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더 소울(The Soul) - 황룡회(黃龍會) [2]
“그래서 결국 실패한 건가?”
사방을 짓누르는 패기(覇氣).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하는 남자.
그는 바로 황룡패왕 주백검이었다.
“죄송합니다. 놈의 실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바람에…….”
“아니야. 며칠 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한국에서 왔다는 그 꼬맹이에겐 별로 관심이 없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꼬맹이의 실력 같은 게 아니라. 운중룡 단천홍이 이번 사냥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못하느냐…… 이것이었어. 그런데 결국 성공을 했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책임 소재를 따져보는 것이겠지?”
주백검은 아주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공을 세운 부하에겐 과할 정도로 보상을 해주었지만 반대로 실수를 한 부하는 냉정한 기준으로 처벌했다.
“죄송합니다.”
그걸 알기에 이번 일을 총괄하던 그의 부하 중 한 명은 굳은 표정으로 바닥에 꿇어앉으며 용서를 빌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사실 원로원에서 금강철벽 강철민에게까지 도움 요청을 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마 그 꼬맹이를 완벽하게 막았다고 해도 강철민이라면 어떤 식으로도 이번 일을 해결했을지 몰라. 그는 그런 남자지.”
주백검은 강자(强者)를 인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강철민의 실력을 아주 후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주백검에게 이 정도로 인정받는 인물은 전 세계적으로 따져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패는 실패. 분명 처벌은 필요하다.”
주백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바닥에 꿇어앉은 남자는 주백검이 죽음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긴장하지 마라니까. 그리 어려운 처벌은 아니야. 어차피 단천홍은 아무리 원로원이 발악해도 절대 차기 회주에 오를 수 없어. 이건 내가 자만하는 게 아니라 명확한 현실이야. 그래서 난 요즘 새로운 생각을 하는 중이야. 단순히 황룡회의 회주가 되는 것을 넘어서…… 그 뒤를 생각하는 중이지.”
“뒤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꿇어앉아 있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주백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이 따분한 평화가 계속되는 걸 바라지 않아. 무림사천? 그건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야. 미래를 만드는 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 과거를 살았던 선대의 조상이 아니잖아? 그래서 난 내 식대로 무림의 하늘들을 개편할 생각이야.”
주백검은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흐린 하늘.
주백검은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던 얘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그걸 위해 난 우선 주변 나라에 심어져 있는 우리의 힘을 좀 더 키울 생각이다. 어차피 이제 경계는 단순히 한 나라의 영역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 그렇단 얘긴 결국 중국 내에서의 영향력만큼이나 중국 밖에서의 영향력도 중요하다는 뜻이지. 그래서 난 이제부터 당분간 회의 국외 영향력을 키울 생각이다.”
“그럼 제 처벌은…….”
“남한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회의 위장세력을 확실하게 키워라. 지원은 충분히 해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앞으로 오 년 동안 그 일을 확실하게 해내면 다시 본토로 널 불러주겠다.”
“관대하신 처벌에 감사드립니다.”
처벌은 주백검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리 크지 않았다.
일종의 지방발령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처벌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단! 만약 이번에도 날 실망하게 하면 그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절대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쿵!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처벌이 관대하다는 얘긴 다음은 그냥 끝이란 뜻이었다.
남자도 그걸 알기에 비장한 목소리로 외친 것이었다.
“그래. 실망은 한 번이면 되는 거야. 애초에 이번 일도 네가 방심하지 않고 직접 나서기만 했다면 별로 어려울 일도 아니었잖아.”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쿵!
남자는 다시 한 머리를 박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주백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지금 주백검 앞에 엎드려 있는 남자는 주백검이 아끼는 부하 중 하나였다.
그는 그 옛날 위, 촉, 오 삼국시대에 조조를 따르던 맹장(猛將) 중 한 명이었던 허저(許褚)와 맹약을 맺은 인물이었다.
그는 호치(虎癡)라 불리던 허저와 아주 유사한 성격과 육체를 타고났기 때문에 말 그대로 허저의 환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조맹덕과 맹약을 맺은 주백검을 따르는 게 참으로 재미있는 현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주백검의 아주 충실한 부하였다.
“이놈아 바닥 부서지겠다. 그만 두들겨라.”
주백검은 장웅(張熊)이 계속 머리로 바닥을 두들기자 바닥이 걱정된다는 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장웅도 주백검의 진심이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주백검은 오래전 조맹덕이 그래했듯이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天下)를 자신의 발밑에 두고 싶었다.
그는 그걸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 * *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진짜 왜 김문수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건가?”
병일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다시 한 번 건을 향해 물었다.
“어차피 언젠간 경험해봐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그대로 상대는 세 마리의 영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소울러인 김문수와 싸우면서 굳이 경험할 필요는 없지 않나.”
“괜찮아요. 상대가 영혼조련사 김문사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놈이 그린필드(Green Field)에서 싸우기 원한 이유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린필드가 무조건 그에게만 유리한 장소는 아니에요.”
“알겠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결국, 병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그린필드는 기본적인 영혼투기장의 경기장인 아이언필드와는 많이 다른 장소였다.
