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더 소울(The Soul) - 만보당 에이스 [2]
“언제쯤 결과를 볼 수 있는 건가?”
중년인은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차분히 기다리세요. 어차피 지금 당장 결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제가 당장 고의로 실버 리그로 강등당한 후 놈을 처리할 수도 없는 처지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누가 봐도 내가 그 녀석을 노렸다는 걸 뻔히 알 수 있는데…… 그 순간 전 영혼투기장의 관리자들에게 철저히 응징당합니다. 영혼투기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유령이라고 해서 그들이 이런 걸 설렁설렁 넘길 것이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유령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더 싫어합니다.”
“으음…… 그럼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래야죠. 뭐, 꽤 실력이 있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골드 리그 정도까진 올라오겠죠. 그럼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놈과 제가 만나게 될 겁니다. 그토록 원하시는 그 결과는 바로 그 순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믿고 기다리도록 하죠.”
중년인은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어차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 모든 약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약속하신 대가를 받기 위해서라도 꼭 원하시는 결과를 보여드릴 겁니다.”
“부디 그러길 빕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중년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은밀하게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준비는 완벽한 것이겠지?”
백련김가의 총관 김솔은 한 중년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중년인은 백련김가에 존재하는 몇 명의 그림자 중 한 명이었다.
절대 백련김가의 소속이란 걸 드러내지 않고 평생을 백련김가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
그들이 바로 그림자들이었다.
“명령하신 대로 모두 준비를 끝내놨습니다.”
“어때? 그들이 잘 처리할 것 같은가?”
“우리가 약속한 보상이 적지 않은 터라 함부로 약속을 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이 바꿀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번 계획을 위해 세가의 보고(寶庫)까지 열었는데 절대 실패하면 안 되지.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게다.”
김솔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몇 겹의 그물이라면 충분히 놈, 아니 건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밖에 또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그림자들은 평소에는 백련김가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무작정 수하처럼 부릴 수만은 없었다.
“괜찮다. 이젠 원래 네 생활로 복귀해라.”
“네, 그럼 전 이만…….”
스르륵.
중년인은 다시 한 번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자들의 은밀함만큼은 상당한 수준인 것 같았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도 김솔은 한동안 이번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놈이 갑자기 영혼투기장에 등록을 해주는 덕분에 암살자들을 고용해서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암살자들을 고용해 처리했으면 아무래도 카페 헤븐이 대놓고 항의했겠지만, 이번 계획이 내 생각대로만 되어준다면 놈들도 따질 명분이 별로 없어질 것이다.’
여러모로 영혼투기장은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세상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백련김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김솔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번 일을 오히려 백련김가가 살아 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었다.
백련김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 아니면 백련김가가 이대로 완벽히 폭삭 망하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온갖 변수가 가득 차 있는 만보당의 에이스 백건이었다.
그 만보당의 에이스 백건은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도 모른 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실버 리그에서 두 경기를 치른 상태였다.
그리고 당연히 결과는 대승이었다.
이로써 영혼투기장 7연승을 완성한 건은 드디어 영혼투기장의 공식 소식지라고 할 수 있는 영혼투기록(靈魂鬪技錄)에 짧게나마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일단 영혼투기록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건이 영혼투기장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었다.
영혼투기록에는 아주 짧게 건에 대해 적혀 있었다.
‘……최근 브론즈 리그부터 7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만보당 에이스 백건은 확실히 브론즈급 헌터라는 게 믿기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이게 전부였지만 이것만으로도 건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건은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제 겨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잡힌 투기장에서의 8번째 대결.
이번 대결은 다소 특별할 수 있는 대결이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실버 리그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제론 골드 리그 소속의 소울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경기를 치르지 않아 경고와 함께 실버 리그로 강등당한 골드 리그의 소울러.
일명 ‘바람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최한종이었다.
그는 골드 리그에서 중간 정도의 서열을 유지하던 소울러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 동안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일주일 전에 실버 리그로 강등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삼 년 동안 꾸준히 골드 리그에서 활동한 소울러였기 때문에 그 실력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그는 영혼투기장에선 가장 드문 부류에 속하는 수호자 쪽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징이라면 기복이 없는 실력과 장기전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한방에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파괴력이 있는 소울러는 아니었지만 대신 경기를 오래 끌면서 상대방을 말려 죽이는 요령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닌 실력에 비해 인기가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바람의 마술사라는 별칭 말고 장기전의 마술사나 운영의 마술사라는 별칭으로도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불리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까지 건이 싸웠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 * * *
바람의 마법사 최한종은 8등급 영혼인 진종환과 맹약을 맺은 소울러였다.
