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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도, 목도리도 없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어리든 나이가 많든 마법사와 목도리 두른 사람들 앞에서 허리까지 굽혔다. 그들은 탑의 하층민 같았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데, 단태는 어디를 가더라도 서열은 존재한다는 돌팔이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촌장의 허락을 받고 마을에 정착한 그 의사는 사람들과 친해지려 애를 썼지만 수십 년, 수백 년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의사여서 누군가 아프면 부를 뿐, 그 이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난봉꾼이어서 동네 아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던 단태가 스스로 돌팔이라고 부르는 그 의사와 친해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단태는 외부인에게서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의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는데, 당시에는 그냥 들었던 부분이 지금 떠오른 것이다.
“내 서열은 어디일까?”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진 단태.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를 닦고 급히 침대에 가서 누운 단태는 엄포윤이 들어오자 이제 막 일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잘 잤느냐?”
“……네.”
“배고프지? 이거 먹어라.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으니까 많이 먹어둬라.”
엄포윤은 구운 닭, 부드러운 치즈, 갓 쪄 낸 옥수수가 있는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자물쇠를 채웠다.
단태는 잠시 그 음식을 노려보다 가져와서 먹기 시작했다. 독 따위는 있을 리 없고, 있다고 해도 먹어야 했다. 닭은 그 귀한 후추를 뿌려서인지 맛이 기가 막혔다. 치즈를 옥수수에 발라서 먹자 진미가 따로 없었다.
금세 다 먹어 치운 단태는 다시 그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살폈다.
단태가 보기에 탑은…… 살아 있는 거대한 마을 같았다. 수백 명이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녔는데 한 사람도 빈둥거리지 않았다. 그중에는 단태 또래의 아이들도 꽤 있었다. 심부름을 하는지 빠르게 움직였다.
다양한 색깔의 상자가 위로 올라가고, 때로는 아래로 내려가 화물선에 실렸는데 문득 여기 마법사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또한 마법사가 되어 이런 곳에서 일했으면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단태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억울하다고 해도 팔려 온 신세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노예였다.
다시 문이 열렸다.
“나오너라.”
단태는 눈빛이 날카로운 늙은 마법사 옆을 지나 어제와 달리 말끔하게 정리된 연구실로 나왔다. 깨진 약병의 유리 조각은 하나도 없고, 깨끗한 약병이 유리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기 앉거라.”
단태는 엄포윤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 팔걸이가 있는 의자였는데 불길하게도 가죽 끈이 달려 있었다.
엄포윤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가죽 끈으로 단태를 의자에 묶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단태는 떨지 않으려고,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겁먹지 마라. 일 년 치 연구비를 모조리 털어서 널 구입했다. 그러니 널 함부로 다룰 생각은 없단다.”
엄포윤은 몸을 돌려 탁자 쪽으로 가서 길게 꽂힌 마법서 중 한 권을 꺼내어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번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형운세초를 꺼내 왔다. 보라색에 흰색의 반점이 나 있는 그 수초는 수계 마법뿐 아니라 화염계, 광계, 음계, 빙계 등 다양한 마법의 영역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재료였다.
일반적으로 마법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혹자는 넷, 혹은 다섯 단계로 나누는데 엄포윤은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세 단계라는 사실을 인정할 거라고 확신했다.
첫 번째 단계는 ‘조합’이었다.
마력석은 물론 각 마법에 필요한 재료에서 특별한 기운을 뽑아내어 필요한 형태를 만드는 단계인데, 이때 마법사의 기하학적 해석력, 창의력은 얼마나 빨리 마법을 펼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두 번째 단계는 ‘융합’이었다.
각 재료의 기운으로 만든 구조물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단계로 선천적인 능력은 물론 그 마법과 각 재료를 깊이 이해할수록 융합의 깊이가 달라졌다. 이 융합은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지와 직결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해소’였다.
마법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지만, 마법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단계로서 일종의 후폭풍을 막는 과정이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존재하는데,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펼치면 그 반작용이 마법사의 몸을 뒤흔드는데, 이 단계를 생략하거나 소홀하면 마법사의 육체는 금세 노화를 겪고, 질병에 시달려, 급기야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뛰어난 마법사들일수록 자신만의 마법, 스스로 창안한 마법에 집착했는데 그들은 명석한 두뇌와 타고난 재능으로 조합, 융합의 두 단계를 곧잘 해냈다.
