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2화 (12/293)

<-- 12 회: 1-9 -->

복도로 나오자 자기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아래쪽 속옷은 땀으로 흥건했던 것이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가 아파서 그 약을 마실까도 생각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나 믿을 수는 없다!

단태는 거침없이 계단을 딛고 아래로 내려갔다.

출구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배를 타고 운하로 나가는 통로, 또 하나는 걸어서 나가는 탑의 정문. 어느 쪽이 나을까? 심부름꾼이니 정문일까? 아니면 배에 숨어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까?

‘배에 숨어들었다가는……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그래, 정문으로 가자.’

마음을 정한 단태는 또래의 소년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뒤를 쫓았다. 일행처럼 보이면 밖으로 나가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입구는 철저히 검사하지만 다행히 출구는 허술했다. 예상과 달리 쉽게 빠져나오자 광장이 펼쳐졌다.

동상이 보였다.

말 탄 사내가 창으로 조그만 용의 심장을 찌르는 형상인데, 보기만 해도 그 긴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그 웅장한 기상의 동상 뒤에는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포효하는 사자의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그 분수는 광장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광장은 돌을 맞물리는 형태로 바닥에 깔았는데, 틈이 없을 만큼 정교했다.

광장을 통과한 단태는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운하 선착장에 도착했다.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서 움직이는 배도 있었고, 소마선도 있었다. 마음이 급해 배에 타고 싶은데, 돈 없이는 불가능했다.

애절한 어조로 부탁하다가 뺨을 맞아 진흙탕에 넘어진 단태는 거친 욕설에 놀라 선착장 근처로는 갈 수도 없었다. 소마선을 훔치려고 기회를 엿보았지만 창을 든 경비대원들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를 포기한 단태는 걸어 다녔는데, 골목으로 접어들자 서너 살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우리 구역엔 무슨 일이지? 망치 녀석이 보냈지? 그렇지?”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단태가 아이 하나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 달리지 않았다면 맞아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후로 외진 곳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너 시간 돌아다녔지만 탑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그 광장을 벗어날 방법은 운하, 즉 배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선착장으로 간 단태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공짜로 배를 얻어 타려고 숨어들었다가 들킨 거리의 소년이 억센 선원에게 붙잡혀 운하로 던져졌고, 허우적거리던 소년은 지나가던 소마선에 머리를 부딪쳐서 죽었다. 둥둥 떠 있는 소년의 시체는 크고 작은 배에 부딪히며 운하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누구도 그 소년의 시체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이 도시…… 돈 없이는, 아는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순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서 있는 탑과 달리 저 건축물은 대지처럼 넓고 웅장했다. 거인의 허벅지 같은 기둥들이 하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마다 날개 달린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그 건축물의 입구 위에서 단태는 익숙한 표시를 발견했다.

둥근 태양!

장당전이었다.

“아!”

장당전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선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저곳에 가면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깨끗한 계단을 딛고 입구로 올라서니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더욱 커졌다. 마차 두 대가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듯한 문 양쪽에는 성직자 특유의 소매가 긴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소매자락에는 빨간 태양이 수놓여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광장을 내려다보던 두 사람은 단태가 다가오자, 즉시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

왼쪽 사람이 물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장제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그러니 너 스스로 해결하여라.”

“엄마와 여동생은 노예로 팔렸고, 저 혼자 남았어요. 여기에는 아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도와주세요. 엄마와 여동생을 찾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제발요.”

단태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러자 오른쪽에 서 있는 남자가 다가왔다.

“너, 혼자냐?”

“…네.”

“사정이 딱하구나. 장제께선 스스로 돕는 자를 기뻐하시지만, 때로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이리로 오너라. 대종사님께서 널 도와주실 게다.”

그 남자를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두려움과 서러움이 물러가는 듯했다. 정교한 조각상, 수수한 벽화, 향을 내뿜는 촛불 등을 쳐다보며 그 남자를 쫓아가던 단태는 속으로 모든 성직자가 울담반의 그 늙은이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늙은 종사는 돈을 받아야 움직였고, 손에 쥐어주는 돈의 액수에 따라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의 정도가 달라졌다. 반대로 돈을 주지 않으면 저주도 서슴치 않았는데, 그런 모습에 단태는 적어도 몇 년 동안 신전에는 출입도 하지 않았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배 고프면, 거기 있는 빵을 먹어도 된다.”

그 남자는 조그만 방에 단태를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단태는 탁자에 놓은 동그란 빵을 쳐다봤다. 배가 고팠다. 탑에서 빠져나와 이 근처를 꽤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손을 뻗어 빵을 잡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달아나.”

얼굴이 하얀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부가 하얀 사람을 본 단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널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릴 거야. 그러니 도망쳐. 어서.”

“…아저씨는 누구에요?”

