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더 소울(The Soul) - 일성 그룹 [1]
@ 일성 그룹.
털썩.
블러디 로드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건이 얼마나 까마득한 경지에 올라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일성 그룹이다.”
모든 걸 포기한 블러디 로드는 힘없는 목소리로 건의 물음에 대답했다.
건은 블러디 로드가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 얘기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여기서 계속 고집을 피워봤자 너만 괴로워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블러디 로드는 굉장히 정중하게 얘길 했다.
“물어봐.”
“혹시 네가 오른 그 경지는 뭐지? 그랜드마스터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존재하는 건가?”
블러디 로드는 오랫동안 자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마물의 피를 마셔 다른 소울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혼력을 모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건이 오른 경지가 도대체 어떤 경지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랜드마스터는 무엇이고 마스터는 또 무엇이냐. 그런 구분에서 벗어나면 하늘 위의 또 다른 하늘을 볼 수가 있지.”
건은 가장 핵심이 되는 얘길 블러디 로드에게 해주었다.
“그랬던 건가…… 난 나도 모르게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았던 거였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블러디 로드.
지금 이 순간 상당히 중요한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었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더 이상 허락된 시간은 없었다.
“그럼 약속대로…….”
건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던 완성된 피의 소용돌이를 블러디 로드를 향해 날렸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블러디 로드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조용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피의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콰과과과과!
피의 소용돌이와 블러디 로드가 부딪친 그 순간 블러디 로드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너무나도 허무한 블러디 로드의 최후.
파아아앗!
블러디 로드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피의 소용돌이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피의 인장이 건에게 흡수되었다.
충분히 예상되는 인장이었기 때문에 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장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제 건에게 이런 인장은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블러디 로드가 지니고 있던 인장은 피의 인장 한 개가 아니었다.
피의 인장과 함께 연속해서 흡수되는 또 다른 두 개의 인장.
그것은 그림자의 인장과 흡수의 인장이었다.
‘이 녀석…… 인장을 두 개나 흡수한 놈이었군.’
건은 무려 세 개의 인장을 동시에 흡수했다.
다른 소울러였다면 하나를 흡수하는 것도 버거웠을 테지만 건은 설사 인장에 백 개를 동시에 흡수하라고 해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다와 같이 크고 넓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블러디 로드를 쓰러트린 게 건이 아니라 다른 인장을 지닌 소울러였다면 세 개 중 한 개만 흡수하고 나머지 두 개는 세상으로 다시 풀어줬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장 세 개를 든든하게 흡수한 건은 기분 좋게 웃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조금이나마 나았기 때문에 한 번에 세 개의 인장을 흡수한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연희도 마무리했겠지?’
건은 미트리 백작인 절대 연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그녀의 상대로 결정한 것이었다.
연희와 관련돼서는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건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 예측은 빗나갈 리가 없었다.
츠츠츳!
다시 치우의 보고를 여는 건.
그는 연희와 미트리 백작이 들어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자 그의 힘으로 유지되던 천라지망도 당연히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과과!
이로써 일성그룹이 계획하고 뱀파이어들이 실행에 옮긴 이번 습격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 * * *
건은 미트리 백작을 죽이지 않았다.
연희는 그를 생사여부를 건에게 맡겼지만 뜻밖에 건은 그를 살려주었다.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살린 것은 아니었다.
건은 미트리 백작을 살려 귀찮은 일을 최소화시켰다.
뱀파이어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왕을 잃었기 때문에 자칫 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건을 귀찮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몰려온다고 해서 건이 위험해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귀찮아질 수는 있었다.
그래서 건은 미트리 백작을 살려서 돌려보내며 복수를 꿈꾸면 아예 이 세상에서 뱀파이어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미 건의 무지막지한 힘을 직접 경험한 미트리 백작은 건의 그 말이 절대 허황된 게 아니란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뱀파이어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실제로 미트리 백작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자신이 목숨을 걸고 귀찮은 일들을 모조리 없애겠다고 빌고 또 빌었었다.