문제는 마지막 해소였다. 체내의 반작용을 최소화하는 이 단계는 대단히 까다로워서 아무리 우수한 마법사라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형운세초는 바로 이 해소 단계에 기여하는 약재였다. 엄포윤은 형운세초가 모든 영역의 마법의 해소 단계에 적용 가능하며, 그 이유는 물이 만물의 근본이라는 주장을 논문에서 펼칠 생각이었다.
율진 연방시대에 명성을 떨쳤던 마법사 탄무랑은 사람의 몸에서 7할은 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노예를 이용한 그 끔찍한 실험 방식 때문에 비난을 받았지만 그가 알아낸 지식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에는 물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그런 재료로 실행되는 마법에도 물은 필수적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물의 기운과 관련이 깊은 형운세초가 모든 마법의 해소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논문이 완성되고,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당장 형운세초의 가격은 폭등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엄포윤은 그 점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형운세초는 효과가 좋은 반면에 채취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지 않다면 너도나도 형운세초를 이용했으리라.
엄포윤은 형운세초를 지금보다 월등히 빨리, 대량으로 채취하는 방식에 대한 개선법을 알고 있었다. 그 방식으로 생산한다면…… 오래지 않아 거부가 될 터였다.
만족감에 잠긴 마법사는 곧 실험 준비를 마쳤다.
실험 자체는 간단했다.
먼저 저 녀석으로 하여금 마법을 펼치게 하고, 해소 단계는 생략한다. 그럴 때의 부작용이나 몸의 변화를 꼼꼼하게 살핀 다음에 좀 더 강력한 마법을 펼치게 하는 것이다. 비싸게 값을 치렀으니 조심스럽게, 절대 죽지 않도록 마법의 강도를 조절해야 할 터였다.
그 후에는 형운세초를 복용시킨 다음에 같은 과정을 거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할 계획이었다.
엄포윤은 두루마리를 가지고 단태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 마법이 그려진 두루마리란다. 크기가 작아서 소족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화계 마법이 담겨 있어서 소족을 찢기만 하면 마법이 펼쳐진다. 이렇게, 알겠느냐?”
“……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소족을 찢거라.”
뒤로 물러난 엄포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던 단태는 소족을 찢었고, 곧 두루마리에서 불꽃이 일어나 단태를 에워쌌다. 그러나 의자에 걸려 있던 마법이 그 불꽃을 막아 냈다. 단태는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타오르는 화염을 살펴볼 수 있었다.
화염이 잦아들자, 복통에 시달렸다.
“윽!”
엄포윤은 다가와서 단태의 몸을 샅샅이 확인했다. 맥박, 체온은 물론 눈의 상태, 근육의 이완 정도, 혀의 색깔, 다리의 반사 신경 상태 등 다양한 항목을 빼놓지 않고 종이에 기입했다.
“좋아. 다음엔 이거다.”
엄포윤이 건넨 두루마리는 이전에 비해 커졌다. 복통은 가라앉았지만 한번 호되게 당한 단태는 망설였다. 엄포윤이 다가와 단태의 손에 그 두루마리를 쥐여 주었다.
“중족이다. 이번에도 신호를 주면 찢거라.”
“……꼭 해야 하나요?”
“그걸 안 하면 네가 살 이유가 없다.”
“…….”
“자, 지금이다.”
그 말에 단태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채로 두루마리를 찢었다. 그러나 화염이 아니라, 냉기가 몸을 감쌌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 냉기에 몸이 떨렸는데, 아까 불을 막았던 그 투명한 보호 막이 냉기도 어느 정도는 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치아가 서로 부딪쳐 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추웠다. 한겨울에도 이런 추위는 겪어 보지 못했다.
이번엔 시야가 흐려졌고, 왼쪽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복통과 더불어 등이 비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엄포윤이 다가와 귀찮게 몸을 살피는 것도 알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