“나? 랍살이야. 여기서 일하는 노예고.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 없다. 빨리 여기서 나가거라. 정문으로 말고, 이쪽 쪽문으로. 여긴 신을 모시는 곳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곳에는 신이 없다. 어딘가에 있겠지만 여긴 없어. 어서, 서둘러!”

“…….”

단태는 남루한 옷에 얼굴이 하얀 노예의 말보다는 그 부드러운 성직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흥, 너도 날 무시하는군. 좋아. 이렇게 하자. 복도 맞은편 방으로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라. 그러면 너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겠지. 안 그러냐?”

“…알았어요.”

이 도시로 와서 신중해진 단태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랍살이 가리킨 방으로 갔다. 랍살은 청소를 해야한다면서 가버렸다. 그 얼굴 하얀 노예가 장난친 게 아닐까 싶은 무렵,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단태는 문을 살짝 열고 복도를 쳐다봤다.

아까 그 남자가 보였고, 옆에는 우락부락한 사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단태를 그 방으로 안내한 성직자가 문을 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왜 없지?”

그 말에 사내들은 방으로 들어가서 구석구석 뒤졌다.

“눈치 채고 달아난 모양이네요, 종사님.”

“쳇! 교활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토록 부드럽게 배려하던 성직자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자 단태는 깜짝 놀랐다. 랍살의 말이 옳았다.

“아깝습니다. 꽤 잘 생긴 남자 아이라면 500 마전은 족히 쳐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자네들이 늦게 와서 이런 일이 생긴 걸세. 앞으로는 기별하면 즉시 오게나.”

“알겠습니다, 종사님.”

사내들은 그 젊은 종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고, 혼자 남은 종사는 아까운지 그 방을 한 번 더 살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흔들며 입구로 향했다.

단태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성직자가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으려 하다니! 울담반의 그 늙은 종사보다 더 악질이었다. 하는 행동을 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대체 몇 명이나 팔아먹었을까?

랍살이 말한 쪽문으로 나가려는데, 계속 복도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단태는 귀를 세우고 인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놀란 단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배 고프지? 일단 이거 주머니에 넣어둬라. 나가서 먹어도 되니까.”

랍살은 갓 구운 따뜻한 빵과 감자를 내밀었다.

그 음식을 주머니에 넣은 단태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파란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피부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파란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마치 거기 빠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눈이었다.

“너도 이런 눈이 무섭니?”

“…아니, 전혀 무섭지 않아요. 아저씬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단태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미안했다. 지나칠 수도 있는데, 끼어들어 구해준 사람이었다.

“너, 피부를 보니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

“동쪽 울담반에서 왔어요.”

“울담반? 운면산맥 아래자락에 있는 조그만 마을?”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단태는 울담반에서 이곳 물의 도시로 오면서 여러 번 울담반이라는 지명을 입에 올렸지만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어쩌다 보니. 그보다, 여긴 위험해. 들키면 그대로 노예로 팔릴거야. 그러니 이걸 뒤집어 쓰고 날 따라오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말 걸지 말고. 알았냐?”

“네, 아저씨.”

단태는 랍살이 건넨 붉은색 천을 뒤집어 쓰고 그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단태를 팔아먹으려 했던 그 젊은 종사였다. 단태는 잔뜩 긴장했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면서.

“장명초는 찾아놓았느냐?”

“종사님의 숙소에 갖다놓았습니다.”

랍살이 말했다.

“알았다.”

그 종사와 멀어져서 안도하는 찰나, 랍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계승자이신 반우현님의 주녀로 야진초를 가지러 왔다기에 제가 안내하는 중입니다.”

장당전 안에서 여자는 적보로 얼굴과 몸을 가려야 한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다.”

젊은 종사는 상대가 도시의 계승자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서 관심을 끊고 신전 입구로 서둘러 갔다.

랍살은 긴장으로 숨까지 헐떡이는 단태를 이끌고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만 드나드는 신전의 남문으로 빠져나왔다. 얼굴이 하얀 노예는 노예들에게서도 무시를 당하는 처지라 누구도 랍살과 단태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자 랍살이 단태의 적보를 벗겼다.

“심호흡을 해라. 천천히.”

“…네.”

단태는 그 말에 천천히 숨을 쉬었고, 곧 호흡은 평온해졌다.

“집이 어디냐?”

“…….”

단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너도 노예냐?”

“…팔려왔으니 노예나 다를 바 없어요.”

“널 도와주고 싶지만, 보다시피 난 누굴 도와줄 형편이 못 된다. 허나, 이것 하나만은 말해야겠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포기만 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

단태는 울고 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도 소리는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나도 포기하지 않고 산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면서. 그러니, 힘내거라.”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단태에요.”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

“단번에 잘라버린다는 뜻이에요. 뭘 잘라버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좋은 이름이다. 부디, 네 안에 있는 칼을 잘 갈아서 잘라버리고 싶은 게 나타날 때를 기다려라. 잘 가거라.”

“네, 아저씨.”

