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더 소울(The Soul) - 그 후……. [2]
* * * *
삼국연합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마왕급 혼마들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본 지역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을 못하는 중이었다.
전진은 고사하고 오히려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왕급 혼마가 쉴 새 없이 그들 앞에 등장했기 때문에 그걸 상대하다가 너무나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아무리 마왕급 혼마가 강하다고 해도 삼국연합의 소울러들 정도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왕급 혼마가 떼를 이루어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마왕급 혼마들은 세 마리에서 네 마리씩 무리를 지어 끊임없이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삼국연합이라고 해도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힘겨운 정도가 아니라 나중엔 마왕급 혼마에게 쫓겨서 천본 밖으로 밀려나기까지 했다.
삼국연합 입장에서는 참담한 결과였지만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혼마 러쉬를 버텨낼 수는 없었다.
물론 이 혼마 러쉬를 만들어낸 이는 당연히 건이었다.
그는 천본 지역의 마왕급 혼마들을 박박 긁어모아서 계속 삼국연합 앞에 던져놓았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왕급 혼마들은 이제 건에게 크게 힘든 상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놈들이 성질을 잔뜩 긁은 후 치우의 창고를 열고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면 끝이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쓸어 담아서 천본에서 더 이상 마왕급 혼마를 찾는 게 어려워졌을 정도였다.
조금 지겨운 단순반복 작업이긴 했었지만, 건은 열흘 동안 꾹 참고 그 지루한 작업을 계속했다.
결국, 건은 신의 흔적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삼국연합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누구도 신의 흔적이 이렇게 허무하게 닫혀버릴 것이라곤 예상하질 못했다.
당연히 소울러들은 신의 흔적이 갑자기 닫혀버린 이유가 천본으로 진입했던 두 연합 세력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누가 어떤 것을 차지했는지는 몰랐지만, 신의 흔적이 닫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 1등급 영혼보물을 차지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중 미국과 유럽 연합은 감당할 수 없는 강한 마제급 혼마를 만나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는 정보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남은 것은 삼국연합뿐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이 세 나라 중 하나가 1등급 영혼보물을 차지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세 나라가 모종의 합의를 통해 나눠 가졌을 수도 있었다.
뭐가 됐건 중요한 것은 삼국연합이 1등급 영혼보물을 차지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물론 그걸 정확하게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때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 법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확인할 수 없기에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가장 억울해진 것은 삼국연합의 소울러들이었다.
그들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그나마 얻었던 영혼보물이나 여러 조각, 파편들도 모조리 잃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1등급 영혼보물을 차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누명(?)까지 쓰게 되자 더욱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아니라고 얘기해도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의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이 숨긴 1등급 영혼보물을 강탈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삼국연합의 소울러들은 어쩔 수 없이 각각 자시들의 본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들이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하자 소울러들은 더욱더 그들이 뭔가 중요한 걸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정말 지독한 악순환이라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경계의 세상에는 삼국연합이 1등급 영혼보물을 취한 게 거의 확실한 사실처럼 굳어져 버렸다.
건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였다.
그 누구도 설마 1등급 영혼보물을 한 명의 소울러가 혼자 독차지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질 못했다.
애초에 천원도 아니고 천본 지역은 어지간한 소울러들이 연합을 해도 뚫기가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을 혼자 그것도 가장 먼저 뚫고 들어간 인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 범죄라 할 수 있었다.
* * * *
2차 세계대전 이후 백 년 만에 다시 나타났던 신의 흔적은 다소 허무하게 사라졌다.
삼국연합은 여전히 수많은 소울러들에게 그곳에서 얻은 1등급 영혼보물이 뭔지 공개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반복해서 얘기했지만 아무도 그걸 믿어주질 않았다.
심지어 그들 나라에서조차 신의 흔적에 들어갔던 소울러들이 영혼보물들을 독식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경계의 세상은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추가로 1등급 영혼보물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소울러들이 신의 흔적에서 가지고 나온 다수의 영혼보물이 확인되면서 그 영혼보물을 정당한 값을 치르고 사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입국했다.
이번에 나타난 신의 흔적에서 가장 많은 영혼보물을 얻은 나라는 한국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건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삼국연합의 영혼보물을 깡그리 털어버리면서 발생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에 신의 흔적에서 발견된 영혼보물을 얻으려면 한국으로 오는 게 가장 좋았다.
“일성그룹이요?”
설거지를 하고 있던 건은 연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한 명의 소울러로서는 정말 아득한 높이의 경지까지 오른 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에서 특별히 바뀐 부분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카페헤븐의 직원이었고 실력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브론즈 등급의 헌터였다.
“응, 그쪽에서 신의 흔적에 들어갔었던 모든 헌터를 초청해서 정식으로 영혼보물 경매를 진행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젠 그녀도 신의 흔적에서 얻은 충격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상태였다. 물론 건은 여전히 그녀에게 휴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모든 카페의 일을 자신이 하고 있었다.
“원래 일성 그룹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적진 않았지. 일성 그룹이 독점으로 거래하는 최상위권 헌터들도 꽤 많았어. 애초에 지금의 일성 그룹이 있었던 이유가 경계의 세상 덕분이었잖아.”
“아, 그건 예전에 누나한테 들은 것 같아요, 거기 초대 회장인 조건희였던가? 그 사람이 소울마스터라고 했었죠?”
“맞아. 조건희는 아주 유명한 소울마스터야.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명예회장 자리로 물러나 있지만, 실제론 너무 건강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것뿐이야.”
