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9화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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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놓인 빵과 물병이 눈에 들어왔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기력이 생길 테고, 그래야 기회가 생기면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단태는 그 빵을 뜯어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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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르신?”

“으, 응.”

엄포윤은 말을 얼어무렸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벌써 용마의 자리에 오른 천재 마법사 때문이었다. 탑의 규율을 따르자니 어린놈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만나면 불편한 말투로 끝을 뭉개곤 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 녀석은 규율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어서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다.

“조금 전 그 기운은 뭐죠? 예사롭지 않던데.”

항상 쾌활한 용마 륜사가 물었다.

그 말에 엄포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륜사는 예민한 감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노예 꼬맹이에게 그런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탑 안에서 칠보주를 쥐게 한 것이 실책이었다. 그러나 쏟은 물을 담을 수는 없다.

“요즘 연구 중인 마법이라네.”

“어르신의 분야는 수초를 기반으로 한 수계 마법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아까 그건 풍계였는데요.”

“난 좀 넓게 연구를 한다네.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군.”

엄포윤이 서둘러 망토를 휘날리며 가 버리자, 륜사는 팔짱을 끼고 뒷모습을 쳐다봤다. 벽과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그 기운은 분명히 바람이었다. 천린풍탑은 후계자가 없어 사라져 버린 지 백 년이 훌쩍 지났다.

끈질기지만 능력은 없는 저 노마법사가 실전된 마법을 되살렸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엄포윤은 당장이라도 진마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어쩌면 강마를 뛰어넘어 네 번째 용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이상해.”

연구실로 돌아가려던 륜사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마법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을 잠그는데, 그 독특한 과정을 모른다면 힘으로 부수지 않는 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부터 륜사는 기술로 다른 마법사의 문을 여는 게 취미였다. 마법사의 분야, 성격, 평소 행동, 취미 등을 미루어 여는 방식을 추측한 것이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문이 열렸다.

“……엉망이잖아.”

깔끔하기로 소문난 엄포윤답지 않은 광경이었다. 엄포윤은 왜 이곳을 치우지 않고 서둘러 어디론가 가 버렸을까? 궁금증이 더 커진 그는 눈을 감고 간단한 마법을 펼쳤다.

눈앞에 주먹만 한 눈이 나타났다. 동그란 그 눈은 륜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창 재미보고 있었는데 불렀다고? 미안해. 다음엔 물어보고 소환할게. 됐지? 제발 좀 삐치지 마. 다음에 오면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게. 정말이야. 이번엔 진짜라니까. 아, 왜 불렀냐구? 이 방 좀 조사해 줘. 특이한 게 있는지 알고 싶거든.”

곧 둥실 허공에 떠 있는 그 눈은 방을 돌아다니며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륜사는 쓰러진 의자를 일으키고 거기 앉아 다리를 꼰 다음 꾸벅꾸벅 졸았다. 잠시 후 눈이 다가와 륜사의 이마를 건드렸다. 그러자 깨어난 륜사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끝났어? 그래, 말해 봐. 뭐? 저기 인간이 있다고? 그래? 수고했어. 다음에 오면 잘 대접해 줄게. 가 봐.”

정령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륜사는 연구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정교한 문이 벽과 책장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문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어떤 마법으로 자물쇠를 풀까 생각하던 그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제자 여화였다.

“그래? 알았다.”

륜사는 이 방에 대한 흥미를 잃고 즉시 엄포윤의 연구실을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 승강기 앞에 섰다. 곧 올라온 승강기에 타자, 승강기는 20층까지 올라갔다. 밖으로 나온 륜사는 거침없이 두꺼운 철문을 양손으로 밀어젖히고 회의가 진행 중인 방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갑자기 들어와서 죄송합니다만, 성질이 급해서요. 제 성격은 여러분도 잘 아시죠? 실례 좀 해야겠습니다.”

륜사는 반원형의 탁자를 돌아서 마둔수탑을 이끄는 수장 누마탄 앞에 섰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그 건장한 사내는 묵직한 시선으로 륜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기를 바라네.”

“왜 제가 빌어먹을 용을 만나러 가야 하는 거죠?”

“그 일 때문에 무례하게 군 건가?”

“용은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건 탑주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용은 마법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네. 그것마저 부정하려나?”

“용의 마법은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오죽하면 돈에 팔려 사람을 태우는 애완동물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명령은 철회해 주십시오. 전 절대로 용을 만나러 가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누마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절대로.”

“그렇다면 나는 자네가 신청한 물품 목록을 예산에서 지워 버려야겠군. 나야 좋지. 자네 덕분에 재정도 넉넉하게 확보하고 말이야. 자넨 돈을 너무 많이 써.”

“네?”

“탑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돈을 멋대로 쓰고 싶은가? 그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잖나?”

“사형!”

“급할 때만 사형이지. 썩 꺼져. 용을 만나서 비법이라도 배워 오든가, 아니면 손가락이나 빨고 있든가.”

누마탄을 노려보던 륜사는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골통이었다.

누가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한바탕 욕을 토해 낸 그는 어쩔 수 없이 용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마탄은 공개적으로 한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까 칠장로 앞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탑을 떠나지 않는 이상, 멍청이 같은 용을 만나러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부님, 안 통하죠?”

배시시 웃으며 나타난 제자 여화.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인이었지만 륜사에게 여화는 여전히 처음 봤을 때의 그 수줍은 소녀였다.

“언제 출발한대?”

“열흘 뒤에요.”

“준비나 해.”

“……그런데 일행이 더 있어요.”

“뭐?”

륜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했는데, 무엇보다 비위를 맞추는 것은 체질적으로 질색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두 분의 계승자가 함께 간답니다.”

여화도 그리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계승자? 둘?”

“시장님의 따님, 탑주님의 아드님요. 사부님이 인솔 책임자라는데요.”

“젠장!”

륜사는 또 한바탕 욕을 쏟아 냈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어요, 사부님.”

“휴우, 말해 봐.”

“수행원들을 데리고…… 천마룡을 타고 간답니다.”

“…….”

참을 수 없는 륜사는 몸을 돌려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발칵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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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만든 뜨끈한 단팥죽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지만 눈을 뜨니 꿈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햇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단태는 조그만 창으로 가서 바깥을 살폈다. 옮기는 짐이 꽤 많았다. 저 아래에는 커다란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다.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은 어제보다 훨씬 나았다. 정신이 맑아지자 훨씬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긴 망토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인 것 같았다. 색깔은 제각각 달랐다. 자신을 사들인 그 노마법사는 잿빛 망토를 걸쳤는데, 붉은색 망토나 푸른색 망토를 입은 마법사도 여럿 있었다. 주로 젊은 마법사일수록 망토의 색깔이 화려했다.

망토 없이 빨간색 목도리를 매고 마법사를 따라다니거나 혼자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법사를 만날 때마다 멈춰 넙죽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마법사보다는 아랫사람인 것 같았다. 탑에 고용되어 마법사를 돕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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