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더 소울(The Soul) -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1]
@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어디서 관리라도 받는 것 같은 찰랑찰랑한 황금빛의 긴 생머리와 보석과 같은 푸른 눈동자. 이게 건이 본 제우스의 겉모습 중 가장 인상 깊은 것들이었다.
제우스는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활동한 소울러였지만 겉모습은 대략 3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의문스러운 게 상당히 많았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대부분의 의문이 풀리는군요.”
건과 연희가 카페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왔을 땐 이미 철민과 제우스가 대화하고 있었다.
“무슨 의문이 풀렸다는 거죠?”
“이제 갓 그랜드마스터가 된 소울러가 어떻게 그림자 군주를 쓰러트렸는지……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죠.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직접 만나보니 이해가 되는군요. 당신은 강해요. 이제 갓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요.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가 당한 것이었어요.”
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철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철민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의문이 풀렸으니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흐음, 일단…… 커피를 한 잔 주문하죠.”
제우스는 철민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했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은 배덕의 군주 마틴과는 다르다는 듯이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려고 오신 건 아니겠지만…… 연희야. 주문받아라.”
철민 역시 제우스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두 명의 그랜드마스터.
그들은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서로 최대한 여유롭게 행동했다.
한편 건은 한 걸음 뒤에 서서 제우스를 살펴보았다.
‘사장님보다 살짝 강한 정도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건은 제우스의 경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제우스는 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카페 헤븐에 소울마스터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철민뿐이었다.
“커피 맛이 좋군.”
말없이 연희가 가져다준 커피 한 잔을 마시던 제우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희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잔 더 마시고 싶지만…… 당신 말대로 커피를 마시려고 온 것은 아니니 이제 슬슬 본론을 얘기하도록 하죠.”
스윽.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제우스는 지긋이 앞쪽에 앉아 있던 강철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제우스와 철민은 마치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실제로 기세를 끌어올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는 뜻이었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제우스 쪽이었다.
“전 솔직히 당신이 그림자 군주를 제거한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쪽 소울러들에 관한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중입니다.”
제우스는 크게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얘기를 시작했다.
“심지어 당신이 원한다면 이번 일과 관련되어 당신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곤란함을 직접 해결해줄 생각도 있습니다.”
제우스는 계속해서 듣기 좋은 말만 이어갔다.
하지만 철민은 그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먼저 양보를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죠?”
“제가, 아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당신이 ‘신의 흔적’에서 얻은 그것. 그것을 원합니다. 얻은 게 없다고 발뺌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전 이미 그곳에 파견되었던 모든 소울러들과 면담을 끝낸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파악한 모든 정보를 보고받고 온 상황입니다. 모든 정황 증거는 당신이 ‘신의 흔적’에서 가장 중요한 영혼 유물을 얻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의 유무에 대해서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왔다는 표정으로 철민을 향해 얘기하는 제우스.
철민은 그런 그를 보며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제우스는 이미 철민이 일 등급 영혼유물을 얻었다고 완벽하게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
“얘기했잖아요. 영혼유물의 유무 때문에 논쟁할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그것은 당신한테 있는 게 확실하니까요.”
제우스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얘기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지금 번지수가 잘못 찾은 상태였다.
1등급 영혼유물을 차지한 이가 카페 헤븐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 주인이 철민이 아니라 건이란 점이었다.
제우스는 그걸 모르고 무조건 철민이 영혼유물을 얻어 이렇게 갑자기 그랜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그것이 제게 있다고 쳐보죠. 그런데 왜 제가 그것을 당신에게 줘야 하죠?”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변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계속 고집을 부릴 생각인가요?”
“지금 이게 왜 세상의 규칙과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적어도 전 스스로 떳떳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부하들요? 그들을 희생시킨 것은 그림자 군주입니다. 저희에게 와서 이러실 게 아니라 미국을 찾아가 따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거 영 말이 안 통하는군요.”
“억지를 부리면서 말이 통하길 바라면 안 되죠.”
제우스가 뭐라고 하건 철민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리고 사실 철민의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우스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철민의 말이 옳다고 인정해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왔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 시켜야 했다.
“대화는 결렬이군요.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겠네요.”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가요?”