아이언필드는 기껏해야 강철 기둥 몇 개가 있는 게 구조물의 전부였지만 그린필드는 수많은 나무가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린필드는 마치 밀림(密林)을 연상시켰다.
물론 그곳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나무였지만 적어도 재질만큼은 진짜 나무와 거의 똑같았다.
사실 그린필드는 영혼투기장의 주요 고객 중 하나인 ‘관객’들에겐 그리 인기가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형지물이 너무 많다 보니 아무리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고 해도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관객들은 조금 답답하다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그린필드는 아이언필드처럼 대중화된 경기장은 아니었다.
사실 이 그린필드를 선택한 김문수도 설마 건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린필드를 불러놓고 적당히 건과 타협해서 아이언필드의 강철구조물 개수를 몇 개 정도만 늘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건은 김문수의 그린필드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 김문수와 건은 그린필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영혼조련사 김문수…… 아무래도 내가 너에게 배워야 할 게 좀 많을 거 같다.’
건은 천천히 몸을 풀며 그린필드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린필드에서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띠이이, 철컹!
바로 그때 드디어 그린필드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김문수는 상대가 왜 그린필드에서의 대결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기는 것이었다.
김문수가 영혼투기장에서 활동한 기간은 무려 오 년이었다.
그는 건처럼 브론즈 등급의 영혼투기장부터 시작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건처럼 아주 빠르게 등급을 상승시키진 못했다. 그가 골드 등급의 영혼투기장까지 올라오기 위해 걸린 시간은 무려 삼 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승리는 물론이고 패배도 많이 경험했다.
전체 승률은 겨우 57%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린필드에서의 승률은 무려 90%를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그는 그린필드에서의 전투에 자신이 있었다.
“왜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주마.”
그린필드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선 김문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띠이이, 철컹!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입구가 열렸다.
* * * *
영혼투기장의 관객들이 그린필드 경기를 선호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장애물이 너무 많은 그린필드 특성상 초반 교전 자체가 너무 조심스럽게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아이언필드 같은 경우는 극 초반이 지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치고받고 싸우지만, 그린필드는 상당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서로 계속 지루한 탐색전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화끈한 경기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아이언필드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그린필드의 단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콰과광! 콰지직! 쿠쿠쿵!
사정없이 부서지는 나무들.
김문수와 건은 제대로 붙었다.
“크어엉!”
김문수가 부리는 영수 중 하나인 대호는 쓰러지는 나무들을 피하며 곧장 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사이 하늘에선 청빙이 건을 향해 날갯짓하며 얼음 깃털들을 마구 날렸다.
파파파파팟!
하늘과 땅에서 이어지는 연속공격.
아주 매서운 공격이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얼음 깃털은 태극혼패를 머리 위로 들어 막아내고 대호의 공격은 옆으로 몸을 날리며 피했다.
쩌저저저정!
콰과과광!
대호는 다시 한 번 건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린필드의 수많은 나무를 박살 냈고 청빙의 공격은 모조리 태극혼패에 막혔다.
그 사이 김문수는 건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청빙과 대호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대호는 계속 놈을 압박하고 청빙은 공격 패턴을 바꿔보자. 빙익(氷翼) 공격 대신 얼음 숨결 공격으로 놈의 움직임을 제한시키자.’
청빙의 얼음숨결로 움직임을 제한시킬 수만 있다면 대호의 공격이 효과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김문수는 재빨리 청빙의 공격 패턴을 바꿨다.
사실 김문수는 지금 살짝 정신이 없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청빙을 이용해 충분히 건을 괴롭힌 후 상대가 흔들릴 때 대호를 이용해 기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시작부터 완전히 일그러졌다.
단 한 번의 돌진.
엄청난 속도로 그린필드를 꿰뚫고 달려나온 건의 돌진으로 김문수의 계획은 모두 백지화되었다.
건은 마치 그린필드의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작정 모든 장애물을 박살 내며 돌진했다.
덕분에 김문수는 청빙과 대호를 이용해 그런 건을 막기에 급급했다.
‘내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이런 스타일의 소울러가 아니었는데…… 도대체 내가 놓친 게 뭐지?’
김문수는 여전히 계속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건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이번 전투를 준비했지만, 그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이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건이 생각한 경우의 수 중에는 이런 상황이 아주 명확하게 존재했다.
건은 자신을 위협하는 두 마리의 강력한 영수가 있음에도 오로지 김문수만 노리고 있었다.
그가 그러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단순히 마음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의지를 혼력에 담아서 영수들에게 뿌리는군. 확실히 저 방법이 그냥 단순히 마음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좋은 거 같네.’
건은 심안을 풀파워로 전개하며 김문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피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김문수가 영수를 어떻게 부리는지 그걸 자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가 오로지 김문수를 향해 돌진하는 이유도 김문수가 영수들을 조종하는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서였다.
‘좋아, 조금만 더 지켜보면 뭔가 확실한 개념이 설 수 있겠어.’
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파천신력을 두 다리로 방출했다.
꽈광!
또 한 번 돌진하는 건.
적어도 그는 이번 전투에서 영수를 다루는 방법만큼은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