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더 소울(The Soul) - 또 다른 경계의 세상 [1]
@ 또 다른 경계의 세상.
골드 리그에서의 첫 승은 건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특히 아무리 골드리그 중하위권 선수였다고 해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비기까지 동원한 최지만을 박살 낸 건 확실히 주목받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건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첫 목표는 플래티넘 리그였다.
비록 쉽진 않겠지만, 플래티넘 리그에 오를 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폭풍처럼 달려나갈 생각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네? 중국이요?”
연희의 말을 들은 건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뭘 그리 놀래.”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라서 그랬어요. 사장님이 중국에 가 계셨던 거였어요?”
“응, 중국 쪽에 사장님하고 친분이 있는 이들이 조금 있거든 이번에 그쪽에서 도움을 요청해서 가신 건데 아무래도 일이 생각보다 커졌나 봐. 그래서 ‘문곡삼보(文曲三寶)’가 필요하다고 연락을 하신 거야.”
“그리고 제가 그걸 중국에 계신 사장님에게 가져다 드려야 하고요.”
“그래, 원래는 내가 가려고 했는데……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네가 가게 된 것이지.”
“네, 알겠어요. 어차피 영혼투기장이야 여유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나도 알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별로 어렵진 않을 거야. 그냥 문곡삼보를 가지고 사장님에게 가져다 드리고 오면 되는 일이야.”
“네…… 별로 어려울 것 같진 않네요. 근데 문곡삼보라는 거 지금까지 저도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사장님이 쓰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번 일은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가 보네요?”
“그러게 어지간한 일로는 절대 문곡삼보를 꺼내지 않는 사장님인데 그걸 가져오라고 연락하신 거 보면 확실히 네 말대로 이번 일이 꽤 중요하긴 한 가봐.”
문곡삼보는 강철민이 아끼는 세 가지 물건이었다.
그 세 가지 물건은 모두 영혼유물(靈魂遺物)이라 불리는 아주 희귀한 것들이었다.
강철민은 이 세 가지 영혼유물을 통해 자신이 지닌 힘을 더욱 강력하게 증폭시킬 수 있었다.
영혼유물 자체가 그와 맹약을 맺은 영혼인 강감찬 장군과 연관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자신과 맹약을 맺은 고대의 영혼과 관련이 있는 영혼유물을 구할 수만 있으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근데 누나 다 좋은데요…….”
“응? 왜?”
“저…… 여권부터 만들어야겠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던 건.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여권이었다.
* * * *
다행히 건은 연희가 급하게 알아봐 준 경계 쪽 사람을 통해 단 12시간 만에 속성으로 여권을 만들 수 있었다.
여권이 발급되는 동안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영혼투기장의 다음 경기 일정을 20일 뒤로 미루고 병일에게도 사정을 설명한 건은 여권이 나오자마자 역시 마찬가지로 연희가 준비해준 유령항공을 이용해 곧바로 중국으로 날아갔다.
철민이 있는 곳은 중국 상해였다.
상해까지 유령항공을 이용해 이동한 후 그곳에 있는 철민을 찾아가 문곡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너무 간단한 일이라 건은 대충 이틀 정도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건은 한국으로 돌아가 20일 뒤로 미뤘던 경기 일정을 다시 최대한 앞으로 당겨볼 생각이었다.
오히려 건을 설레게 한 것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아무리 가까운 상해라고 해도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유가 된다면 하루 정도는 관광해볼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철민에게 문곡삼보를 전해주고 나면 건이 할 일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 정도 관광을 하는 건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저런 설렘을 안고 상해로 날아간 건.
하지만 그의 설렘은 상해에 도착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스으으으.
건을 감싸는 서늘한 기운.
건은 공항에서 벗어나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강제로 경계로 끌어들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건은 심안을 개방하며 주변을 살폈다.
“주변의 기운을 읽어봐.”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방 속에 숨어 있던 백(百)에게 아주 작게 속삭이듯 얘기했다.
‘이거 어째 느낌이 안 좋은걸?’
건은 인상을 찡그리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그 순간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 영수 레이더 백이 건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들이 잔뜩 있어요. 괴물들은 아닌 거 같은데…… 소울러라고 하기엔 또 기운이 너무 약해요. 하여튼 숫자는 아주 많고 완벽하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요.”
백의 말을 들은 건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통혼을 완성했다.
선자불래 래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는 말처럼 좋은 뜻이 있는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강제로 경계를 열고 건을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단 강제로 경계를 열고 끌어들였다는 것 자체가 저들이 결코 좋은 뜻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외국에 처음 나와서 맞이하는 게 이런 불청객들이라니…… 젠장 꼬여도 너무 꼬였네.’
건은 잔뜩 불만이 쌓인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 사람을 초대했으면 한 놈이라도 나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중국에서 한국말로 크게 외치면 그걸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경계 안에서는 달랐다.
경계 안에서 한 말은 말 그 자체가 의지가 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치 번역기를 거쳐서 듣는 것처럼 자신이 가장 잘 쓰는 언어로 바뀌어서 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건은 한국에서 그랬듯이 한국말로 크게 외쳤지만 그걸 듣는 이들은 그 말을 자신들의 언어로 듣게 되었다.
