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더 소울(The Soul) - 암굴(暗窟) [2]
“그때 난 그렇게 겨우 한 달을 버티고 거의 반쯤 시체가 되어서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어.”
건은 연희에게 그녀가 암굴에 대한 얘길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삼 년이나 흘렀네. 솔직히 다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어.”
연희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진심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건은 그런 연희의 표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끔찍했던 거예요?”
“흐음…… 그걸 말로 설명하려면 무슨 표현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 굳이 예를 들자면 남자들이 종종 군대 다시 가라고 하면 자살한다고 하잖아? 대충 그거에 열 배 정도로 다시 가기 싫은 마음? 그나마 삼 년이나 지났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거지 막 암굴에서 살아 돌아왔을 땐 그와 관련된 얘기는 물론이고 아예 암굴에 대해 단 일 초도 생각하는 게 싫을 정도였어.”
“……어마어마하군요.”
“그곳에 가면 네가 무엇을 상상하던지 그 이상을 볼 수 있을 거야.”
“크음…… 이미 내뱉은 말이라 주워담을 수도 없고 죽겠네요. 사장님은 내가 다시 생각해본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절 기절시켜서 암굴에 던져 넣으시겠죠?”
“에이, 아무리 사장님이라도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안 해. 대신 암굴에 가지 않을 걸 후회할 정도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널 괴롭히겠지. 그래서 결국 네가 제 발로 암굴로 들어가게 할 거야.”
“그, 그게 더 무서운데요?”
“그러니까 왜 함부로 말을 내뱉어. 하다못해 그 말을 사장님이 아닌 나에게만 했어도 되돌릴 기회가 있었을 거 아냐.”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젠 살아 돌아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해. 아무리 무식할 정도로 적응이 빠른 너라고 해도 아무 준비 없이 암굴에 갔다간 그냥 끝장날 수가 있어.”
“네, 누나가 좀 잘 알려주세요. 저도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준비를 해서…… 꼭 살아 돌아오도록 노력할게요.”
“그래야지. 일단 암굴에서 가장 첫 번째로 필요한 건…… 물과 음식이야.”
“네? 물과 음식이요?”
“암굴에 존재하는 건 그 어떤 것도 먹어선 안 돼. 암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심각할 정도로 많은 양의 마이너스 에너지가 쌓여 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해 보이는 물이라고 할지라도 마시는 순간 아주 위험해질 수 있거든.”
“아…….”
“그러니까 전에 우리가 유적에 갈 때 가져갔던 압축식량하고 고농축 물을 최소 삼 개월 분량 정도는 챙겨가야 할 거야.”
“삼 개월이요? 누나도 한 달밖에 못 겼는데 제가 삼 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요?”
“바보야. 삼 개월을 버틸 수 있어서 삼 개월 분량을 가져가는 게 아니야. 암굴은 들어갈 땐 아무런 제약도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나올 땐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어. 암굴을 빠져나오려면 ‘암혈(暗穴)’이라 부르는 구멍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거든. 실제로 나도 들어가서 딱 일주일 만에 여긴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암혈을 찾아 돌아다녔었어. 당시 난 삼 주를 헤매고 나서야 겨우 암혈을 찾을 수 있었지. 만약 암혈을 며칠만 늦게 찾았으면 아마 난 영영 암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만약을 위해 삼 개월 분량을 챙기는 것이군요.”
“그래, 최소한 암굴을 찾다가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할 거 아냐.”
연희의 말을 들은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암괴나 혼마에게 당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물과 음식이 모자라 굶어서 죽는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물과 식량 다음은 당연히 장비야. 무조건 장비는 최고급으로 준비해. 그 너랑 친한 블랙 마이더스한테 얘기해서 가장 가벼우면서 동시에 가장 내구성이 좋은 장비들로 준비해달라고 해. 그나마 난 공혼도문(空魂道門) 능력 덕분에 장비에 대한 부담은 적은 편이었어.”
“흐음, 저에게도 이 녀석이 있습니다.”
건은 자신의 오른팔을 가볍게 치며 얘기했다.
