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더 소울(The Soul) - 천왕(天王)의 보고(寶庫) [2]
* * * *
애초에 건은 오방의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삼족오의 인장을 통해 천왕의 보고까지는 자연스럽게 올 수 있었지만, 최종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오방의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천왕의 보고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오방의 시련을 만든 이는 치우천왕이 아니었다.
그것은 치우천왕만큼이나 유명한 고대 중국의 영웅인 황제(黃帝)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황제는 치우천왕의 힘을 두려워해 천왕의 영혼을 자신과 함께 천하(天下)의 다섯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네 명의 제왕(帝王)들과 힘을 합쳐서 봉인했다.
그 봉인이 바로 오방의 시련이었다.
오방의 시련을 통과한다는 얘기는 곧 봉인을 풀고 천왕의 영혼을 해방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방의 시련 자체가 워낙 강력한 봉인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봉인을 해제하지 못했다.
청제의 시련으로 시작된 오방의 시련.
건은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것에 휘말렸다.
물론 만약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건이 책임져야 할 충격은 통과하고 얻을 수 있는 보상만큼이나 컸다.
그 얘긴 죽기 싫으면 오방의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드드드드득!
건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두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아주 강력한 냉기(冷氣)를 느끼며 재빨리 두 다리를 움직였다.
콰지지직!
어느새 냉기는 그의 두 다리를 얼려놓았지만, 건은 힘으로 그 속박에서 벗어났다.
건은 벌써 16시간째 거대한 얼음 폭풍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젠장…… 조금만 방심하면 통째로 얼려버리려고 하는구나.’
건은 16시간 동안 얼음 폭풍 속에서 버티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냉기가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바로 청제였던 거야.’
건은 자신이 청제의 시련을 겪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얼음 폭풍을 견뎌내면 청제의 시련을 통과할 줄 알고 버티는 쪽에 초점을 맞췄었다.
하지만 이젠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청제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런데 형체도 존재하지 않는 냉기를 어떻게 쓰러트리지? 방법이 없잖아?’
건은 벌써 4시간이 넘게 이 문제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놈을 끌어내야 한다.’
휘이이이이이이이잉.
건은 자신을 휘감는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파팟!
실제로 그 바람 속에 숨겨져 있던 작고 날카로운 얼음조각은 건의 몸에 꾸준히 상처를 내고 있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
건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대로 아주 조금씩 지쳐가는 것보다는 아예 한 방에 승부를 결정 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청제여…… 너에게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내어주마.’
결단을 내린 건은 금강의와 묵룡갑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주 천천히 냉기가 자신의 몸을 휘감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뒀다.
그러자 냉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건의 몸을 휘감았다.
놈은 마치 건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정작 건은 그런 놈의 의도를 모두 읽고 있었다.
그럼에도 냉기가 자신의 몸을 야금야금 휘감는 걸 가만히 놔두었다.
오히려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주었다.
건이 청제에게 내준 미끼는 바로 자신의 몸 전체였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청제는 거미가 먹잇감을 거미줄로 휘감듯 냉기를 이용해 건을 완전히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건의 몸을 휘감은 냉기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자 청제는 망설이지 않고 그 냉기를 일순간에 폭발시켰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적!
건의 몸을 휘감고 있던 미약한 냉기는 한순간에 주변의 냉기를 모두 끌어당기며 건의 전신을 꽁꽁 얼려버렸다.
불과 1초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연히 건은 냉기의 폭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커다란 얼음덩어리 안에 갇혀버렸다.
청제가 노린 게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건의 모든 게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 얼음덩어리가 부서지거나 녹지 않는 이상 건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츠츠츠츠츳.
바로 그 순간 얼음덩어리 주변에 온 사방의 냉기가 모두 모여들며 일정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드득!
모여든 냉기들은 순식간에 한 명의 커다란 얼음 거인이 되었다.
이 얼음 거인이 바로 청제였다.
그는 워낙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건을 얼음덩어리에 가둬버린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오방의 시련을 견디려고 했던 것인가? 천왕의 후예들은 오히려 퇴보한 것 같군.]
청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천왕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왕의 영혼을 꽁꽁 봉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끝을 내야겠군.]
그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간단했다.
몸을 숨긴 상태로 냉기만으로 건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을 제거하려면 무조건 실체화를 통해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해야 했다.
하지만 함부로 실체화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실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건의 힘을 빼놓을 생각이었다.
원래는 최대 한 달 정도는 건을 괴롭혀서 힘을 빼놓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건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자신의 함정에 빠져줘서 그 시간이 대폭 줄어들 수 있었다.
스으윽, 츠츠츠츠!
청제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오른손이 날카로운 고드름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깔끔하게 얼어붙어 있는 심장을 산산 조각내주마. 아마 그러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죽게 될 것이다.]
청제는 마치 인심이라도 쓴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르르륵!
청제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고드름 모양의 오른손을 얼음덩어리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그것은 마치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얼음덩어리를 파고들었다.
이대로 고드름 모양의 오른손이 건의 심장을 꿰뚫면 모든 게 끝이 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건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건의 눈빛이 달라졌다.
