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1-8 -->
“자, 잘 참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한 손으로 들기 힘들 만큼 커다란 족자였다. 대족이었다.
단태는 대족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번엔 뭐가 튀어나올까? 불? 얼음? 그것도 아니면 무엇일까? 평생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마법을 직접 체험하고 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두 번의 경험으로 단태는 저 마법사가 자신을 두고 무언가 시험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참 망설이던 단태는 서슬 퍼런 협박에 못 이겨 대족을 찢었다.
위이잉.
어제 투명한 구슬을 쥐었을 때처럼 맹렬한 돌풍이 불었는데, 의자의 마법이 그 돌풍으로부터 단태를 지켜 주었다. 돌풍은 좁은 공간에서만 불었고, 그 때문에 어제와 달리 연구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강풍은 곧 사라졌다. 단태는 두 번째 고통을 능가할 극심한 통증을 두려워하며 기다렸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몸이 가뿐해졌다.
“음…….”
단태의 몸을 살핀 엄포윤은 예상과 다른 결과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대족은 ‘풍철’이라고 불리는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천린풍탑이 남긴 마법 중 하나였다. 제작 방법만 남아 있어서 아직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왜 이 녀석은 고통을 호소하지 않을까? 두 번째 마법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팔까지 회복되다니. 이래서는 논문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합당하지 않다.
형운세초를 먹여서 한 번 더 실험하려던 엄포윤은 의자에 묶인 단태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모른 채 마법서를 뒤적거렸다. 어떻게 풍계 마법만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마법사님!”
참다못한 단태가 소리쳤다.
“왜?”
“……오줌 누고 싶어요.”
“쯧쯧, 알았다.”
엄포윤이 가죽 끈을 풀어 주자 단태는 그 작은 방으로 가서 소변을 해결했다. 이제 살 것 같았다.
천천히 나오니 엄포윤은 아예 마법서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어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단태는 문을 쳐다봤다. 그리 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간다고 해도 이 거대한 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답이 없는데도 단태는 슬금슬금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널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저 바깥에 뿌리겠다.”
등골이 오싹해진 단태는 다시 의자 근처로 돌아왔다. 마법사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사람인가?
단태는 바닥에 뒹구는 마법서를 내려다봤다.
복잡한 수식, 도형, 그림들이 깨알 같은 글에 섞여 있었다. 눈치를 보다가 그 책을 슬쩍 살폈다.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만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다리가 아파서 의자에 앉은 그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세 번째 두루마리를 찢었을 때 응당 느껴야 할 고통이 없었다는 사실이 저 마법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단태 자신도 궁금했다. 자신에게 저 굉장한 마법사를 놀라게 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엄포윤은 탁자에 올려놓은 마법서를 밀어서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씩씩거리던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본 적이 있어. 해소 단계를 생략해도 부작용에서 자유로운 몸에 대한 언급을. 대체 어디서 봤지? 기억이 안 나잖아.”
엄포윤은 단태를 가운데 두고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그래! 거기서 봤다!”
하지만 그리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포윤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용금탄의 오금반서관이야. 거기에 있어. 어쩌지? 당장 확인하고 싶은데, 수정구를 이용할까? 안 돼. 그러면 꼬리가 잡힐 거야. 저 녀석의 재능이 알려지면 곤란해. 잘못하면 빼앗길지도 몰라. 그럴 순 없지.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그러면 어쩌지? 아, 그래. 그러면 되겠지. 천마룡을 타고 가면 넉넉잡아 사나흘이면 되니까. 그래, 그렇게 하자. 혼자 갈 수는 없어. 여기 두었다가 누군가 빼돌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래, 데려가야 해. 입을 막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엄포윤은 미친 사람처럼 진지했다가 웃기를 반복하더니 단태를 그 작은 방에 밀어 넣고 문을 잠그지도 않은 채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빨리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이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 단태는 다시 한 번 바닥에 널려 있는 마법서를 들었지만 던져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은 마법서만으로도 손쉽게 마법을 익히더니만, 실제로 보니…… 그건 거짓말이었다. 이런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머리가 좋아서 한번 읽으면 모조리 기억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복도 쪽으로 나와 귀를 기울인 단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그 문도 쉽게 열렸는데, 외부의 출입을 막기 위한 잠금 방식이어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 상대적으로 쉬웠다. 복도로 나온 단태는 아까 본 장면을 기억해 냈다.
망토를 걸친 마법사.
빨간 목도리를 두른 사람.
그리고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래, 난 이곳에 심부름 온 거야.’
단태는 특별한 볼일 때문에 온 것처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몸이 푸짐한 아주머니 마법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는데, 단태는 쿵쿵 뛰는 가슴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못 보던 녀석인데.”
“……매매소에서 중족을 갖다 주라고 해서요.”
단태는 황급히 아는 단어로 핑계를 만들어 냈다.
“그래? 수고해라.”
그 마법사가 멀어지자 단태는 숨을 헐떡였다. 그런 수법이 통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내려가면 탑에서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보였다.
단태는 크게 반 바퀴 돌아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보이면 주저 없이 허리까지 굽혀 인사했는데, 그 여자 마법사와 달리 단태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태는 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곳에서 뛰었다가는 대번에 눈에 띌 터였다.
“너.”
머리카락이 붉어서 빨간 목도리와 구분이 어려운 여자가 불렀다.
단태는 무시하고 내려갈지, 아니면 여자에게 갈지 고민하다가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여자 앞으로 걸어갔다.
“심부름 왔다가 매매소로 돌아가는 중인데요.”
“이름이 뭐니?”
“……단태예요.”
이름을 물을 줄은 상상도 못 한 터라 본명을 말해 버렸다.
“혹시 오늘 두루마리를 찢었니?”
단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들킨 것이다. 몸을 돌려 계단으로 달려가는데, 그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이었다.
“탑에서는 장난치면 안 된다고 내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따라와. 도망칠 생각은 말고.”
도망쳐 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단태는 그 여자를 따라 복도를 걸었는데, 곧 문을 열고 엄청나게 복잡하고 더러운 방에 들어섰다.
여자는 쓰러진 꽃병, 먹다 버린 빵조각, 찢어진 마법서, 붉은색 돌멩이, 부러진 삼각자 등 지저분한 바닥을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레 가로지르다, 고개를 돌려 단태를 쳐다봤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네.”
단태는 달아날 기회를 엿보며 따라갔는데, 커다란 서가를 돌자 빨간색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책상에 걸터앉은 여자는 눈짓으로 단태를 그 의자에 앉혔다.
“보자. 눈 크게 떠 봐.”
단태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런, 두 장이나 찢었잖아.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 마법이 담긴 족자는 위험하다는 거 안 배웠어? 두통, 복통에 시달렸지? 그게 다 후유증 때문이야. 해소 단계를 생략해서라구. 다행히 큰 후유증은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조치는 취해야겠지? 자, 이거 마셔. 쭉 들이켜. 맛은 엉망이지만 몸에는 좋으니까.”
단태는 말없이 그 약병을 쳐다보기만 했다. 저 여자를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안 마실 거니?”
“……고맙지만 안 마실래요.”
“그래?”
“늦었어요. 가 보겠습니다.”
“내 이름은 여화, 몸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찾아와.”
“……네.”
단태는 눈치를 보다가 몸을 돌려 그 어지러운 방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