“그래도 모르니까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준비해가. 나도 광혼탄(光魂彈)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것도 가져가.”
“반혼탄(半魂彈)이 아니라 광혼탄을 주시려고요?”
“공짜로 주는 거 아니야. 나중에 갚아. 그리고 암굴에선 반혼탄이 전혀 먹히질 않아. 최소 광혼탄 정도는 되어야 녀석들에게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어.”
“역시 뭐 하나 평범한 게 없군요.”
“암굴이 괜히 현세지옥(現世地獄)이라 불리는 게 아니야.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마음을 아주 단단하게 먹어야 할 거야.”
“네, 계속 스스로 세뇌를 걸고 있어요.”
“그래, 세뇌라도 걸어라. 거긴 진짜 제정신으로 갈만한 곳은 아니다.”
“크으, 누나 이제 겁은 그만 줘요.”
“겁주는 게 아니라 아직도 난 거길 생각하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래.”
“하지만 전 살아 돌아올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너라면…… 왠지 살아서 돌아오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그냥 진짜 내 느낌이 그래…… 아무 이유 없이 너라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돼.”
“하하하, 좋아요. 누나. 조금 전 그 말만 기억할게요. 암굴에 갔다 돌아오면 누나가 해준 고마운 말에 대해 보답을 하도록 하죠.”
“꼭 그렇게 해라.”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가는 것만으로 무조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암굴.
건은 그 암굴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강제로 한 번 더 성장시킬 작정이었다.
물론 이건 굉장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건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더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노리는 그들.
백련김가의 수작으로부터 안전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강해지는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이번 암굴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생각이었다.
다만…… 이 도전을 실패하게 되면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건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살 떨리는 부분이었다.
건은 연희의 조언을 바탕으로 일주일 동안 암굴행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물과 식량은 삼 개월 분량을 조금 넘어서는 수준으로 준비했고 장비 역시 병일의 도움을 받아 암굴행에 최적화된 수많은 장비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밖에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모두 준비하자 건의 짐은 생각보다 꽤 많아졌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강화 전투복을 입은 상태에서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멘 수준에서 정리가 끝났다.
그 배낭조차 블랙 마이더스 병일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혼투기장에는 수련을 위해 삼 개월 동안 쉬겠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영혼투기장에서 활약하는 소울러들은 종종 이렇게 수련을 위해 쉬는 경우가 많았고 더욱이 건은 그동안 심할 정도로 많은 경기를 소화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영혼투기장에서도 흔쾌히 삼 개월 휴식을 허락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공암굴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연희가 데려다 주겠다는 것도 만류하고 걸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건이라면 반나절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고 그는 그곳으로 걸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스으으으으.
마니산 정상.
건은 이미 경계의 선을 넘어서 보통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마니산의 또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아직 암굴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암굴은 지금 건이 바라보고 있는 어두컴컴한 구멍 속에 존재했다.
소울러들이 암굴을 찾는 경우는 매우 다양했다.
어떤 이는 건처럼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찾았고 또 어떤 이는 암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괴물을 사냥해 큰돈을 벌려고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순수한 탐험 정신으로 암굴을 찾기도 했다.
이렇게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암굴을 찾아왔지만 암굴에 들어가 맞이하게 될 현실은 모두 같았다.
“후우…….”
건은 크게 숨을 내쉰 후 천천히 암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세지옥이라 불릴 만큼 지독한 곳.
하지만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확실히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곳.
건은 이번 모험을 통해 초짜 소울러 딱지를 떼고 진정한 한 명의 소울러로 다시 태어날 생각이었다.
‘설사 이곳이 진짜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스르륵.
건은 망설이지 않고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난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약속이었다.
자기 자신과 한 굳은 약속.
건은 기필코 이 약속을 지킬 작정이었다.
* * * *
“나에게 의뢰를 하러 왔다는 건 내가 무엇을 대가로 받는지 알고 왔다는 뜻이겠지?”
스으으으.
살기(殺氣)? 아니, 이것은 살기라기보단 아주 진한 죽음의 향기(香氣) 같은 느낌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그 죽음의 향기는 김솔의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크음…….”
