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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장
단태는 수레를 힘껏 밀고 있었다.
오르막길로 접어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언덕은 끝나지 않았다. 점점 경사가 급해져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야 할 판이었다. 과연 숨넘어간다고 해서 ‘숨고개’라는 이름이 붙을 만했다.
옷 안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커다란 마차가 빠르게 옆을 지나가자 먼지가 일었다. 길이 넓어서 다행이었다. 좁았다면 느린 수레를 옆으로 밀어 비켜 줘야 했을 것이다. 사람이 밀어야만 움직이는 이 낡고 무거운 수레 옆으로 상인들의 마차가 수도 없이 지나갔다. 단태는 또래의 여자 아이가 창밖으로 내다보자, 고개를 푹 숙이고 수레바퀴가 남기는 자국을 봤다.
언제까지 밀어야 할까? 지난 한 달 동안 날마다 수레를 밀어서 근육통으로 밤마다 잠을 설쳤는데. 잠시 쉬고 싶지만 이 언덕배기에선 힘을 줄였다간 뒤로 밀릴 판이었다.
그때, 거친 소리가 오후의 열기를 뚫고 퍼져 나갔다.
“빨리 밀어!”
수레에 실린 많지 않은 세간 옆에 기대고 앉아 술병을 들고 소리치는 남자.
단태는 손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낡은 수레가 뒤로 쏠리며 미끄러지다 바퀴가 빠지고 뒤집혀 저 인간을 덮친다면 신이 나서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태는 이를 악물고 수레를 밀었다. 바로 옆에 여동생이 자기도 돕는다면서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언덕 꼭대기에 수레가 올라갔다. 울퉁불퉁한 길 위로 그늘을 드리운 아름드리나무 옆에 수레는 잠시 멈췄다.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돈 갖고 나가 버리는 아버지라는 인간이 소변보느라 이곳에서 쉬자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오빠, 물.”
설희가 물 가방을 가져왔다.
몹시 목이 말랐던 단태는 입구에 입을 대고 가죽가방을 위로 들어 올렸다. 미지근해도 물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가을이 다가온다지만 아직 햇살은 강렬했고, 공기 중엔 습기가 많았다.
물 가방을 여동생에게 건넨 단태는 엄마 곁으로 걸어갔다. 한 마리밖에 없는 늙은 노새를 돌보던 엄마가 단태를 보고는 손을 내밀어 볼을 만졌다.
“수고했다.”
“내가 뭘. 근데 저 인간, 정말 계속 데리고 갈 거야?”
“아버지다, 단태.”
엄마는 단호했다.
“……알았어.”
단태는 어깨를 으쓱인 후, 저 아래로 펼쳐진 굴곡진 들판과 그 너머 물의 도시 유타루체를 쳐다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녹색의 들판도 빛과 그림자 그리고 농부의 노력이 빚어 낸 걸작이었지만, 뒤에 자리 잡은 유타루체는 자연 앞에 무릎 꿇는 대신 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물 위에 건설된 도시답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거대한 호수 위에 도시가 세워진 것 같았다. 수십 척의 범선들이 오가는 강, 견고한 성벽, 건물 사이로 흐르는 운하, 크고 작은 다리들, 도시 곳곳에 세워진 탑들 그리고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하얀 성 등 이제까지 본 어떤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도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름답지?”
“……응.”
단태는 감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살게 되다니! 새로운 삶이 저기에서 펼쳐지다니!
“저기서 자리 잡으면 널 학교에 보낼 거야.”
“학교? 내가?”
“가고 싶어 했잖아. 엄마가 모를 줄 알았니? 조금만 기다려. 엄마 솜씨라면 자리 잡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너무 무리하진 마.”
“엄마 생각해 주는 거니?”
엄마는 단태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얼마 전에 열여섯 살이 된 단태는 아직도 자기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엄마에게서 벗어나 수레로 걸어갔지만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어기적거리며 수풀 밖으로 나온 남자를 본 순간 단태는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는 지나가면서 단태의 뒤통수를 때렸다. 사정없이.
“너 같은 새끼가 내 아들이라니.”