“하긴 소울마스터 정도면 노화가 거의 멈췄을 텐데 계속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겠네요,”
“뭐, 그런 것쯤은 교묘한 화장술로 감출 수도 있긴 한데 조건희 회장 자체가 워낙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 이미 그에겐 일성 그룹 자체가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얘기가 있어. 그에겐 소울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서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소할 수 있는 일성 그룹은 자식들에게 넘겨버린 거지.”
“대단한 영감님이네요.”
“대단하지. 괜히 진천일성(振天一星)이란 별호를 얻은 게 아니야. 확실히 우리나라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强者)야.”
“그런 강자가 일성 그룹이라는 세계적인 그룹을 세웠다는 게 신기하네요. 보통 그렇게 자신의 강함을 추구하는 이들은 사업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지 않아요?”
“원래 유명한 상가(商家) 출신이라 그쪽으로도 재능이 꽤 높았나 보더라. 그러한 재능에 경계의 힘까지 합쳐졌으니 당연히 폭풍 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덕분에 일성 그룹은 현실과 경계 양쪽에서 모두 대단한 존재감을 가진 기업이 된 것이고.”
“경계의 힘을 통해 현실에서 성장하고 다시 현실에서 얻은 힘을 통해 경계의 힘을 사는 그런 구조군요,”
“날카로운데? 맞아. 일성 그룹은 딱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힘을 키웠어.”
“조금만 생각하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리도 참여하는 거예요?”
“굳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나랑 사장님이 가져온 물건들도 꽤 있으니 이 기회에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넌 어떻게 할래? 너도 거기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다 처리하려면 골치가 꽤 아플 텐데 이번 기회에 티 안 나는 것들 위주로 적당히 정리해봐.”
“흐음, 그래야겠네요. 당장 현금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쓰지도 않는 영혼보물을 쌓아 놓는 것보단 필요하지 않더라도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가는 걸로 하자. 사흘 후니까 미리 정리할 영혼보물들을 분류해놔.”
“네, 준비해놓을게요.”
아무래도 건이 가진 영혼보물 중에는 풀리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것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적당히 분류를 해줘야 했다.
“우리 백건님 이번에 돈 좀 만지시겠는걸?”
“옛날엔 그렇게나 악착같이 벌고 싶었던 돈인데…… 이젠 별로 감흥이 없어졌어요.”
“그건 이미 네가 가진 힘이 돈이나 명예 같은 세상의 헛된 가치를 까마득히 추월해버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돈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훨씬 낫지. 이번에 돈이 생기면 제대로 한 번 돈을 써봐. 아무리 감흥이 없다고 해도 마음껏 돈을 쓰면 기분이 꽤 괜찮을 거야.”
“하긴 옛날에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뭘 할지 혼자 상상하고 즐거워했던 게 생각나네요. 알았어요, 이번에 돈을 벌면 한 번 제대로 써볼게요. 그런 의미에서 누난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후후, 나야 필요한 게 아주 많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널 위해서만 써봐. 진짜 후회 없이 마음껏! 알았지?”
“알았어요. 진짜 이번에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느껴볼게요.”
건은 진심이었다.
한때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옭아맸던 돈.
물론 이젠 그 돈이 전혀 필요 없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때 자신을 그렇게나 괴롭혔던 돈에 대한 한(恨)을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볼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연희는 누구보다 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런 조언은 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 그리고 누나도 보고에서 수련하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현재 철민은 치우의 보고에서 수련 중이었다.
아무리 미국과 유럽의 정예 소울러들이 연합을 했었다지만 이번에 그들에게 제압당한 것은 철민에게도 약간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건에게 양해를 구하고 ‘치우의 보고’를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 현실보다 느렸고 치우의 보고 안은 그 자체로 경계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수련하기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냐, 난 네 말대로 당분간은 좀 쉴래. 그리고 난 이번 패배로 특별히 충격을 받은 것도 없어.”
“그래도 혹시나 필요할 땐 꼭 말씀하세요.”
“응, 필요할 땐 얘기할게.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네 창고에 있는 그 혼마들……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수 있는 거야?”
현재 치우의 보고에는 총 다섯 마리의 혼마들이 각각 다섯 개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건은 나머지 네 개의 방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현실에선 지금 치우의 보고에 갇혀 있는 수준의 혼마를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공간이 좀 아깝더라도 건은 일단 될 때까진 그대로 놔둘 생각이었다.
“저도 그건 정확히 모르겠어요. 일단 아직까진 그대로 있는 걸로 봐서는……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아요. 지금 사장님이 그 중 한 마리를 상대로 계속 실전 수련이 가능한 걸 보면 혼마가 보고 안에서 생존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보여요.”
철민은 마왕급 혼마 중 한 마리를 상대로 진짜 치열한 실전 수련을 치르는 중이었다.
물론 철민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무리 마왕급 혼마라고 해도 쉽게 당하진 않았기 때문에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아직까진 쓸만한 곳이 많은 놈들이니 최대한 살려나 봐야죠.”
어차피 치우의 보고는 현재 혼마들이 차지하고 있는 다섯 개의 방을 제외하더라도 건이 혼자 사용하기엔 매우 넓은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당분간은 놈들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뭐, 그건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래도 사장님은 한동안 보고에서 나오시질 않을 것 같으니까 우리 둘이 경매 준비를 해야겠다.”
“원래 사장님이 한군데 꽂히면 절대 한눈을 안 팔잖아요. 누나랑 제가 이해해야죠.”
“그래, 직원인 우리가 이해해야지.”
연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와 건 그리고 철민의 관계는 단순한 직원과 고용주의 관계가 아니었다.
연희, 건, 철민.
이 세 사람은 사실상 가족과 같은 관계였다.
그렇기에 더욱 서로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