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더 소울(The Soul) - 사냥 재개 [2]
어둠의 왕이 만들어낸 경계는 과연 기존의 경계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곳에 들어간 소울러들을 짓누르는 어둠의 기운은 과연 이곳이 호랑이 굴과 같은 곳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어둠의 경계는 유적과 아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유적에 일그러진 마이너스 에너지가 있다면 이곳에는 그것과 아주 유사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암흑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넘어서 공중전까지 다양하게 경험한 노련한 소울러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어둠의 왕이었다.
물론 그들은 왕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걸 만들어낸 어떠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존재를 자신들이 그 존재를 사냥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경계를 전부 쓸어버리긴 보다는 경계의 핵심을 향해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절대 서로 협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치고 들어가는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협동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이들이었기에 어둠의 왕이 만들어낸 암괴나 수마들로는 절대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어둠의 왕을 향해 달려가는 7명의 소울러들.
정작 그들이 여기저기 남기고 간 수많은 괴물을 처리할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들을 지원하는 후발대.
뒷정리는 후발대의 몫이었다.
당연히 연희와 건은 이 후발대에 속해 있었다.
철민이 늦은 이유는 마지막까지 건을 너무 심하게 몰아쳐 건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조금 더 걸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건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고 철민과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후발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묵뢰를 비롯한 최상급 소울러들 7명이 경계로 들어간 후 대략 삼십 분 정도 뒤에 똑같이 묵뢰가 만들어놓은 그 입구를 통해 경계로 들어왔다.
그들을 안내한 건 묵뢰를 따르는 묵룡대의 헌터들이었고 그 헌터들은 그들에게 단 한 가지만 지켜달라고 얘기했다.
그것은 바로 절대 무리를 하지 말아달란 것이었다.
무리하다가 오히려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는 건 현재 소울러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리를 하지 않는 범위에서 괴물들을 사냥해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묵룡대의 헌터들이 후발대에게 요구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후발대로 경계에 들어온 소울러들 역시 상당한 실력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 후발대로 들어온 마흔여덟 명의 소울러들은 어둠의 경계로 들어오자마자 각자의 무리를 유지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건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
당연히 연희와 건도 다른 소울러들과 헤어져 어둠의 경계에 널려 있는 괴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차례 같이 사냥해서일까?
그들의 호흡은 제법 잘 맞았다.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라고 해도 대략 서로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힘을 합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특히 건이 원거리 공격이 특기인 연희를 위해 주로 앞쪽에서 괴물들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별로 어려움 없이 암괴와 수마들을 학살 할 수 있었다.
“누나, 왼쪽에 한 놈요!”
휘릭, 콰드득!
건은 앞쪽에 있는 암괴의 머리를 천원돌파로 가볍게 날려버리며 연희를 향해 외쳤다.
타앙! 퍼펑!
그러자 연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가볍게 광혼탄으로 건의 왼쪽을 향해 다가오던 암괴의 머리를 박살 냈다.
“클리어.”
철컥.
연희는 전장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저격을 통해 건을 지원하는 중이었다.
상급 암괴 네 마리와 스무 마리 정도의 수마들을 불과 10분 만에 깔끔하게 정리한 건과 연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라도 또 다른 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으, 이 끈적끈적한 기운은 아무리 적응을 하려고 해도 잘 안되네요.”
건은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찡그렸다.
경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암흑마기는 소울러들을 상당히 귀찮게 했다.
물론 암흑마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당장 소울러들을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암흑마기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끊임없이 소울러들의 몸에 들러붙었다.
이 얘긴 혹시라도 소울러들이 틈을 보인다면 언제라도 소울러의 몸속으로 침투해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울러들은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방심하면 잡아먹힐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함부로 만용을 부리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임무는 주변 정리였다.
진짜 핵심적인 임무는 그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을 지닌 일곱 명의 소울러들에게 주어진 상태였다.
“놈들의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페널티 같은 걸로 생각해야겠지.”
연희는 손에 들고 있던 특별한 저격 소총을 가볍게 어깨에 걸치며 건의 말에 대답했다.
“하긴 똥개도 지네 동네에서는 목에 힘을 준다고 했으니 어쩔 수가 없겠네요.”
“우리야 뭐 그 똥개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되는 거니 목에 힘을 주든 말든 상관없지.”
