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더 소울(The Soul) - 소울러들의 대처 [1]
@ 소울러들의 대처.
철민의 보고를 받은 협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대처를 했다.
협회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이번 일을 여전히 ‘격변’급 사건으로 취급했지만, 대처는 조금 다르게 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들은 제주도를 특별 제한 구역으로 설정하기 위해 수호자 측에게 연락을 취했다.
특별 제한 구역이란 소울러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을 의미하는데 이걸 설정하려면 무조건 수호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협회는 유령들에게도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알리고 특별 제한 구역 설정에 참여해달라고 얘기했다.
아무래도 유령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컸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지 제한 구역 설정이 더 의미 있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제주도를 특별 제한 구역으로 설정한 협회는 현재 그곳에 투입된 대부분의 헌터들을 철수시켰다.
물론 전부 철수시킨 건 아니었다.
협회가 판단했을 때 남아서 임무를 수행해도 될만한 이들은 남겼다.
다만 그 기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헌터들이 철수했다.
협회의 기민한 대응으로 제주도의 경계는 일순간에 썰렁해졌다.
협회는 일단 놈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소울러들을 철수시키고 그다음 놈들을 처리할 실력자들을 제주도에 투입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수호자가 끼어들었다.
수호자는 이번 사건이 경계를 크게 위협하는 사건이라 보고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실력자들을 제주도에 파견시켰다.
그런데 제주도에 파견된 실력자는 수호자 측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유령 쪽에서도 몇몇 실력자가 제주도에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갑자기 제주도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둠의 왕도 이런 분위기가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소울러가 어떤 이들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소울러들의 세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경계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소울러들이 경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면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어둠의 왕은 물론이고 그의 오른팔인 김광택도 그 정도까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헌터는 물론이고 수호자와 유령까지 나서게 되자 상황은 또다시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 * * *
“우린 철수 안 해도 되는 거예요?”
협회에서 내려온 철수 명령대로라면 철민을 제외한 연희와 건은 제주도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나마 조금 여유 있게 봐주면 자신이 지닌 등급보다 훨씬 윗줄의 실력을 지닌 연희까진 어떻게 남을 수도 있었지만, 건은 무조건 철수해야 하는 게 맞았다.
“협회에 우리가 알아낸 놈들의 계획을 보고하면서 우리는 무조건 남아서 이번 의뢰를 해결할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철수 안 해도 된다.”
헌터 팀 헬의 수장이었던 조현광이 그랬듯이 철민도 자신이 알아낸 것을 협회에 보고하면서 그에 맞는 적당한 대가를 받아냈다.
그게 바로 다른 헌터들처럼 철수하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계속 이번 의뢰를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얘길 들어보니 수호자 쪽에서는 천검(天劍)을 보낸 것 같던데…….”
“천검이랑 폭룡(爆龍)을 보냈다고 하더라.”
“어후, 폭룡까지 보냈어요? 수호자가 에이스를 둘이나 보냈네요.”
“아무래도 수호자 쪽에서도 이번 사안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안 것이겠지.”
“헌터 쪽에선 헌터 팀 헬의 정예들과 도살자(屠殺者) 고명운이 남았다고 하던데 맞나요?”
도살자 고명운은 다이아몬드 등급의 헌터는 아니었지만, 그 바로 아래라고 할 수 있는 플래티넘 등급의 헌터였다.
그는 비록 플래티넘 등급의 헌터였지만 사냥 실력만큼은 다이아몬드 등급의 헌터들에게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플래티넘 등급은 골드와 다이아몬드 등급 사이에 존재하는 등급이었는데 사실상 헌터들 중 진짜 실력자는 이 등급에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플래티넘 등급의 헌터가 몇 명 더 있다는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영혼과학자 민재열이 이곳에 왔다는 것만 알고 있다.”
“헐…… 진짜요? 그 미친 과학자가 이곳에 왜 왔데요?”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이겠지. 아마도 괴물들의 진화와 특별한 혼마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다.”
“이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네요. 이젠 괴물들만 문제가 아니겠는 걸요.”
영혼과학자 민재열은 광학자(狂學者) 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Mad Scientist)도 불렸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유령 중 하나였다.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유령이었던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작품은 경계의 세상을 꽤 많이 바꿔놓았다.
물론 워낙 한쪽으로만 미쳐 있어서 종종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을 많이 했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제어하진 못했다.
그만큼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협회도 이번 사건을 외부에 공개하면서 이 정도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을 거다. 그렇기에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묵뢰(墨雷)가 이곳에 올 것 같다.”
“묵뢰요? 정말 그가 올까요?”
묵뢰는 대한민국의 헌터 협회에서 가장 믿을만한 한 수였다.
당연히 그는 다이아몬드 등급의 헌터였고 또한 협회 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실력도 다이아몬드 등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고 알려졌었다.
대한민국의 소울러 전체를 놓고 봐도 거의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힐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를 보내야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테니 아마 무조건 보낼 거다.”
철민은 현재 상황을 통제하려면 묵뢰 정도는 되는 실력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사실 협회 측에선 철민이 그 역할을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철민은 절대 협회 쪽 인물이 아니었다.
