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더 소울(The Soul) - 골드 리그 [2]
최한종은 기권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사용해 건을 이겨보려고 했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그저 건에게 좋은 영감(靈感)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최한종은 건에게 수많은 영감을 안겨주고 패배를 인정했다.
덕분에 건은 이번 전투에서 자신만의 오행발현술을 완벽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그것을 오행발현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큰 무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건은 여전히 그것을 오행발현술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새로워진 오행발현술은 드디어 실전(實戰)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전까지의 오행발현술은 그저 눈을 어지럽히거나 견제하는 정도로밖에 쓰지 못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훌륭한 기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행발현술은 건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이건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가뜩이나 빠른 속도로 강해지던 건은 오행발현술 덕분에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건은 정말 파죽지세(破竹之勢)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실버 리그에 올라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골드 리그로 올라갔다.
앞선 경기까지 모두 합치면 건은 단 3개월 만에 브론즈 리그에서 골드 리그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이건 정말 수직 상승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정도로 빠른 리그 승급이었다.
이쯤 되자 건은 요즘 영혼투기장에서 가장 뜨거운 소울러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무려 12연승이었다.
지금까지 영혼투기장에서 기록된 최다 연승은 35연승이라 그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중요한 건 패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12승 무패.
승률 100%.
이 정도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보당 에이스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별칭 때문에 살짝 관심을 받던 건은 이제 별칭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건은 만보당 에이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한 번 얻은 별칭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게 보통이었고 거기에 건은 여전히 경기중에 노골적으로 만보당의 장비들을 자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계속 만보당 에이스라고 불렀다.
덕분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이는 만보당의 주인인 병일이었다.
요즘 병일은 정말 신이 나 있었다.
매일매일 파리만 날리던 가게에 꾸준히 손님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몇 가지씩 물건을 사갔다.
건이 잘나가면 잘나갈수록 손님들은 늘어났고 블랙 마이더스 한병일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수많은 자신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영혼투기장의 광고 효과는 병일과 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분명 건이 다소 과대광고를 했었는데도 사람들은 만보당의 물건 품질에 전혀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만보당의 물건들이 품질만큼은 확실하단 뜻이었다.
만보당 에이스가 잘나가면 만보당도 잘나간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인과관계일지 몰랐다.
그래서 한병일은 건이 잘나가면 잘나갈수록 더운 심혈을 기울여 건의 장비들을 제작했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블랙 마이더스의 작업 욕구.
그것은 결국 명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뭐? 벌써 골드 리그에 올라갔다고?”
연희는 깜짝 놀라며 다시 한 번 건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네, 어제부로 올라갔어요. 이제 다음 주에 골드 리그 데뷔전을 치를 예정이에요.”
“헐…… 삼 개월 만에 브론즈에서 골드 리그까지 올라가다니…… 너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이게 대단한 거예요?”
“대단하지. 물론 골드 리그부터가 진짜 영혼 투기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꽤 많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브론즈에서 골드까지 삼 개월 만에 올라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게 모두 누나랑 사장님 덕분입니다.”
“우리 덕은 무슨 다 네가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건 골드 리그는 앞서 네가 경험한 브론즈나 실버 리그와는 전혀 다를 거야.”
“사실 저도 그 부분이 가장 감이 오질 않아요. 요즘 다들 저에게 그 얘기를 해주던데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크길래 그렇게들 얘기하는 거죠?”
“간단해. 내가 지금 당장 영혼투기장에서 활동한다고 해도 간신히 플레티넘 리그에 턱걸이하거나 혹은 골드 리그의 최상위권에 속하게 될 거야. 이젠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감이 오지?”
“아…… 네, 확실히 이해가 되네요.”
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연희의 실력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하는 것 중 하나가 그녀와의 대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연희를 완전히 넘어서진 못했다.
연희는 이쪽 세상에서도 상당한 강자였다.
지금 같은 속도로 건이 발전한다면 언젠간 분명 연희를 넘어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골드 리그에는 상당한 실력자들이 있겠군요.”
“응, 그럴 거야. 대신 소속되어 있는 소울러들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정보를 모으는 건 훨씬 더 수월할 거야.”
“그렇군요.”
건은 연희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골드 리그에서 만나는 소울러들은 앞으로 네가 경계를 살아가면서 자주 마주칠 수도 있을 거야. 그들은 단순히 영혼투기장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거든.”
“투 잡(Two Job) 같은 건가요?”
“뭐, 비슷하지.”
“어떤 이들과 싸우게 될지…… 벌써 두근두근하네요.”
“두근두근한다고? 역시 넌 정상이 아닌 거 같아.”
연희는 그녀가 볼 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서 설레고 있는 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헤헤, 왜요! 누난 강자와 싸우는 게 즐겁지 않으세요?”
“응, 난 그런 건 별로 즐겁지 않아. 대신 난…… 강한 괴물과 싸우는 게 즐거워.”
연희는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연희도 그다지 정상 같지는 않아 보였다.
“뭐, 그거나 이거나 비슷하잖아요.”
“절대 안 비슷하거든.”
연희는 절대 아니란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사실 건의 말처럼 강자와 강한 괴물은 단순히 범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거의 비슷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참, 근데 왜 사장님은 일주일째 안 보이세요? 어디 멀리 가셨어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사장님 외국출장 중이셔.”
