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더 소울(The Soul) - 영혼투기장 [2]
영혼투기장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을 꼽으라면 세 가지를 얘기할 수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당연히 살인금지였다.
물론 영혼투기장이 워낙 살벌하게 싸우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건 일상다반사처럼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설사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고 해도 포션이라는 사기에 가까운 치료제가 존재하는 이상 응급처치만 잘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기에 작심하고 상대방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 살인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다음 두 번째 규칙은 폭주금지였다.
여기서 얘기하는 폭주란 이성을 잃고 맹약을 맺은 영혼에게 모든 통제권을 넘겨버리는 상황을 의미했다.
이렇게 폭주를 하면 투기장 관리자들이 경기에 난입해 폭주한 소울러를 제압하게 되어 있었다.
폭주는 자칫 더 큰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영혼투기장에선 철저히 규제하고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규칙은 삼진아웃이었다.
삼진아웃은 바로 연속해서 세 번 패하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는 규칙이었다.
어떤 리그에서도 무조건 적용되는 이 규칙 때문에 영혼투기장은 늘 활기가 넘쳤다.
당연히 선수로 등록된 소울러들은 선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3연패 당하는 걸 어떻게 해서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보니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경기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대전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살인금지, 폭주금지, 삼진아웃.
이 세 가지 규칙이야말로 영혼투기장을 대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밖에도 세세한 규칙들이 존재했지만 그런 건 말 그대로 세부규칙일 뿐이었다.
건은 병일에게서 얻은 자료들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걸로 경기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데뷔전을 치르는 것뿐이었다.
지름이 100m인 커다란 원형의 링.
그 안에는 몇 개의 강철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 경기장이 바로 영혼투기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기장이라 할 수 있는 아이언필드(Iron Field)였다.
당연히 이 경기장은 경계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영혼투기장 쪽 관리자들은 마치 만물상처럼 경계의 틈에 영구 경계를 열고 그곳에 영혼투기장을 세워 놓았다.
이게 바로 만물상과 함께 대한민국에 단 두 개밖에 없는 경계의 틈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은 만물상만큼이나 굉장히 넓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언필드만 해도 여러 개가 존재했다.
아이언필드 외곽에는 10m 높이의 강력한 충격흡수 능력을 가진 반투명한 보호막이 둘러쳐져 있었고 안쪽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강철기둥 역시 강력한 충격흡수 술법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변형이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 강철기둥은 변형되지 않는 지형지물이란 뜻이었다.
물론 영혼투기장에 아이언필드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경기가 열리는 곳이 이 아이언필드였고 달라지는 건 가끔 선수들 간의 합의에 따라 아이언필드에 추가적인 부속물들이 몇 개 더 생기는 것뿐이었다.
경기장 밖으로는 당연히 관람석이 존재했다.
다만 관람석은 경기장에서 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생생하게 소울러들의 전투를 구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신 관람석 곳곳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스크린에 나오는 영상은 경기장 내부에 설치된 수십 대의 초소형 카메라들이 잡아내는 것들이었다.
영혼투기장은 이런 식으로 소울러들 간의 전투를 완벽하게 중계했다.
지잉, 철컥!
아이언필드의 양쪽 끝에 존재하는 두 입구가 열리고 오늘의 두 번째 경기를 치를 소울러 두 명이 아이언필드 안으로 입장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름 영혼투기장에서 잔뼈가 굵은 소울러였다.
그는 영혼투기장에서 활동한 4년이 되었는데 4년 중 거의 90% 정도를 브론즈급 리그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실버급 리그에서 올라간 적도 있는 나름 브론즈급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소울러 중 한 명이었다.
‘역시 관리자들한테 기름칠을 좀 해놓은 보람이 있네. 한 번만 더 이기면 다시 실버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데…… 이 타이밍에 데뷔전을 치르는 초짜라니! 크크, 이보다 꿀 대진이 어디 있겠어?’
이우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름 최근 삼 연승을 거두며 리그 포인트를 상당히 끌어올렸기 때문에 이제 단 한 번의 승리만 추가하면 실버 리그에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보를 보니 헌터 출신이던데 어디서 또 돈 좀 벌어보려는 초짜 헌터 하나가 멋도 모르고 이곳에 도전했나 보네.’
우진은 4년 동안 영혼투기장에서 활동하며 브론즈급 헌터들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걸 수도 없이 봐왔었다.
특히 헌터들 같은 경우는 실력을 정확하게 측정하기가 힘든 유령과 수호자 쪽 소울러들과는 다르게 이미 자격시험을 나름 정확한 실력 평가를 받은 후 투기장에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브론즈급 리그에 오는 헌터들의 실력은 정말 뻔한 수준이었다.
‘깔끔하게 털어주고 다시 한 번 실버 리그에 도전하자.’
우진은 가볍게 각오를 다지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한 남자.
그 남자가 오늘 우진의 상대였다.
브로즈 등급의 헌터 백건.
바로 그였다.
‘이우진. 브론즈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소울러. 특기는 양팔을 변형시켜 괴력을 가진 팔로 만드는 것…….’
건 역시 당연히 이우진의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우진은 영혼투기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들어나 있는 정보가 훨씬 더 많았다.
‘육체변형을 통한 강화계열 스타일이란 거지…….’
아무리 건이라고 해도 낯선 장소에서 괴물들이 아닌 소울러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긴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나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애초에 척준경의 영혼과 동기화된 인물이 전투와 관련된 상황에서 긴장한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어디 한번…… 즐겨보자.’
건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는 이 상황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위잉, 철컹!
열려있던 두 개의 문이 닫혔다.
