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더 소울(The Soul) - 일성 그룹 [2]
“누나, 괜찮아요?”
“기분이 아주 더러운 것만 빼면 다 괜찮아.”
“얘들 왜 이러는 거예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이번 경매 이벤트 자체가 변질된 것 같아.”
“변질이요?”
“응, 순수하게 경매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구린 속내가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일성 그룹이 대단하다고 해도 한국의 모든 소울러에게 이렇게 대놓고 수작질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 뒤에 뭔가 대단한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이오. 우리는 단지 허위 경매 물품을 골라내려는 것뿐이오.”
정원호는 다시 한 번 연희 말을 반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 나가던 그가 다시 정중해진 것은 건 때문이었다.
말 한마디로 자신들 모두를 제자리에 멈추게 한 남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정원호는 그런 사람이라면 함부로 자극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계속하려는 거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일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추잡하게 바뀐 거야? 너희가 이러고 있는 걸 진천일성은 알고는 있어?”
연희는 계속 신랄하게 일성 그룹을 비판하며 초대회장인 진천일성 조건희를 언급했다.
“말이 안 통하는군요. 한 번만 저희를 믿고 따라와 보시면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끝까지 약을 팔려고 하네.”
연희는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고 한결같이 얘기하는 정원호를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경험이 부족했거나 혹은 마음이 여렸다면 정원호의 말에 흔들렸을 것 같았다.
“함정이 분명한데 우리가 왜 거길 따라갈…….”
“누나, 가보죠.”
조용히 있던 건은 연희의 말을 살짝 끊으며 얘기했다.
“응? 가보자고? 건아, 저 구렁이를 백 마리쯤 삶아 먹은 아저씨 말은 믿지 않는 게 좋아.”
“저 사람 말을 믿는 게 아니에요.”
연희의 말에 건은 고개를 가로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왜 가보려는 거야?”
“무엇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그렇게 데려가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집주인이 뭔가 깜짝파티까지 준비해줬다는데 모른 척 응해주는 게 예의잖아요.”
건은 살짝 웃으며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희는 건이 왜 가보자고 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건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올랐는지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걸 몸으로 직접 느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전처럼 그걸 깜빡하곤 했었다.
“그런가? 알았어. 가자.”
잠깐 깜박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다시 떠올린 연희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순간 건은 조용히 전능언의 힘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정원호를 비롯한 일성 그룹의 정예 소울러들은 자신들을 크게 압박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흠흠, 그럼 가시죠.”
정원호는 건에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위협한 것인지 너무나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어차피 내 임무는 그곳까지 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뿐이다.’
그는 많은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에서 그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일꾼일 뿐이었다. 일성 그룹에선 목에 힘깨나 준다는 그였지만…… 적어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 * * *
끼이이익, 쿠쿵.
건과 연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 순간 그들을 안내한 정원호와 그의 부하들은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는 걸 본 연희는 역시나 정원호의 말이 모두 개소리였다는 걸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개소리가 맞았네.”
그들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건과 연희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은 꽤 다양해 보였다.
연희는 그들 중 그나마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건아, 다른 놈들은 모르겠고 저기 제일 앞쪽에 있는 녀석이 바로 조건희의 아들이자 일성의 황태자라 불리는 조원혁이다. 일단은 소울마스터에 거의 근접한 소울러라고만 알려졌긴 한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소울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도 얘기도 있어.”
연희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옆에 서 있던 건에게 조원혁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소울마스터에요.”
건은 그런 연희에게 정확한 답을 알려주었다.
물론 건이 조원혁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건은 단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조원혁의 경지를 알아낼 수 있던 것뿐이었다.
“그래? 역시 조건희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아들을 소울마스터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맞았구나.”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는 그 사이 앞쪽에서 걸어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과 연희 앞쪽에 멈춰 섰다.
“얼음여왕 이연희. 이거 오랜만이군.”
조원혁의 나이는 40대였지만 실제 모습은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쓸데없는 얘긴 모두 생략하고 우리를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것만 얘기하죠.”
연희는 조원혁과 쓸데없는 잡담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조원혁과 그리 좋은 인연으로 엮여있질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몹시 나쁜 인연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때 조원혁이 이연희에게 관심이 있어 카페 헤븐을 하루가 멀다고 찾아왔던 게 전부였다.
당시 연희는 조원혁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분명히 했었지만 조원혁은 거의 한 달 동안 계속 연희를 귀찮게 했었다.
만약 철민이 나서서 경고하지 않았으면 더 오랫동안 귀찮게 했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그 뒤에 자신의 아버지인 진천일성 조건희에게 크게 혼난 조원혁이 연희에게 정중히 사과하면서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일은 나름 잘 마무리 되었었다.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까칠함은 여전하군.”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반갑지 않은 건 여전하네요.”