“네? 외국출장이요?”
“응, 원래 사장님 정도 되는 헌터들은 종종 국외에서도 의뢰가 들어오거든.”
“오오…… 대단하네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 말처럼 경계 역시 경계는 넓고 할 일은 많거든.”
“그 넓은 경계엔 절 설레게 할 강자도 많이 있겠죠?”
“물론 많지. 그리고 날 설레게 할 강한 괴물도 많이 있을 것이고…… 물론 이 설렘을 환희로 바꾸려면 너나 나나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단 건 알고 있지?”
“당연하죠!”
“그래? 그럼 우리 그런 의미에서 찐하게 대련 한 번 할까?”
“지금이요?”
“응, 어차피 손님도 없고 사장님도 한국엔 안 계시는데 일찍 접자.”
“하하하, 저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건은 연희와의 대련이 즐거웠다.
그녀와 건의 실력 차이는 이제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재미가 꽤 있었다.
“오늘은 선공(先攻)만 양보하고 다른 핸디캡은 없이 할 거야.”
“헉, 누나…… 겨우 선공만으로는 부족해요.”
“또 엄살떤다. 저번에 대련할 때 확실히 느꼈어. 이제 나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너한테 질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이제부턴 핸디캡을 없애야겠어.”
“크으, 결국 전 또 고통받겠군요.”
“야, 소울러가 된 지 이제 겨우 횟수로 삼 년째인 너와 핸디캡 없이 호선으로 싸우게 된 내 심정도 좀 이해해야지. 이 괴물 놈아!”
“하하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이 괴물 놈도 전력을 다해 누님의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징글징글한 놈.”
연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어려있었다.
* * * *
“드디어 첫 번째 낚싯줄이 움직였습니다.”
어둠과 하나가 된 상태로 김솔에게 보고하는 중년인.
그는 언젠가 영혼투기장의 소울러들을 만나고 다녔던 그 인물이었다.
“오, 드디어 놈의 입질이 시작된 건가?”
“네, 예상보다는 훨씬 빨리 시작되었습니다.”
“흐음, 그만큼 놈의 실력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어떤가…… 첫 번째 낚싯줄은 놈을 낚을 만큼 튼튼한가?”
“변수가 너무 많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준비한 낚싯줄 중에는 가장 얇은 낚싯줄이기 때문에…… 일단은 입질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첫술부터 배부를 것을 기대하면 안 되지. 알겠다. 일단은 탐색전 정도라고 생각하자.”
“일단 입질이 시작된 이상 앞으로 계속 더 두꺼운 낚싯줄들이 놈을 낚아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 저희의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겠지. 낚싯줄로 부족하다면 투망이라도 던져서 무조건 우리의 뜻을 이뤄야지.”
김솔은 고개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남아 있는 백련김가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서 완성한 이 번 계획.
그렇기에 김솔은 이 계획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킬 작정이었다.
백련김가의 수작 따윈 전혀 모르고 있는 건은 골드 리그에 올라와 치르는 첫 경기를 위해 아이언필드로 입장하며 조용히 상대방에 대해 파악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이름은 최지만. 골드 리그에서의 서열은 중하위권. 알려진 바로는 양팔을 몇 가지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위력적인 원거리 공격을 하는 형태임. 전형적인 원거리 공격형 소울러. 물론 그렇다고 근접 전투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님.’
사람들에게 ‘캐논암즈(Cannon Arms)’라고 불리는 그는 변형계열 소울러이면서 동시에 원거리 공격형 소울러였다.
이미 골드 리그에서는 몇 년째 활동하고 있는 소울러였기 때문에 대충 그가 가진 능력의 특징이 뭔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연희 누나와 아주 약간은 비슷할 수 있겠네.’
건은 아이언필드 안쪽에 들어서서 멀리 보이는 최지만을 바라보며 연희를 떠올렸다.
물론 비슷한 점보단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적어도 원거리 공격이 특기라는 점은 확실히 비슷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건은 이번 경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건이 하루가 멀다고 상대한 게 연희였다.
원거리 공격만큼은 그 어떤 소울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연희와 매일 같이 대련한 덕분에 건은 원거리 공격이 특기인 소울러와 싸우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흑룡아를 쓰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아저씨가 챙겨준 장비들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오늘 건이 챙겨온 장비 중 가장 중요한 장비는 정확히 세 개였다.
첫 번째는 원거리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는 휴대용 방패.
두 번째는 적당히 거리를 좁혔을 때 상대방을 위협할 수 있는 공격범위가 긴 창과 같은 종류의 무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똑같이 원거리에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줄 수 있을만한 무기.
이렇게 세 가지가 건이 가장 신경 써서 준비한 것들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만족할 순 없었지만, 병일은 건이 요구한 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장비들을 만들어 건에게 주었다.
“크흐흐, 드디어 진짜 실력자들이 즐비하다는 골드 리그구나.”
건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신호음과 함께 아이언필드의 두 출입구가 봉쇄되었다.
철컹! 쿠쿵!
전투 시작.
순수하게 이 싸움을 즐기는 자.
그리고 이 싸움을 통해 원하는 걸 얻으려는 자.
둘 중 누가 마지막에 웃게 될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