번쩍!
그와 함께 건의 전신에서 혼강편(魂罡片)이 쏟아져 나왔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손톱만 한 수천 개의 혼강편이 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가자 당연히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얼음덩어리는 산산이 조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청제의 오른팔도 혼강편의 폭풍에 휘말리며 박살 났다.
그 순간 청제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곤 곧바로 다시 실체화를 풀고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청제가 실체화를 푸는 것보다 더 빠른 게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얼음덩어리를 박살 내는 것과 동시에 건의 오른손에서 뻗어 나간 파천벽력섬(破天霹靂閃)이었다.
번쩍, 콰드드득!
파천벽력섬은 정확하게 청제의 머리를 꿰뚫었다.
[크억!]
그 한방 때문에 청제는 실체화를 해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한 방으로 쓰러질 청제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실체화를 해제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츠리릿!
잠깐이었고 거기다 금강의와 흑룡갑이라는 이중 보호 장치 때문에 큰 데미지를 입진 않았지만 분명 건은 전신에 동상을 입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을 부상이었지만 건은 고통을 꾹 참으며 오른손을 옆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한 자루의 워해머(War Hammer)가 튀어나왔다.
그는 파천벽력섬으로 청제의 의도를 간단하게 방해한 후 곧장 흑룡아를 커다란 워해머로 변형시키며 청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고로 얼음 깨는 데에는 이게 최고지!’
곡괭이와 워해머가 얼음 깨는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군대에서 제설 작업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건 역시 제설 작업이라면 이가 갈리도록 해본 사람이었다.
꽈광! 콰지지직!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건은 달려가는 탄력을 그대로 살려 워해머를 휘둘렀고 그것은 청제의 어깨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 순간 청제의 몸에 커다란 균열이 만들어졌다.
혼강이 가득 실린 워해머는 청제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이놈!!]
청제는 크게 분노하며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걸 일순간에 얼려버리는 냉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건은 유일하게 얼어붙지 않았다.
이미 건은 금강의(호신강기)와 묵룡갑을 이용해 냉기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보호하는 요령을 터득한 상태였다.
여기에 건이 가진 비장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는 염화견두(炎火犬頭)의 기운이 합쳐지자 건은 청제가 내뿜는 엄청난 냉기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몇 겹으로 몸을 보호해도 견딜 수 있는 한계는 겨우 10초 정도뿐이었지만 지금 건에게 10초는 너무나도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꽈과광! 콰지지지직!
건은 자신을 사로잡는 냉기를 떨쳐내고 다시 한 번 워해머를 휘둘렀다.
워해머는 정확히 청제의 턱에 꽂혔고 청제는 턱이 박살 나버리며 몸 전체를 마구 휘청였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주변에 내뿜은 엄청난 냉기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냉기는 절대 건을 얼어붙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어붙지 않는 건은 끊임없이 워해머로 청제를 두들길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청제와 건의 싸움은 너무나 일방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청제는 건이 들고 있는 흑룡아(워해머)에 산산이 부서졌다.
* * * *
청제의 시련이 끝나자마자 건은 다시 하얀 섬광에 휩싸였다. 그 순간 건은 백제의 시련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제의 시련은 청제의 시련과는 달랐다.
일단 백제는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직접 건을 공격했다.
당연히 건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전투가 훨씬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실체화된 백제가 빛으로 이루어진 신기루 같은 몸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전투본능과 심안을 통해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감(感)을 지니고 있는 건이었지만 백제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환영(幻影)은 좀처럼 구분해내질 못했다.
그만큼 백제의 환영이 완벽하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건의 공격은 대부분 빗나가게 되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도 맞추지 못하면 말짱 꽝이었기 때문에 건은 일단 백제의 환영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전투본능과 심안을 동원해도 환영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애초에 특히나 이곳은 백제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더욱 건은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백제는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도 하지 않고 건을 상당히 지치게 하였다.
이대로 시간이 계속 흘러가면 당연히 건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건은 이번에도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몇 시간이 더 흐른 어느 순간.
건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건이 찾은 해결책은 놀랍게도 ‘군림언(君臨言)’이었다.
백제의 환영은 완벽했지만 딱 한 가지 틈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군림언이 환영에게 먹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백제의 본체에는 군림언이 먹히지 않았지만 환영에겐 아주 잘 먹혔다.
그 결과 건은 너무나도 쉽게 백제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환영의 능력을 잃은 백제는 굉장히 무력해졌다.
사실상 이 환영의 능력이야말로 백제의 모든 것이었는데 그것을 봉쇄당하자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일방적으로 건에게 밀렸다.
그렇게 군림언이라는 해결책은 찾은 건은 그걸 찾고 딱 삼십 분 만에 백제를 쓰러트리고 백제의 시련을 통과했다.
이로써 두 번째 시련까지 통과한 건.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세 가지 시련이 남아 있었고 겨우 두 가지 시련을 통과하는데도 건은 상당히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였다.
천왕의 영혼을 봉인하고 있는 오방의 시련.
그것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혹독한 시련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