이미 블러디 로드까지 사라진 상태에서 미트리 백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미트리 백작은 살려서 돌려보낸 건은 예정되었던 모든 마물 사냥 일정을 취소했다.
“바로 가게?”
“굳이 기다려줄 이유도 없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결국 돌아온 대답이 이것이라면 더 볼 것도 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나도 반대하는 건 아니야. 다만 일성을 이 세상에서 지우면 귀찮은 일이 많긴 할 거야.”
“알아. 사실 그래서 조금 참았던 건데 이렇게 대놓고 선을 넘어버리니 어쩔 수가 없네.”
일성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룹이었다.
현실과 경계 모두 똑같이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지우면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귀찮은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건이 제우스나 블러디 로드는 거침없이 상대했으면서도 진천일성은 그냥 내버려둔 것은 이 부분 때문이었다.
사실상 일성 그룹이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귀찮은 것은 딱 질색하는 건의 성격 때문이었는데 정작 일성 그룹은 그걸 전혀 몰랐다.
“혼자 갈 거야?”
“응, 이건 혼자 갔다 올게. 넌 카페로 돌아가 있어.”
“사장님에겐 내가 말할게.”
“그렇게 해.”
건은 S룸을 열어 연희를 단번에 카페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곤 혼자 라페라리를 타고 일성 그룹의 본사를 향해 움직였다.
당연히 이미 일성 그룹도 블러디 로드가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들 역시 뱀파이어들 주변에 정보원들을 깔아놨었기 때문에 블러디 로드를 포함한 수백의 뱀파이어들이 연희와 건을 습격했다가 모두 사라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 얘긴 결국 블러디 로드가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회장님, 모든 게 틀어졌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백건과 이연희는 멀쩡히 살아남고 뱀파이어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블러디 로드까지 투입된 걸 확인했는데……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와 버렸습니다.”
황재운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의 머리로는 지금 상황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건과 연희가 블러디 로드 일행을 쓰러트린 것인지 알고 싶었다.
“현재 백건이 혼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예상 목적지는 이곳일 것 같습니다.”
“혼자? 정말 혼자인가? 이번 습격에 강철민이 개입한 게 아니란 말인가?”
“강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카페 헤븐에 있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가 고도의 분신술을 쓰는 게 아니라면…… 강철민은 절대 이번 습격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황재운도 처음엔 당연히 강철민이 개입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철민에게 붙여놓은 소울러들의 보고에 따르면 강철민은 확실히 카페 헤븐에 있었다.
그들에게 몇 번이고 확인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럼 지금 자네가 얘기한 말만 종합하면 백건과 이연희가 블러디 로드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백건이 혼자 나를 노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이 되지 않지만 일단 결과만 놓고 보면 그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재운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사실 그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으으음…….”
진천일성 조건희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전투 파트의 소울러들을 총동원해서 놈을 저지할까요?”
“만약…… 정말 그 녀석이 블러디 로드를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소울러라면…… 전투 파트의 소울러들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조건희는 황재운에게 되물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우린 그냥 조용히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려야 할까?”
“그건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했는데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란 가정을 한 후 일단 회장님은 이곳에서 피하시고 제가 남아서 놈을 상대하겠습니다.”
“멍청한 놈. 지금 우리하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예상이 정말 사실이라면 내가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그건 정말 멍청한 대처일 뿐이야.”
조건희는 황재운을 크게 나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있었던 결과만 놓고 역으로 유추를 해보면 애초에 핵심은 강철민이 아니라 그 백건이란 녀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렇게 설정을 하고 단추를 새롭게 채우면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어차피 이미 블러디 로드가 실패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별로 없었다.”
조건희는 똑똑한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어렴풋이 뭔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전혀 확인이 안 된 순수한 예상일뿐이었다.
하지만 조건희는 왠지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그렇게 결정을 내린 조건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백건이라고 했던가? 놈을 블러디 로드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고 가정하고 상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난 블랙 플랜을 발동할 생각이다.”
“브, 블랙 플랜은 안 됩니다. 회장님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백건은 절대 블러디 로드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아닙니다.”
블랙 플랜이란 말을 들은 황재운은 사색이 되어 조건희를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