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더 소울(The Soul) - 황제(黃帝) [1]
@ 치우천왕.
백제의 시련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적제의 시련은 건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련이었다.
청제와 정반대로 이번엔 건의 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아주 강력한 열기가 그를 휘감았다.
청제가 얼음 폭풍을 일으켰다면 적제는 화염 폭풍을 일으켰다.
만약 다른 소울러가 이 시련을 경험했다면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쓰러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혼력으로 열기를 차단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또한, 적제는 단순히 열기만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놈이 만들어낸 마치 토네이도와 같은 화염으로 만들어진 회오리가 끊임없이 생겨나며 계속해서 건을 향해 쏟아졌다.
지금 이곳의 온도는 거의 섭씨 4,000도 이상이었다.
이 정도 온도라면 강철도 순식간에 녹아버릴 수 있는 그런 온도였다.
건은 이러한 어마어마한 열기를 견디며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염 회오리들도 막아내고 있었다.
진짜 너무나도 지독한 열기와 화염이었다.
그런데 건은 생각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다.
소울마스터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환경에서 건이 이토록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묵룡갑과 오행수련술 덕분이었다.
지옥의 불길에서 만들어진 묵룡갑은 여러 속성 중 특히나 불의 기운에 강력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건은 묵룡갑을 입은 것만으로도 이곳의 열기 중 절반 이상을 흩어버릴 수 있었다.
거기에 건이 꾸준히 수련한 오행수련술의 능력이 합쳐져 건이 4,000도가 넘는 대단한 열기를 꽤 능숙하게 버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콰과광! 콰과과광!
건은 흑룡아(쌍검)를 양손에 나눠 들고 가볍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화염 덩어리들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아주 커다란 화염의 벽을 바라보았다.
모든 화염은 그 벽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화염의 벽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염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까이 접근하는 게 힘들 정도였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건은 그것이 바로 적제의 본체라고 생각했다.
화염의 벽만 사라진다면 사방을 휩쓸고 있는 화염 폭풍과 열기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츠리리릿!
건은 흑룡아를 커다란 활 모양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곤 계속 적제의 공격을 피하며 화염의 벽을 향해 혼력으로 만든 혼강시(魂罡矢)를 날렸다.
피융! 콰과광!
그렇게 혼강시가 한발, 한발 화염의 벽에 꽂힐 때마다 화염의 벽이 내뿜는 열기가 아주 조금씩 낮아졌다.
워낙 미세한 변화라 그걸 눈치챘을 땐 거의 100발이 넘는 혼강시를 화염의 벽에 적중시킨 후였다,
건은 그 결과를 통해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시간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막대한 열기는 건에게 그다지 큰 타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적제가 아닌 건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적제 입장에서 뭔가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굳이 하나를 찾는다면 화염의 벽을 거두고 모든 불의 기운을 한 점으로 모아 직접 건과 싸우는 것이었는데 그건 오히려 적제가 건에게 기회를 내주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적제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이 방법으로 건을 쓰러트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촤아아, 퍼퍼퍼퍼펑!
건에게서 쏟아져 나온 수백의 묵룡기마대(墨龍騎馬隊)는 마지막 발악을 하던 화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마뱀을 그대로 짓밟고 지나갔다.
적제는 계속된 건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모든 불의 기운을 끌어모아 거대한 붉은 용의 모습을 한 본체를 드러냈다.
물론 건이 보기엔 그저 커다란 붉은 도마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적제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건은 적제가 본체를 드러내자 더 손쉽게 놈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일단 건이 가진 불에 대한 저항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적제 입장에서는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적제는 건이 최후의 일격으로 선택한 묵룡기마대에 갈기갈기 찢기며 바닥에 쓰러졌고 묵룡기마대는 쓰러진 적제를 잘근잘근 짓밟으며 확실하게 놈을 소멸시켰다.
이제 건의 묵룡기마대는 하나의 군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들은 건의 명령에 따라 적을 섬멸하는 불멸의 병사들이었다.
적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는 묵룡기마대의 돌진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걸로 건은 적제의 시련도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것은 흑제와 황제의 시험뿐이었다.
다섯 개 중 세 개의 시련을 통과했으니 이제 오방의 시련을 통과하는 것은 금방일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큰 착각이었다.
적제의 시련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 흑제의 시련.
그 시련은 앞선 세 시련과는 전혀 다른 시련이었다.
* * * *
완벽한 어둠.
어지간한 어둠은 아무렇지도 않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닌 건이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심안을 발동시켜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어둠이 차단한 것은 단순히 시각뿐만이 아니었다.
어둠은 흔히 오감(五感)이 부르는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어둠, 아니 흑제는 그렇게 어둠을 통해 건의 감각들을 모두 차단한 후 아주 천천히 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놈이 특별한 공격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완벽한 어둠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공격까지 하는 것은 흑제라고 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놈은 어둠 자체를 날카로운 창처럼 만들어서 은밀하게 건을 공격했다.
공격은 전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확실하게 건의 몸을 꿰뚫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감을 차단당했음에도 건이 그 공격을 대부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감은 차단당했지만, 육감(六感)이라 불리는 미지의 감각이 아직 건에게 남아 있었다.