그와 함께 투기장 내부와 외부에 아주 간단한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띠이이이이!
이게 바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진은 신호음이 울려 퍼지자마자 재빨리 앞쪽으로 달려나가 중앙 쪽에 있던 두 개의 강철기둥 중 하나를 선점했다.
이러한 포지션은 투기장에서 아주 기본이 되는 포지션 중 하나였다.
먼저 중앙의 강철기둥을 선점하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 대처하는 이 포지션은 가장 안정적인 포지션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요리할까? 그냥 간단하게 거리를 좁혀서 타격전으로 끝장낼까?’
강철기둥에 등을 기댄 우진은 건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보았다.
‘저 녀석…… 기껏해야 헌터로 활동하면서 암괴들이나 잡아봤지 소울러와 싸워본 경험은 없을 거야. 그렇다는 건 내가 폭풍처럼 몰아붙이면 정신을 못 차릴 게 분명해.’
대충 생각을 정리한 우진은 힐끗 건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진은 못 볼 걸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는 건이 아주 당당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없다는 걸 아예 대놓고 광고하는구나.’
우진은 그런 건을 비웃으며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느꼈다.
츠츠츳!
그걸 느낀 그는 곧장 양팔에 혼력을 주입했다.
우드드득, 드드득.
그러자 그의 두 팔이 대략 1.5배 정도 더 커지면서 동시에 양팔의 근육이 마구 튀어 올라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양팔의 피부는 마치 악어의 껍질처럼 아주 단단하게 변형되어 강철로 팔을 감싼 것처럼 변형되었다.
이게 바로 이우진이 자랑하는 몬스터 암즈(Monster Arms)였다.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파팟!
몬스터 암즈를 소환한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건을 향해 달려나갔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몬스터 암즈를 소환할 경우 우진의 몸 전체에 그 두 팔에서 흘러나오는 혼력 때문에 그가 가진 육체의 모든 운동 능력이 향상됐다.
그래서 그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커다란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우진의 모습은 마치 코뿔소를 연상시켰다.
제대로 받히면 크게 다칠 것만 같은 우진의 돌진.
하지만 건은 걸음을 멈추고 오히려 우진의 돌진을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꽈광!
그 결과 당연히 우진과 건은 충돌했다.
아니, 충돌한 것처럼 보였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충돌은 했지만, 모두가 예상한 그런 모습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건은 우진을 막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뒤로 전혀 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충격을 입지도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막기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건 우진이었다.
‘뭐야?’
우진은 살짝 놀라며 재빨리 오른팔을 휘둘렀다.
뭐가 됐건 선공의 기세를 놓치진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휘잉! 꽈광!
우진의 오른팔에 실린 힘은 두꺼운 시멘트벽도 무너트릴 수 있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시멘트벽을 무너트려도 건의 왼팔은 부러트리지 못했다.
건은 왼팔을 들어 올려 우진의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
보통 그렇게 공격을 막으면 몸이 옆으로 밀리거나 흔들리는 게 당연해 보였지만 건은 마치 땅바닥에 두 다리를 박아넣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우진의 오른팔에 실린 힘 자체를 파천신력의 충격파를 거꾸로 몸 안에서 터트리며 교묘하게 충격 자체를 중화시킨 것이었지만 우진이 그걸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놈이…….”
두 번째 공격마저 건이 막아내자 우진은 살짝 흥분하며 시작부터 자신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기술을 꺼내 들었다.
휘익,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팟!
순식간에 쏟아지는 우진의 양 주먹.
우진의 두 괴물 팔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수십 개의 권영(拳影)을 만들어냈다.
이게 바로 우진이 자랑하는 ‘메테오 펀치(Meteor Punch)’였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들처럼 마구 주먹을 꽂아넣는 기술이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메테오 펀치는 모조리 건에게 적중되었다.
애초에 건은 처음부터 우진의 모든 공격을 피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건은 아예 양팔의 가드를 풀고 자신의 몸으로 우진의 펀치를 모조리 받아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소울러라고 해도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건 물론이고 심할 경우 장기도 손상을 입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됐다!’
우진은 이 한 방으로 이번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진의 착각이었다.
이번에도 건은 제자리에 서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
그것도 모조리 몸으로!
그랬음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설마 이게 끝인가?”
아무렇지 않게 우진을 향해 묻는 건.
그 순간 우진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건은 파천신력의 충격파를 교묘하게 역으로 사용하며 우진의 펀치가 만들어낸 충격 자체를 완벽하게 중화시켰다.
이 정도로 파천신력의 충격파를 사용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정작 건은 별거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진의 공격력 자체가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별 볼 일이 없는 공격력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무효화시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우진은 말까지 더듬으며 건을 바라보았다.
설마 건이 메테오 펀치를 이런 식으로 버텨낼 것이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너무 놀라 다음 공격마저 잊고 말았다.
“만보당에서 구매한 ‘H-WA1’ 강화 전투복의 충격흡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거든.”
건은 그 말과 함께 다음 공격을 잊고 있던 우진의 턱을 사정없이 올려쳤다.
빠각! 콰드득!
무쌍투기가 어려있던 건의 오른 주먹은 그렇게 우진의 턱을 박살 내며 그의 뇌를 마구 흔들었다.
덕분에 우진은 뭔가 눈앞이 번쩍하는 걸 느끼는 순간 이미 정신을 잃었고 그의 몸은 공중에서 몇 바퀴나 회전한 후 볼품없게 바닥에 처박혔다.
건의 데뷔전은 이런 식으로 다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애초에 우진과 건의 실력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일승.’
건은 우진을 날려버린 후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건은 성공적으로 영혼투기장에 데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