“근데 누나…… 혹시 그때 그 녀석…… 다시 만날 순 없을까요? 찾으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때 그 녀석? 그게 누군데?”
“저번에 절 박살 내고 도망친 그놈이요.”
“아…… 그 별난 혼마녀석…….”
“솔직히 이대로 그 녀석에게 당하기만 하고 일을 마무리 짓긴 싫어서 그래요.”
“흐음, 근데 우리의 임무는 괴물들을 보이는 족족 쓸어버리는 것이지 목표를 찾아 제거하는 게 아니잖아. 네가 억울한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임무는 임무다. 임무에 개인적인 감정을 섞을 순 없어.”
연희는 건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원칙을 깰 순 없었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이건 분명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틱 같은 것이었다.
“흐음, 제가 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네요. 누나 말이 맞아요. 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번 임무를 망칠 순 없죠.”
건은 연희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보단 임무에 충실해야 해. 네가 진짜 프로 헌터가 되려면 때로는 자신의 감정마저 통제할 줄 알아야 해.”
“네, 명심할게요.”
건은 연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냥을 계속하자. 괴물들을 박멸해야지!”
“넵!”
주변을 정리한 건과 연희는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임무는 주변 정리였다. 그걸 넘어선 뭔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전체적인 그림을 망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단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 * * *
소울러들의 기습이 시작된 그 순간.
당연히 어둠의 왕도 그들의 공격을 알아차렸다.
최초 묵뢰가 공간검을 이용해 어둠의 경계로 통하는 입구를 만들었을 때 이미 어둠의 왕은 적들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소울러들의 기습은 어둠의 왕을 살짝 당황하게 하였다.
어둠의 왕은 아직 준비를 끝내지 못했다.
그가 준비하고 있던 것은 상당히 파괴력이 있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준비가 끝나려면 최소한 한 달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버는 건 불가능했다.
한 달이 아니라 단 하루도 버티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일곱 명의 최정상급 소울러들이 어둠의 경계로 들어선 그 순간 어둠의 왕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어둠의 경계는 적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어둠의 왕에게 전해주었다.
그제야 어둠의 왕은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만 생각한 소울러들이 얼마나 큰 저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자신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해 보이는 소울러들. 그런 이들이 무려 일곱 명이나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이쯤 되자 어둠의 왕은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걸 다 지킬 순 없었다.
적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왕의 군대는 그 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둠의 왕은 포기할 건 분명히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김광택은 처음으로 왕의 말에 반박했다.
애초에 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이미 김광택은 혼마이면서 기존의 혼마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난 이미 모든 경우의 수를 읽었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주인님, 지금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닙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권속이 희생되더라도 주인님만 사실 수 있다면 그게 옳은 겁니다.”
“그것 역시 내가 읽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설사 이곳에 존재하는 나의 모든 권속이 희생된다고 해도 난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닙니다. 살아남으실 수 있습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그것들을 깨우면 아무리 적이 강하다고 해도 충분히 주인님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쯧쯧쯧, 넌 아직도 날 모르는구나. 당연히 난 그 경우 역시 수를 읽었다. 물론 그 경우는 내가 살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가능성 자체가 너무 낮았다. 너는 모른다.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적들이 얼마나 강한 놈들인지…….”
“주인님!”
“됐다. 난 이미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 시간조차 별로 없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적들은 나를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절대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뒤편에 내가 직접 만들어낸 이곳까지 찾아낸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계속 추적을 한다면…… 설사 이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그 끝이 별로 좋진 않을 것이다.”
어둠의 왕은 아주 먼 곳까지 바라보며 모든 경우의 수를 읽은 것이었다.
세상에 나와 온갖 지식을 다 먹어치운 그는 현재 굉장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예측은 꽤 정확했다.
“어차피 이렇게 한다고 해도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쉽게 죽지 않는다. 모든 게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난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많은 걸 잃겠지만…… 내가 부활할 수만 있다면 그땐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의 왕이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김광택도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날 믿어라. 어둠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둠의 왕은 그 말과 함께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광택을 향해 다가갔다.
김광택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런 어둠의 왕을 조용히 영접했다.
순간 어둠의 왕의 몸에서 심연(深淵)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모든 빛을 삼킬 수 있는 그런 절망의 어둠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의 선택.
그것은 생각보다 더 처절하고 치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