건은 그 감각을 의지해 흑제의 은밀한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흑제의 공격이 워낙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건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금강의와 흑룡갑으로 최대한 피해를 줄였지만 그럼에도 어둠의 창은 교묘하게 그 두 가지 방어 수단을 뚫고 들어와 건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적제와의 싸움에서는 시간이 건의 편이었지만 흑제와의 싸움에서는 반대로 시간은 흑제의 편이었다.
흑제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건에게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건은 전방위로 공격을 날리며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여기저기로 공격을 날려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모든 공격은 어둠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어떤 원리로 공격이 흡수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선 마구잡이로 공격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이 공간은 마치 블랙홀과 비슷했다.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흡수해버리는 블랙홀…… 건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은 그것과 유사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최대한 방어적으로 버텨야 한다.’
건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버티는 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기저기로 시험 삼아 날려보던 공격도 멈추고 오로지 버티는 데에만 집중했다.
물론 그와 함께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48시간.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냥 멀쩡히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을 시간 동안 건은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어둠의 창을 내뻗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현재 건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나마 온 신경을 버티는 데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버틸 수는 있었지만 이미 그의 몸에는 수백 개의 상처가 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대단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모든 걸 포기하고 쓰러졌을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건은 이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파팟!
“크윽.”
마지막 순간에 건이 몸을 비튼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어둠의 창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몸을 비틀어 피하지 않았으면 오른쪽 옆구리에 구멍이 하나 추가될 뻔했다.
‘젠장……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 이젠 진짜 점점 더 피하는 게 어려워진다.’
청제와 백제 그리고 적제를 상대하며 어느 정도 힘을 소모한 것은 맞았지만 그래도 흑제의 시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제의 시련을 꼬박 이틀 동안 겪으면서 건의 몸 상태는 매우 안 좋아졌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하루 정도 더 버티는 걸로 끝이다.’
건은 자신이 버틸 수 있는 맥시멈 시간을 하루 정도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하루를 더 버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는 점이다.’
건은 자신이 버틸 만큼 버텼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버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사실 건은 버티기 시작한 지 대략 4~5시간 만에 흑제를 상대할 방법을 찾았었다.
더 정확히는 흑제의 빈틈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그 뒤로 40시간이 넘는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가 이렇게 끈질기게 버틴 이유는 흑제의 빈틈이 좀 더 확실해지길 기다린 것이었다.
건은 흑제가 만든 어둠의 창이 자신의 몸을 꿰뚫을 때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건은 확실하게 흑제의 본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흑제의 빈틈이었다.
역시나 흑제의 본체는 어둠 속에 존재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아무리 건이 여기저기로 날려도 아주 작은 흑제의 본체를 맞출 순 없었다.
어쨌든 건은 흑제의 본체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시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 빈틈을 공격하는 것은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흑제가 조금 더 방심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건은 최대한 흑제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공격만 맞아주었다.
그 과정에서 건은 어둠의 창이 자신을 몸을 꿰뚫는 그 순간 느껴지는 흑제의 본체에 대한 감각을 꾸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그 감각을 쌓고 또 쌓은 결과 이제는 공격을 맞는 그 순간 몇 초 정도는 확실하게 흑제의 본체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몇 초라는 시간은 상당히 짧은 시간일 수도 있었지만 건에게는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최초로 건이 흑제의 본체를 느꼈을 때는 거의 0.001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걸 이틀 동안 꾸준히 감각을 계속 겹치고 또 겹쳐서 몇 초로 만든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서 더 몸 상태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독(毒)이 될 뿐이다.’
지금이 가장 적절한 순간이라고 느낀 건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흑제를 향한 반격을 준비했다.
“……어둠이여. 이젠 끝장을 보자.”
파아아아앗!
건은 작게 중얼거리며 ‘무신혼-파천황(破天荒)’의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검은색 날개 모양의 기운이 솟구치며 그의 전신에 무신(武神)의 힘이 깃들었다.
하지만 흑제는 이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놈은 건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완벽한 어둠 속에서는 절대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맞출 수 없다면 그 공격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흑제는 무신혼-파천황을 통해 무신의 힘을 모조리 끌어올린 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압!”
파지지지직!
실제로 건의 양손에서 내뿜어진 파천벽력파는 아주 강력했지만 역시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확히는 어둠이 만들어놓은 공간왜곡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똑같았다.
파천황의 힘으로도 어둠을 뚫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흑제는 건이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대로 계속 건이 힘을 낭비하게만 만들면 모든 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스으으으.
그리고 그 순간에도 흑제는 계속해서 어둠이 창을 만들어냈다.
건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공격을 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의 창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더욱 컸다.
푸우욱!
역시나 어둠의 창은 건의 오른쪽 다리를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건의 몸을 꿰뚫었던 어둠의 창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그런 수많은 경우 중 한 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흑제의 생각일 뿐이었다.
흑제에겐 앞선 수많은 공격과 똑같은 별거 아닌 공격이었지만 건에게는 참고 또 참으면서 기다렸던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번쩍!
어둠의 창이 자신의 오른 다리를 꿰뚫는 그 순간 건은 확실하게 흑제의 본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그 순간 이미 그의 손에서는 한 줄기의 섬광이 뻗어 나갔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는 공격.
파천벽력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