물론 바뀌는 건 순수하게 언어 그 자체일 뿐이었다.
말에 실린 감정이나 특유의 어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스으윽.
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색 옷과 복면을 단체로 맞춰 입은 쓴 한 무리의 복면인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굳이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네가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만 우리에게 넘겨주면 이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복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건을 향해 핵심적인 말만 간단하게 전달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 그게 뭔데?”
건은 일단 시치미를 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네놈이 강철민에게 전해줄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미 확인했으니 시치미는 그만 떼라.”
‘이 새끼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건은 복면인들을 다시 한 번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안 되면 실력행사라도 하겠다는 게냐?”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복면인들은 이미 건을 제압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하아…… 이거 참 중국까지 와서 노상강도를 당하네.”
건은 고개를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빨리 결정을 내려라. 우리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정?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들이…… 어디서 온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난 너희가 주는 벌주를 좀 마셔봐야겠다.”
휘릭.
철컥, 츠츠츠츠.
그 말과 함께 건은 팔목에 차고 있던 태극혼에 혼력을 주입하며 싸우겠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밝혔다.
그 순간 복면인들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모습으로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물건만 가져가면 되니 저놈은 죽여버려라!”
살벌한 명령.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이 들고 있는 총들이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타타타타타탕!
일제사격.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건도 굳이 총탄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츠츠츳.
건은 태극혼에 혼력을 주입해 태극혼패를 만들어냈다.
따다다다당!
일단 급한 대로 가장 화력이 집중된 곳은 태극혼패로 막아내고 나머지 총탄들은 그냥 몸으로 막아냈다.
다행히 입고 있던 옷 안에 강화 전투복을 미리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중간한 총탄들은 강화 전투복의 방어력과 육체에 깃든 금강야차의 힘만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으힉, 주인님. 가방 안으로 총알이 쏟아져요. 뒤쪽 좀 막아주세요.”
“바쁘니까 네가 좀 알아서 피해라.”
백이 비명을 질렀지만, 건은 지금 백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역시 준비를 하고 있었군. 모두 대 소울러 용 장비를 사용해라!”
복면인들의 첫 공격은 건의 준비 상태를 확인하는 탐색용 공격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건이 소울러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가 브론즈급의 헌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위잉, 철컥! 철컥!
우두머리 복면인의 한 마디에 건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복면인들은 대 소울러 용 장비 중 가장 중요한 장비인 ‘소울 슈트(혼갑)’을 장착했다.
‘소울 슈트? 이것들이 준비를 제대로 했구나.’
비록 그들이 입은 소울 슈트는 고급형 소울 슈트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리 성능이 떨어져도 소울 슈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십 명이 소울 슈트를 장착한 상태라면 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브론즈급 헌터라면 우리 쪽으로 치면 겨우 일성(一星) 무인 수준이라는 건데…… 일성 무인을 잡는데 서른 명의 흑객(黑客)이 출동했다면 과분해도 너무 과분한 대우라 할 수 있지. 그러니 영광으로 알고 죽어라.”
“어떤 병신이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냐?”
건은 간단하게 우두머리 복면인의 말을 무시하며 오른발로 강하게 땅바닥을 굴렀다.
꽈광, 쩌저저저저저적!
그러자 강력한 충격파가 지면을 따라 한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파천신력이었다.
건이 노린 쪽은 가장 복면인, 아니 흑객들의 숫자가 적은 쪽이었다.
‘일단은 포위를 벗어나는 게 먼저다.’
건은 흑객들이 준비를 끝내고 자신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이었다.
한편 흑객들을 충격파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자 본능적으로 충격파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두머리 흑객이 크게 소리쳤다.
“피하지 말고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위망을 풀면 안 된다!”
우두머리 흑객의 외침 때문에 충격파를 이용해 길을 뚫으려는 건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쩌저저저저정!
흑객들은 소울 슈트에 내장된 영혼보호막 기능을 이용해 충격파를 간신히 버텨냈다.
물론 충격파에 실린 힘이 적지 않아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적어도 포위망은 유지했다.
‘쳇!’
건은 그 모습을 보며 약간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망까지 하진 않았다.
건은 이미 충격파를 날린 그 순간 충격파를 날린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흑객들은 그런 건을 막기 위해 재빨리 건의 이동 경로로 뛰어들었다.
건은 그런 흑객들을 바라보며 재빨리 태극혼패를 태극혼창으로 바꾸며 자신을 막고 있는 흑객들을 향해 창을 뻗었다.
콰광! 콰드드득!
한 명의 흑객이 건의 태극혼창에 꿰뚫리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쿠쿠쿠쿵!
결과적으로 흑객들은 건의 이동을 막긴 했지만 대신 한 명의 동료를 잃었다.
우드득.
건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흑객의 몸에서 태극혼창을 뽑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주를 주겠다고? 하지만 이거 어쩌지…… 난 벌주보다 혈주(血酒)를 더 좋아하는데?”
바닥에 널브러진 흑객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건의 주변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느껴지는 건의 범상치 않은 기세.
그 순간 우두머리 복면인은 자신이 받은 정보에 뭔가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