김솔은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색 액체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대충은…… 알고 왔습니다.”
김솔은 이마를 타고 턱까지 흘러내려 온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시간 낭비는 하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누굴 죽이고 싶나?”
붉은 액체 속의 남자.
그는 바로 혈룡이었다.
대한민국 삼대 암살자(暗殺者) 중 한 명인 그의 악명은 소울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녀석에 대한 정보는 여기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김솔은 조용히 미리 준비해온 USB 메모리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보는 그걸로 된다고 치더라도 대충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지 대가를 얼마나 받을지 결정할 거 아냐. 어떤 놈이야?”
“영혼투기장에서 활동하는 브론즈급 헌터입니다.”
“브론즈급 헌터? 겨우 브론즈급 헌터를 죽이려고 날 찾아왔다고? 만약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는 있지?”
혈룡은 인상을 잔뜩 굳히며 김솔을 노려보았다.
단순히 노려보았을 뿐인데 어느새 사방에 진동하던 죽음의 향기가 유형의 기운이 되어 김솔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브, 브론즈급 헌터지만 실력은 브론즈급이 아닙니다. 놈은 얼마전 영혼투기장의 삼대패왕 중 하나인 영혼백정 방기운을 이겼습니다.”
“호오…… 영혼백정 방기운을 브론즈급 헌터가 이겼다고? 이거 참 재미있네.”
김솔의 얘길 들은 혈룡은 흥미롭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김솔을 억누르던 기운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정확한 예상은 할 수 없지만, 최소 골드 등급의 헌터정도는 되는 걸로 보입니다.”
“영혼백정을 이겼다면 골드 등급에서도 거의 최상급이지. 잘하면 플래티넘 등급도 될 수 있겠는데? 이거…… 생각보다 좀 비쌀 거 같은데…….”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 건가요?”
“최소 사십 리터는 돼야겠어.”
“그, 그건 너무 많습니다.”
“많긴 최소 골드 등급, 어쩜 플래티넘 등급일지도 모르는 헌터를 죽이는 거야.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줄 알아?”
“하지만…….”
“뭐, 정 그게 부담되면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어.”
“간단하게 끝을 낸다는 게 무슨 말이십니까?”
“사십 리터 대신에 한 명으로 끝내자는 얘기야.”
“한 명이라면…… 설마…….”
“그래 살아 있는 소울러 한 명. 맹약은 맺지 않았어도 되는데 대신 좀 어려야 해. 사실 이쪽이 더 쉬울걸? 말이 사십 리터지 영혈(靈血)을 그 정도 모으려면 성인 소울러 백 명에게 위험을 각오하고 영혈 채취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까딱 잘못하면 영구적으로 혼력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는데 누가 쉽게 영혈을 내주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 말대로 한 명으로 끝내는 게 편할 거야.”
“크음…….”
혈룡의 말을 들은 김솔을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이번 의뢰의 대가로 대략 영혈 십 리터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다소 무리일지라도 백련김가의 소울러들을 전부 동원하면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면 그냥 사십 리터를 맞춰 주던지……. 영혈 채취에 들어가는 영혼의 조각만 해도 굉장히 부담될 텐데…… 굳이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영혈을 뽑아주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혈룡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순수하게 손익계산만 따지면 무조건 영혈보다 사람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다만 문제는…… 도의적인 부분이었다.
아무리 백련김가가 바닥까지 추락했다고 해도 지금 혈룡이 제시한 대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줄 정도로 타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가문을 위해서는 내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고민을 계속하던 김솔을 이를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보겠습니다.”
김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크, 아주 좋은 선택이야. 아마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촤아아아.
김솔의 대답을 들은 혈룡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담그고 있던 붉은색 액체가 바로 물에 영혈과 각종 비약(秘藥)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의뢰를 받겠다. 너희가 원하는 죽음. 그것을 내가 가져다주마.”
자신 있는 표정으로 얘기하는 혈룡.
전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몸은 한눈에 봐도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언저리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하나의 흔적.
분명 문신은 아닌 것 같은데 교묘하게 용과 닮은 모습을 닮아 있는 그것은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