단태는 랍살과 헤어져 다시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돌아왔다. 랍살 덕분에 또 다시 노예로 팔리는 위기는 모면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서러웠다. 신을 위해 살아간다는 저 고귀한 사람들마저 자신을 그저 돈으로 본다면… 대체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아직도 물을 뿜어내는 분수대로 돌아온 단태는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은 도망치느라 얼마 없던 돈도 다 잃어버렸고, 엄마도…… 여동생도…… 노예로 팔렸으며, 기댈 곳 하나 없는 무기력한 소년에 불과했다. 운이 좋아 탑에서 빠져나왔지만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음식 사먹을 돈도 없고, 잘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와 여동생을 구해 낼 아무런 힘도 자신에겐 없었다.

앞으로 가고 싶은데, 저 광장을 가로질러 어디엔가 있을 가족을 찾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팔찌 때문도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 이해할 수 없는 도시 때문이었다.

저 무서운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가끔 돌담을 넘어 복숭아 몇 개 훔쳐서 먹은 적은 있지만, 크게 잘못한 일은 없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아버지를 미워해서? 술 먹고 엄마를 때리고, 겨우 모아 놓은 돈을 가져가서 도박으로 날려 버리는 인간을 미워하는 게 어때서? 미워한다고 해서 해코지를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로 인정을 하지 않았을 뿐.

그게 그렇게나 잘못한 것일까?

이제 두려움보다는…… 울분이 더 컸다. 억울했다.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하느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개차반이라서 아들도 그럴 거라는 근거 없는 의심과 시선도 꾹 참았다. 물건이 없어지면 가장 먼저 범인으로 지목되어도 참고 견뎠다.

그런데 왜 세상은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지?

왜?

“야!”

단태는 손을 나팔 삼아 소리쳤다.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놀라 단태를 쳐다봤지만 곧 분노에 찬 소년 따위는 잊어버리고 제 갈 길로 갔다. 누구도 단태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고함을 지르자, 울분이 수그러들었다.

단태는 분수대로 뛰어들어 그리 깨끗하지 않은 물로 몸을 던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감정에 따라 분을 터트려도 곤란하다. 마을에서 이미 깨우친 진실이 아니던가.

잠수한 단태는 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시골 마을의 뒤쪽으로 흐르는 작은 강에서 했던 행동이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을 때, 생각을 정리하는 법이랄까.

그 돌팔이 의사의 말이 또 생각났다. 의사 주제에 사냥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던 그가 웃으며 이런 말을 했었다.

-탁월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속여.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화살을 정확히 쏜다고 해서 사냥에 성공하는 건 아니야. 집요하고 끈질기다고 해서 훌륭한 사냥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건 부차적인 거야. 부차적인 게 뭔지 알아? 몰라? 그러니까 곁가지 같은 거야. 진짜 사냥꾼은 잡으려는 사냥감을 속여. 사냥감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고, 그걸 바탕으로 유리한 곳으로 유인한 다음에, 정확히 심장에 화살을 쏘는 거지.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서 접근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야. 사냥감은…… 불안하지만 왜 불안한지 모르다가…… 한순간에 당해. 깔끔하게.

그 의사는 직접 자기의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화살도 없이 노루를 잡은 것이다. 숲에 널려 있는 덩굴로 만든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노루를 풀어 준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노루가 어디로 다니는지 알면 이렇게 잡을 수도 있지. 아는 게 중요하단다.

왜 그런 말이 떠올랐는지 단태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었다. 단태는 그 말을 꽉 붙잡았다. 아는 게 중요하다!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도양 같은 노예상인에게 당한 것이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

바닥에 앉아 위를 쳐다본 단태의 눈에 흔들리는 탑이 보였다. 그 위압적이었던 탑은 우스꽝스러웠다. 누군가 장난스레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쏟아지는 물 때문에 수면이 흔들려서 탑도 웅장함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본 순간 단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견고하고 압도적이어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토록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탑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단태는 좋았다.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물 밖으로 나온 단태는 어두워지는 도시를 쳐다봤다.

“엄마, 조금만 기다려 줘. 설희야, 오빠가 꼭 데리러 갈게.”

분수대 밖으로 나온 단태는 탑을 향해 걸어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자신을 피해 가는 사람들을 무시한 단태는 당당하게 탑 입구로 들어섰다. 꼼꼼하게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던 수련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뭐야?”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어요.”

“할아버지?”

“5층에 있는 엄포윤 어르신이 제 할아버지예요.”

“……그래?”

빨간 목도리를 두른 수련사는 뒤쪽에 서 있는 종자에게 지시했다. 올라가서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탑으로 들어오려고 줄을 선 사람들을 위해 옆으로 비켜선 단태는 전혀 기죽지 않고 이쪽을 힐끔거리는 수련사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핑계였다. 어차피 조용히 들어갈 수는 없었다.

곧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엄포윤이 보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노마법사는 단태를 보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손자……분 맞습니까?”

수련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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