남자는 술병을 들고 수레에 타더니 당장 출발해야 한다며 재촉했다. 곧 엄마는 늙은 노새 ‘운마’를 끌었고, 수레는 천천히 꼬불꼬불 유타루체로 이어진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태와 설희는 수레가 너무 급히 내려가지 않도록 뒤에서 속도를 조절했다. 언덕으로 밀어 올릴 때보다는 훨씬 수월한 일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물의 도시를 쳐다보며 단태는 새로운 삶을 기대했지만, 술 취한 남자의 코고는 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저 남자가 사라진다면 완벽한 삶이 가능할 텐데. 저 작자는 3년 만에 집에 와서는 엄마가 모아 놓은 돈 25마전을 들고 다음 날 사라졌었다.
그게 작년 봄이었다.
그 많은 돈을 한 달도 못 되어 다 써 버리고는 집에 오더니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놀고먹기만 하던 남자는 기회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
올해 초여름 돈을 내놓으라면서 엄마에게, 설희에게 손찌검을 한 저 작자에게 단태는 자기가 일해서 번 돈 2마전을 던져 주었다. 비열한 얼굴로 돈을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단태를 흠씬 두들겨 패 기절시킨 후에야 집을 나갔다.
엄마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운 좋게도 물의 도시로 옮겨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살던 마을을 떠나기 전날, 저 작자가 나타났다. 무릎까지 꿇고 미안하다면서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는 바람에 결국 함께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만, 단태는 저 남자를 믿지 않았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수레를 덮었다.
놀란 단태와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거대한 것이 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은 용이었다. 펼친 날개의 길이는…… 수레 수십 대를 일렬로 세워도 모자랄 만큼 컸고, 주홍색과 검정색이 섞인 몸통은 웬만한 범선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그 용 때문에 노새가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용은 물의 도시로 곧장 날아가고 있었다.
“촌스럽기는. 용, 처음 보냐?”
어느새 잠에서 깬 남자가 단태, 설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단태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설희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 봐요. 근데 정말 커요.”
“저 용보다 더 큰 용도 있다.”
“정말요? 상상이 안 가요.”
단태는 남자와 대화하는 설희가 못마땅했지만 끼어들어 말을 끊지는 않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저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고, 그럴 바에는 설희만이라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딸이 된다면 뭐,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난 용을 타 봤단다.”
남자는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작을 해 오거나 땅파기, 담쌓기 등 힘든 일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피해 버리는 주제에 틈만 나면 허풍을 떨었다. 지난번에는 대마법사가 자기 친구라면서 물의 정령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도 했었다. 아마도 반응해 주는 설희 때문에 신이 나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남자의 행동이 못마땅한 단태는 수레가 평지로 내려오자 엄마를 대신해서 노새를 끌었다. 자연스럽게 엄마는 설희와 함께 걸었고, 반쯤 술에 취한 남자는 혀가 풀려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단태는 손을 뻗어 잡초를 뽑아다가 노새의 코를 간질였다. 그러자 노새가 갑자기 날뛰었다.
수레가 이리저리 흔들리자, 쥐고 있던 술병을 놓친 남자는 수레에서 굴러떨어졌다. 침 흘린 입가와 뺨이 먼지로 범벅이 된 남자가 벌떡 일어서자, 단태가 노새를 잡고 미안한 표정으로 뒤를 쳐다봤다.
“아버지, 놀라셨죠? 죄송해요. 운마가 갑자기 날뛰어서요.”
“너!”
“기분 나쁘셨다면 때리셔도 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대로 몰기나 해.”
남자는 애처로운 단태의 표정에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힘겹게 수레에 올라탔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진 단태는 수고한 운마에게 귀리 한 줌을 먹이고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몇 시간 걷자 들판은 뒤로 물러나고 물의 도시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 아치형 문은 아주 유명했다. ‘아레마고의 문’은 대마법사 아레마고가 마법으로 세운 문으로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수리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견고했는데, 자신의 뒤를 이을 계승자가 나타나면 문 스스로 입을 연다는 전설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단태는 전설 따위 믿지 않지만, 저 문 아래를 지나갈 때 문이 깨어나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수레가 그 문 아래를 통과할 동안 들린 목소리는 설희에게 또 한 번 허풍을 떠는 그 남자의 목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