였다.
“……마음이 약해지면 그 순간 죽는 건 내가 되는 세상이다. 살기 위해서는 내가 죽기 전에 먼저 나를 죽이려는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건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백련김가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싸움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쓰러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기에 이런 것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됐다.
“수라(修羅)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든지 되어주마.”
건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정리하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론 통혼의 여부와 관계없이 절대 이런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모든 일을 처리한 건은 16번 무인도에서 헌터 협회 측 인물들이 오길 기다렸다.
‘이곳에 혼마가 나타난 것부터 시작해서 백련김가의 소울러들이 난입한 것까지…… 이 모든 걸 종합하면 분명 협회 측의 누군가가 백련김가를 돕고 있다. 이 얘긴 섣불리 내가 협회 측에 백련김가의 만행을 알리면 오히려 역공작을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건은 협회 측 인물들을 기다리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혼마와 백련김가 소울러들 난입은 그냥 이대로 묻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단순히 호출기만 고장이 난 것으로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백련김가를 돕고 있는 누군가 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대놓고 나에게 수작을 부릴 순 없겠지? 지금은 일단 시험부터 합격하는 게 먼저다.’
건은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협회 측에 백련김가의 만행을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백련김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은 협회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협회 자체게 백련김가에 매수되었을 리는 없었지만, 협회 소속의 누군가 작정하고 중간에서 조작하면 오히려 건이 더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건은 이번 사건들을 그냥 덮기로 결정 내렸다.
물론 이번 사건만 덮는 것이었다.
이미 백련김가과 건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건도 이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서두를 이유는 없다. 어차피 마음이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니까…….”
지금 상황에서 애가 타는 것은 건이 아니라 백련김가였다.
그렇기에 건은 서두르지 않고 확실하게 백련김가와 싸움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백련김가…… 너희가 누구를 건드린 건지 확실하게 보여주마!’
* * * *
건은 계획대로 모든 일을 덮고 호출기가 고장이 났다고만 얘기했다.
보고를 받은 김세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 16번 섬에는 혼마는 물론이고 백련사웅까지 들어갔었다.
그런데 건은 그 모든 걸 지워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김세원은 뭔가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주변에 보는 눈도 많았고…… 실제로 호출기도 고장이 난 게 맞았기 때문에 건의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김세원은 너무나 답답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장이 난 호출기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
건을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당장 섬을 조사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가 답답해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건은 시험을 모두 끝내고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건은 정확한 시험 결과를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탈락할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건이 호출기를 망가트린 게 아니라 협회 관리자가 원래 고장이 나 있던 걸 확인도 하지 않고 지급한 것으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한 책임을 건에게 물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건은 시간 내에 암괴와 수마들을 정리한 걸로 결정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협회의 구조대가 섬에 도착했을 때 건의 몸 상태가 지극히 정상이었단 점은 그가 별로 어렵지 않게 암괴와 수마들을 정리했다는 약간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에 합격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래저래 건은 김세원과 달리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의 시험이 끝나고 시험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발표되었다.
당연히 건은 합격이었다.
물론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진 못해서 최초 등급은 겨우 하급 브론즈(Bronze) 정도를 받았다.
시험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 하급 골드까지 등급을 얻을 수 있었는데 하급 브론즈라면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하등급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평균 최하급 실버 등급을 받는 것과 비교해도 확실히 떨어지는 등급이었다.
하지만 건은 등급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건에게 중요했던 건 합격 여부뿐이었다.
합격을 확인한 건은 미련없이 바로 카페 헤븐으로 돌아왔다.
탈락한 몇몇 응시생들은 재시험을 요구하기도 했고 합격한 응시생 중 몇몇도 자신의 등급에 불만을 품고 따졌지만, 건은 미련없이 바로 그곳을 떠났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 지하철로 갈아타고 카페 헤븐으로 돌아온 건을 반겨준 이는 연희였다.
“몇 등급이야?”
연희는 합격 여부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건이 불합격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급 브론즈요.”
“잉? 뭐라고?”
건의 등급을 들은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하급 브론즈라고요.”
“도대체 시험장에서 무슨 짓을 해길래 하급 브론즈가 나왔어.”
연희는 건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건의 등급이 하급 브론즈가 나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고로 그녀는 그해 응시자 중 최고 성적을 거두며 하급 골드 등급을 받았었다.
“그게……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
“설명하자면 좀 긴데…….”
“괜찮아. 설명해봐.”
연희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건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건은 짐은 대충 옆에 내려놓고 연희에게 시험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