진종환은 규장각 서리를 지낸 진동석의 아들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백부 진동익에게 서예를 배웠으며 커서는 왕희지와 김생의 필체를 본받아 일가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좋아 무예를 익히고 20대에 이르러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었다. 달이 밝은 밤에 벗들과 함께 산에 들어가 무예를 펼쳤는데, 몸이 나는듯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중인출신이었기 때문에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사라진 불운한 무인이었다.
이러한 진종환은 흔히 말하는 바람을 타는 방법을 터득한 인물이었다.
진종환은 이러한 자신만의 바람을 타는 비법을 월풍무(月風舞)라고 불렀는데 현재 그것은 진종환과 맹약을 맺은 최한종에게 전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최한종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건의 주변을 빠르게 움직이며 탐색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만약 건이 실력이 모자란 소울러였다면 이러한 최한종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가지조차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건은 최한종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최한종의 움직임이 상당히 빠른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건이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바람의 마법사라더니 확실히 빠르긴 빠르네.’
최한종이 건을 살피는 것처럼 건도 최한종을 살폈다.
물론 최한종은 최근 떠오르는 다크호스와 같은 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면 건은 골드 리그에서 활동하는 소울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놓고 살폈다.
‘하지만 저 빠른 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건은 내심 최한종이 골드 리그에서 활동하는 실력자라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를 하는 중이었다.
건에게 강자와의 싸움은 상황과 관계없이 늘 즐거운 일이었다.
한편 반대로 건의 주변을 맴돌며 탐색전을 펼치던 최한종은 소문보다 훨씬 별로 볼 게 없는 건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뭐지? 요즘 한창 치고 올라오는 소울러치고는 너무 별 게 없는데? 역시…… 그래 봤자 실버일 뿐이라는 건가?’
최한종이 살핀 건은 빈틈투성이였다.
그는 건이 자신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착각한 이유는 건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다.
그건 바로 건이 가지고 있는 심안은 시야를 굉장히 넓게 제공하기 때문에 굳이 건은 최한종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역시 이 녀석도 실버 리그에 흔하게 있는 벌레 같은 놈들 중 하나였던 건가?’
최한종은 실버 리그와 골드 리그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건이 단순히 운이 좋아 실버 리그에서 연승을 거둔 것으로 생각해버렸다.
‘왜 영혼투기장의 골수 팬들이 진짜 영혼투기장은 골드 리그부터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면 되겠군.’
최한종은 이걸로 탐색전을 끝냈다.
더는 살펴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가장 빠르게 건을 쓰러트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바람 칼날을 사용하자.’
바람 칼날은 월풍무의 실전 초식 중 하나였다.
그것은 바람을 손안에서 아주 얇게 펼쳐서 칼날처럼 만든 후 날리는 기술이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바람의 칼날은 아주 빠르고 날카로웠다.
휘이잉.
결정을 내린 최한종은 다시 한 번 바람을 가볍게 타며 양 손바닥 위로 바람을 끌어들였다.
츠릿!
그렇게 끌려들어 온 바람은 곧장 최한종의 뜻대로 아주 얇게 펼쳐졌고 그 순간 최한종은 그 얇은 바람을 건을 향해 던졌다.
파팟, 파파팟!
이게 바로 바람 칼날이란 것이었다.
최한종이 보기엔 건의 전신이 빈틈투성이였기 때문에 그 빈틈 중 가장 치명적일 것으로 생각되는 두 곳을 노리고 바람 칼날을 날렸다.
그나마 머리를 노리지 않은 건 자칫 제대로 머리에 충격을 입어 즉사(卽死)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한종은 이 한 수로 건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자신이 날린 바람 칼날에 상당한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역시나 예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휘릭, 파파팟!
퍼퍼퍼펑!
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던 두 개의 바람 칼날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정확히는 건이 두 자루의 단검을 던져서 바람 칼날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었다.
“바람을 다룬다는 게 이런 건가? 생각보단 흥미롭군. 어쨌든 단순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란 사실은 만족스러워.”
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최한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최한종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실버 리그에서 활동하는 한 마리의 벌레와 같아 보였던 건이 갑자기 엄청나게 큰 거인(巨人)처럼 느껴졌다.
“헉!”
이 정도의 위압감은 골드 리그에서도 거의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바람을 다루는 기술이란 게 어떤 건지 보도록 할까?”
스윽.
건은 그 말과 함께 양팔을 좌우로 펼치며 가슴을 열었다.
이건 최한종에게 마음껏 공격을 해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최한종은 마음껏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건에게서 흘러나온 압도적인 기세.
그 기세가 최한종을 휩쓸며 그를 한순간 얼려버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