조원혁의 말에 연희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하하하, 이 상황에서도 꿋꿋하네. 금강철벽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아, 그 카페 헤븐의 새로운 강자(强者)라는 저 녀석을 믿고 있는 건가?”
조원혁은 연희 옆에 서 있던 건을 슬쩍 쳐다보며 얘기했다. 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분명한 적의(敵意)가 느껴졌다.
그는 진심으로 연희를 원했었다.
자신의 능력과 지위라면 연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게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다는 게 뭔지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느꼈던 굴욕감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연희 옆에 건이 너무나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진천일성 조건희 회장은 이걸 알고 계신 건가요? 만약 모르고 계신 것이라면…… 당신이 지금 얼마나 큰 실수를 하는 것인지 알고는 있나요?”
연희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조원혁을 바라보았다.
“닥쳐라. 아버님은 이미 그룹의 모든 걸 나에게 일임하셨다. 내 뜻이 곧 일성의 뜻이다.”
“휴, 역시 당신은 정말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게 없네요.”
“내가 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변화는 부족한 놈들이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할 때나 필요한 것일 뿐이다.”
“휴우, 더 이상 당신과 대화를 하는 건 멍청한 짓인 것 같네요.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본론이라…… 뭐, 그러도록 하지. 일단은 이분들이 너희에게 물을 게 있다고 하신다.”
조원혁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그의 옆에 있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딱 봐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외국인이었다.
“일단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국토안보부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장관인 톰 리지라고 하네. 지금부터 내가 자네들에게 하는 말은 모두 특급 기밀 사항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두게.”
톰 리지는 신의 흔적에서 건에게 죽은 아이언마스터 아담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소울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일명 섀도우킹(Shadow King)이라 불리는 그는 이름 그대로 미국의 대통령과는 또 다른 의미의 지배자였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S-알파’의 요원들과 신의 흔적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이언마스터 아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내가 입수한 정보로는 이연희 당신은 우리 쪽 소울러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던데 맞나?”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대답을 해야 하나요?”
연희는 톰이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대한 질문을 하자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좋아, 그럼 쓸데없는 확인은 모두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와 강철민은 어떻게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선 너희는 그곳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온 건가?”
톰은 연희에게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건은 자신이 신의 흔적에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모두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어.’
이 상황은 결국 건의 어설픈 자비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가 만약 조금만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이들은 절대 연희를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지금 그 말은 나와 사장님을 강제로 제압하고 고문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제압한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고문은 인정할 수가 없지. 살아남은 S-알파의 요원들은 너와 강철민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고 얘기했다.”
“그게 최대한의 배려였다고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요.”
“워, 이연희 말을 좀 가려서 하는 게 어때? 지금 네 앞에 있는 분은 미국의 국가안보국 장관이시라고.”
조원혁은 이연희에게 경고하듯 얘기했다.
하지만 연희는 가볍게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뭐, 어쨌든 그 문제는 내가 너에게 물은 두 가지 질문 이후에 따져도 되는 문제다. 다시 한 번 묻지. 너와 강철민은 어떻게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선 너희는 그곳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온 건가?”
톰은 조금 전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며 연희를 향해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마치 제대로 얘길 하지 않으면 무력행사라도 하겠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섀도우킹의 기세가 강렬하다고 해도 매일 같이 강철민과 건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온몸으로 받으며 대련을 한 그녀는 절대 그 기세에 주눅이 들지 않았다.
“협박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난 오늘 이 두 가지 질문의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면 자네는 물론이고 금강철벽이라 불리는 강철민까지 모두 제압해서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네.”
톰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강철민까지 제압할 생각으로 아주 많은 준비를 하고 이곳에 온 상태였다.
그만큼 그는 이번 일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은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에요. 아무리 미국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이곳에서 이런 강짜를 부리는 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신 건가요?”
“내가 이렇게 대놓고 강짜를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보진 못했나? 자꾸 말을 돌리지 말게. 자넨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하네.”
고오오오오오!
톰은 더욱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는 아예 연희를 자신의 기세로 찍어눌러 버려서 제대로 협박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런 그의 기세가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이건 그냥 벽이 아니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아니 아예 올려다보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벽이 그의 기세를 가로막았다.
‘뭐, 뭐지?’
당황하는 톰.
그 순간 지금까진 연희 옆에서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건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물어야지. 이렇게 다짜고짜 물으면 기분이 나빠서 대답하기가 싫어지잖아.”
건이 나서는 순간 톰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벽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느꼈다.
‘도대체 이건…….’
당황하는 톰.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