“그냥 경고라고 하죠. 맛있는 커피를 얻어먹었으니 오늘까지는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화해의 손길을 거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허허, 화해의 손길이라…… 내가 느끼기엔 강도의 손길이었는데 아무래도 서로 생각하는 게 너무 다른 것 같군. 어쨌든 싸우길 원한다면 싸워줘야겠지.”
철민은 상당히 강경한 제우스의 생각을 듣고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아, 그리고 커피는 제가 사는 거니 오늘부터 당장 시작해도 됩니다.”
철민의 마지막 말은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제우스는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군. 아쉬워…… 분명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작 카페 헤븐의 세 사람은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제우스가 돌아간 후 철민과 연희 그리고 건은 가볍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경고를 하고 간 것은 아무래도 노골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뜻이겠지.”
철민은 제우스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진 않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잖아요. 아무리 제우스가 대단한 소울러라고 해도 유럽연합이나 미국의 소울러들이 한국 땅에서 한국의 소울러를 공격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 아닌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수호자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행보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 일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 조금 다를지도 몰라. 미국과 유럽연합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했을 것이고 또한 그와 함께 적당한 당근을 던져주며 회유까지 했을 거야. 이 정도라면 안 넘어갈 수가 없지. 내부 반발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아마 우리나라의 수호자는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 애초에 제우스가 여길 찾아왔단 얘기가 그 부분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거든.”
철민은 제우스가 카페 헤븐에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여기까지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생각보다 훨씬 강한 압박이 들어올 거야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두 사람 모두 주의…… 아니다. 생각해보니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게 웃기네. 알아서들 잘해.”
“어차피 연희는 당분간 특훈을 좀 더 해야 해요. 진짜 조금만 더 하면 소울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무조건 수련에 집중해야지. 연희가 소울마스터만 되어도 걱정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건의 얘기에 철민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될 순 없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연희는 철민과 건을 번갈아 쳐다보며 굳게 다짐하듯 얘기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밥 먹는 시간도 줄여야 해! 앞으로 밥도 S룸에서 먹는 걸로 하자. 나랑 사장님이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한 번 제대로 달려보자.”
건은 연희가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지길 원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연희였다. 그렇기에 연희가 강해져야 그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지, 지금은 제대로 달리는 게 아니었어?”
이미 연희는 하루 24시간 중 18시간 이상을 S룸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상당한 시간을 수련에 투자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제대로 달린다는 얘긴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스물두 시간 이상은 수련에 투자한다는 뜻이야. 딱 잠자는 시간 두 시간을 제외하곤 모두 수련에 집중하자.”
“……야, 너 예전에 내가 널 좀 빡빡하게 굴렸다고 지금에 와서 복수하려는 거야?”
“설마! 난 순수하게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 물론 내가 평생을 네 옆에서 널 지키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네가 강해야 좀 더 수월하게 지킬 수 있으니까 무조건 넌 강해져야 해.”
“든든하고 고맙긴 한데 난 누구한테 보호받은 스타일이 아니거든.”
“나도 아무 때나 보호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야, 이것들아 나 있을 때는 애정행각 좀 자제해달라고 했잖아.”
철민은 알콩달콩 티격태격하는 건과 연희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비록 철민은 모태 솔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현재는 연애와 담을 쌓은 노총각이었다.
노총각 앞에서의 사랑싸움은 진짜 예의가 아니었다.
철민은 요즘 뜨겁게 연애를 하는 건과 연희를 볼 때마다 부쩍 외롭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거의 십 년간 여자는 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건과 연희가 만들어낸 사랑의 훈풍엔 살짝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 * *
철민의 예상대로 유럽연합과 미국의 압박은 하루 만에 엄청나게 증가했다.
특히 그들은 아예 대놓고 카페 헤븐을 포위한 후 그 누구도 카페 헤븐에 접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정예 소울러들이 언제라도 카페 헤븐을 쓸어버릴 것처럼 계속 위협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진짜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서 자신들이 먼저 내밀었던 타협안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카페 헤븐의 세 사람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건과 연희는 거의 온종일 S룸에서 나오질 않았고 철민은 수많은 눈길을 한눈에 받으며 카페 테라스에서 낮잠을 즐겼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이게 바로 철민이 온몸으로 얘기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