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화 (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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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철제 우리는 허공으로 올라갔다. 균형을 잡지 못해 이쪽저쪽으로 넘어졌던 단태는 탑의 중심이 텅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탑 꼭대기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5층에 다다르자 밧줄은 위로 올라가는 대신 옆으로 이동했다. 쿵 소리와 함께 철제 우리가 바닥에 닿자, 단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엄포윤이었다.

단태는 그 늙은 마법사를 기억해 냈다. 그 기분 나쁜 시선은 잊을 수가 없었다.

“자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자네와 나는 행복할 수 있지. 허나, 자네가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난 자네의 주인으로서 적절한 벌을 가할 수밖에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나는 노예가 아니에요.”

“허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군. 좋아. 차차 현실을 알게 되겠지. 걸을 수 있나?”

단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포윤이 우리의 문을 열며 말했다.

“따라와.”

단태는 앞서 걷는 엄포윤을 노려보며 가끔 주위를 곁눈질했다. 유랑시인의 이야기 속 멋들어진 탑과는 달리 이곳은 음침했고,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용령 제국 초기에 대륙을 주름잡았던 대마법사 하랑이 이런 탑에서 성장했을까?

탑의 구조는 비교적 간단했다.

중앙은 텅 빈 공간이고, 나머지는 원형의 복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다. 방마다 크기와 용도가 달랐는데, 악취 나는 방이 있는가 하면 청량한 향기를 풍기는 방도 있었다.

한 층에 있는 방이 줄잡아 20개 남짓이라면 위로 올라갈수록 탑의 폭이 좁아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탑에 있는 방의 개수가 300개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단태는 이토록 거대한 건축물은 처음이었다.

“여기다.”

엄포윤은 탑의 외부를 향하는 방이 아니라, 맞은편 즉 탑의 내부 공간 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섰다.

각종 약초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돌팔이 의사에게서 배운 약초 몇 종류가 유리 선반 너머 약병에 담겨 있었다. 단태는 벽 전체가 약초를 담은 수백 개의 약병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약초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저쪽에 있는 건 모두 수생 약초란다. 약초는 모두 땅에서 채취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물속에서 자라는 약초도 제법 많지. 특히 수계 마법에 필요한 약초는 거의 전부 수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엄포윤은 자랑스러운 듯 한쪽에 놓인 약병을 가리켰다.

단태는 가만히 있었다.

“거기 앉아라.”

그 말에 단태는 낡았지만 견고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숨이 찼다. 뗏목에서 팔던 음식을 먹었는데 왜 이리 힘이 들까? 팔찌 때문에? 벗기고 싶지만 손목에 딱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거라.”

엄포윤이 와서 팔찌를 벗겼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몸이 한결 편해졌다. 단태는 엄포윤이 기다란 탁자에 올려놓은 팔찌를 쳐다봤다. 대체 저 팔찌가 뭐기에 그렇게 무기력했을까?

“자, 네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보자꾸나. 이걸 쥐어 봐라.”

엄포윤은 파란색 구슬을 내밀었다.

구슬을 받아 든 단태는 호두를 쥐듯 그 구슬을 손바닥 안에 놓고 손을 오므렸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구슬에 단태는 호기심이 일었다.

“음, 나쁘지는 않구나. 이번엔 이거다.”

엄포윤은 빨간색 구슬을 건넸다. 파란색 구슬을 쥐었을 때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엄포윤은 검은색, 보라색, 노랑색, 녹색 등 다양한 종류의 구슬을 주었고, 단태는 잠자코 그 구슬을 손에 쥐었다가 늙은 마법사에게 돌려주었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는 단태는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자,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투명한 구슬이었다.

그 구슬을 쥐는 순간, 돌풍이 연구실을 휩쓸었다.

유리 선반에 올려놓은 약병들이 떨어져 박살이 났고, 말린 수초들이 돌풍에 휘말려 회오리를 만들었으며, 탁자 위에 쌓아 놓은 서류들이 공중으로 올라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구슬을 놔!”

엄포윤의 목소리는 돌풍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엄포윤은 얼굴에 달라붙는 종이를 겨우 떼어 내고 다가가 단태에게서 구슬을 빼앗았다. 그러자 돌풍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엉망진창이 된 연구실을 본 엄포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런 재능의 소유자를 겨우 5천 마전에 사들였다는 사실에 그 분노는 깨끗하게 녹아 버렸다. 횡재도 이런 횡재는 없으리라.

3천 5백 마전에 구입했지만, 자신의 주머니에 1천 5백 마전을 집어넣은 노마법사는 단태의 몸값을 5천 마전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너라.”

엄포윤은 단태를 데리고 연구실 끝에 마련된 조그만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은 침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쉬어라. 일은…… 내일부터 시작할 테니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신 나는 일이란다.”

엄포윤은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음흉하고 끔찍한 미소였다.

“아 참, 이걸 차거라.”

엄포윤은 팔찌를 내밀었다.

차고 싶지 않았지만 눈치로 노마법사의 마음을 읽은 단태는 말없이 팔찌를 받아 손목에 찼다. 등에 밀 포대를 얹은 듯 몸이 무거워졌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내일 보자꾸나.”

엄포윤이 문을 닫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자 혼자가 된 단태는 힘겹게 침대로 가서 걸터앉았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 출발의 꿈에 두려우면서도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엄마와 여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 단태는 이야기로만 들었던 마법의 탑에 갇혔다. 노예로 팔린 것이다.

기가 막힌 단태는 소리 죽여 울었다. 울음이 들린다면 저 늙은 마법사가 의기양양할 것 같아서였다. 버럭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역시 참았다. 그러나 억누르기엔 쌓인 감정이 너무 컸다. 단태는 노마법사가 준비해 놓은 담요를 덮고는 낮게 울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미웠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태가 아는 아버지 중에 그런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왜 그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멀쩡한 아버지도 많은데.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단태는 벽에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설희는 무사할까?

생각만 했는데도 가슴이 아팠다.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자 소매로 닦아 내고는 다른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개를 든 단태의 눈에 조그만 창문이 보였다. 머리만 겨우 내밀 수 있는 크기였다. 단태는 그쪽으로 걸어가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깥을 살폈다.

거대한 공동이 보였다. 탑 중앙의 텅 빈 공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빈 공간은 아니었다. 일곱 개의 기중기가 저 아래에 정박한 화물선에서 크고 작은 상자를 끌어 올려 필요한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투구 모양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기중기 근처에서 그 상자가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돕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단태는 기가 질렸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달아날 수 있을까?

침대에 주저앉은 단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탑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이곳에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단태는 충동적으로 자기 뺨을 때렸다. 철썩. 꿈이 아니었다. 꿈이기를 바라며, 단태는 더 세게 뺨을 때렸다.

붉게 물든 뺨.

팔찌로 인해 지친 상태에서 휘둘러 뻐근한 팔.

단태는 또다시 울 뻔했다. 울음이 터지면 엄마를 찾게 될 테고, 그러면 더 슬퍼서 크게 울고 말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단태는 뺨을 만졌다. 화끈거리는 뺨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징징 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버지가 집을 뒤져 찾아낸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을 때도 땅이 꺼지도록 울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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