“정말 상황이 심각하긴 한가 보네요. 어지간해선 한 명도 보기 힘든 실력자들을 무더기로 볼 수 있게 된 걸 보니…….”
“분명 그냥 무시할 순 없는 상황이 맞지.”
“그런데 괜찮을까요? 지금 상황에서 건이가 여기에 있는 게…….”
철민가 얘길 나누던 연희는 김광택과 싸우며 얻은 상처 때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회복하고 있는 건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얘기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렇다고 저 녀석만 혼자 보낼 순 없잖아.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실전 경험을 쌓기에 최고의 기회일지도 몰라. 어차피 놈들이 완전히 잠적한 상태라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그동안 저 녀석을 좀 빡빡하게 굴려볼 생각이야.”
“네? 빡빡하게 굴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딱 보니 잠적한 놈들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여기서 관광이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 그러니 남는 시간 동안 저 녀석 좀 더 이 상황에 어울리는 소울러로 만들어 봐야지.”
“여기까지 와서 구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을 텐데…… 명복을 빌어줘야겠군요.”
“괴물들한테 당해서 놈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한테 당해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게 낫지 않겠어?”
철민은 이상한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이해시켰지만, 연희는 그다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전 그동안 뭘 할까요?”
“뭘 하긴 저 녀석을 치료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진짜 제대로 굴리실 생각이시군요.”
“말했잖아. ‘빡빡’ 하게 굴린다고.”
철민의 말을 들은 연희는 진짜 건에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넌 어쩌다 저런 사장님을 만나서 이 고생이니…… 이 누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응급치료용 영혼 조각세트를 챙기는 것밖에 없구나.’
연희는 살짝 고개를 흔들며 이 모든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철민은 아마도 몸을 회복하고 나면 곧바로 시작될 게 분명했다.
그럼 그때부턴…… 수련을 빙자한 지옥체험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 * * *
“넌 현재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지?”
시작된 수련, 아니 지옥체험.
하지만 뜻밖에 건은 철민의 수련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연희가 옆에서 충분히 눈치를 줘서 보통 수련이 아닐 것이란 것쯤은 당연히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김광택과 싸우며 느꼈던 굴욕감 때문이었다.
척준경의 영혼과 동기화되며 이미 건은 예전의 건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그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굴욕을 당하는 건 참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철민이 아무리 자신을 빡빡하게 굴려도 그 모든 걸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자신에게 굴욕감을 선사한 김광택만 쓰러트릴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통혼을 좀 더 수련해 전체적인 힘의 균형을 끌어올리는 것 아닐까요?”
건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점을 철민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철민은 건의 얘길 듣자마자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충분히 필요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가장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럼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저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요?”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너의 영혼과 동기화가 된 척준경의 생각으로 싸우는 게 아닌 너만의 생각으로 싸우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넌 지금까지 사실상 척준경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싸워왔을 것이다. 물론 지상최강의 무인이라 불렸던 척준경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싸워도 넌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넌 네가 가진 힘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게 된다.”
“절반이요? 전 사장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간단하다. 맹약이란 것은 네가 고대의 영혼과 계약을 맺고 그 영혼의 힘을 빌려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울러들은 여기서 한 가지 아주 흔한 착각을 하게 된다. 그건 바로 고대의 영혼이 지닌 힘이 전부라는 착각이지.”
“그럼 소울러에게 고대의 영혼으로부터 받는 힘 말고 또 다른 힘이라도 있나요?”
“당연히 있다.”
“그게 뭐죠?”
“그건 바로 너의 영혼이 지닌 힘이다.”
“네? 제 영혼이 지닌 힘이요?”
여기까지 들었음에도 건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네가 어떻게 소울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그냥 우연히? 운이 좋아서? 아니다. 넌 절대 우연히 소울러가 된 게 아니다. 바로 네 영혼이 널 소울러로 이끈 것이다.”
철민은 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네 영혼은 분명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힘은 고대의 영혼들이 지닌 힘처럼 아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네가 너와 맹약을 맺은 척준경의 힘을 그의 방식대로 사용하지 않고 네가 지닌 영혼의 힘을 통해 그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넌 아마 지금보다 배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솔직히 아직 전부 이해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척준경의 방식이 아닌 저만의 방식으로 싸우란 얘긴 대략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걸 이해하진 못한 건이었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모든 전투에서 척준경의 방식대로 싸워왔었다.
척준경의 영혼과 동기화된 그에겐 그 방식이 가장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차피 나도 단순히 몇 마디 말로 너에게 이걸 이해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이걸 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어쩜 위험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넌 견뎌야 한다. 그래야 척준경의 방식과 너의 방식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철민의 말에 건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말로 배우는 것보다는 몸으로 배우는 걸 선호했다.
비록 몸은 고달프고 힘들겠지만…… 이쪽이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하자.”
파지지직, 화르륵!
철민은 말과 함께 양손에 신화력과 진뇌력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시작부터 살벌해지는 분위기.
건은 그 순간 드디어 지옥문이 열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