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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할아버지! 조금 늦었어요. 죄송해요.”
단태가 끼어들었다.
“느, 늦었구나. 일찍 올 줄 알았는데. 맞네, 내 손자라네. 데리고 올라가도 되겠지?”
“네, 어르신.”
엄포윤은 단태의 손을 꽉 잡고는 출입구를 통과해 계단으로 데려갔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5층 연구실로 갈 때까지 엄포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연구실에 들어와 문을 닫은 그는 사정없이 단태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단태.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감히 도망쳐?”
“……죄송해요, 어르신. 문이 열려 있기에 복도로 나갔는데, 저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이 있어서 따라갔더니…… 탑 바깥이었어요. 어떻게든 돌아오려고 했는데 빨간 목도리를 한 그 아저씨가 지키고 있어서 무서웠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이에요.”
단태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 모습에 엄포윤은 씩씩거리면서도 더 이상 단태를 때리지 않았다.
“왜 할아버지라고 한 거냐?”
“할아버지 같아서요. 죄송해요. 아까 주신 음식, 너무 맛있었어요. 전 그런 음식, 몇 년 만에 먹어 봤어요.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는 절 위해서 닭을 잡아 주신 적이 있는데…….”
눈물을 짜낸 단태는 자신에게 이런 말솜씨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꿩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고, 함께 사냥을 가면 잡은 꿩을 구워서 먹었던 적도 있었다.
“됐다. 뚝 그쳐라.”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요?”
“어르신이라고 불러.”
“네, 할아…… 아니, 어르신.”
“들어가거라.”
“네.”
단태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왔고, 문이 곧 잠겼다.
한숨을 내쉰 소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난 사흘이 평생보다 더 길었다. 눈이 감기기 전까지, 단태는 탑에서 지내면서 최선을 다해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결심을 되새겼다.
‘두 번 다시는 속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곧 소년은 죽은 듯 잠이 들었다.
*동상이몽
단태가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일파만파 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엄포윤은 탑에서 유명한 마법사 중 하나였다. 실력으로 따지면 응당 타마가 아니라, 부마나 진마가 되어야 하지만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승급에서 매번 미끄러진 실력자였던 것이다.
특히 젊을 때부터 마법에 대한 탐구욕만이 왕성해 여자를 돌로 보는 마법사여서 내심 그를 우러러보는 젊은 수련사도 제법 있었는데, 갑자기 손자가 나타난 것이다. 손자가 있다면, 아내도…… 자식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들은 엄포윤이 여자를 만나고도 지금까지 잘도 숨겼다면서 소문을 퍼트렸다.
약제실에서 직접 채취한 수초의 건조 상태를 확인하던 엄포윤은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의외의 인물이 약제실 입구에 서 있었다. 적어도 엄포윤보다 열 살은 어린 남자가 물었다.
“뭘 하고 있나?”
깜짝 놀란 엄포윤은 그를 쳐다봤다.
약제실의 책임자인 진마 횡종도였다. 자연스러운 반말에 울컥 감정이 올라왔지만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탑에서는 경지와 등급이 곧 서열을 결정했고, 나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막넷동생뻘이지만 저항은 불가능했다.
“……형운세초를 살피고 있었……습니다만.”
“손자가 찾아왔다면서?”
엄포윤은 횡종도를 쳐다봤다.
‘이자가 왜 단태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말하지 않았지만, 다음 달에 있을 승급 시험에 자네를 부마의 후보로 올릴 계획이었어. 자네의 실력과 그동안의 업적이라면 어렵지 않게 부마가 될 수도 있는데,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더군. 손자 말이야, 자네는 그동안 탑을 속여 왔어. 가족은 없다고 기입하지 않았는가?”
40대 후반인 횡종도는 탑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써 내야 하는 신상명세서를 보여 주었다.
엄포윤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급 시험에 후보로 올릴 계획이었다? 헛소리였다. 10년이 넘도록 승급을 막은 장본인이 바로 저 작자였다. 게다가 언제 썼는지도 모를 저 서류를 가져와서 진지하게 말하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자네, 실망했네. 나뿐 아니라 자네를 눈여겨보고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이야. 아, 그리고 손자가 탑에 들어왔는데, 당연히 종자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엄포윤은 연구비로 단태를 구입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연구비는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논문을 위해 지출해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게다가 저 작자는 부하의 재정 상태까지 꿰뚫고 있는 터라, 노예 매매소에서 구입했다고 말한다면 거금이 어디서 났는지 추궁할 테고, 그러면 진실이 드러나고 말 터였다.
“그러면 종자방에 소식을 전하겠네.”
“……그렇게 하시지요.”
“내일 아침에 종자방으로 손자를 보내시면 될 거야. 나머지는 내가 다 처리하지.”
“……고맙습니다.”
횡종도가 나가자, 엄포윤은 쥐고 있던 약병을 벽으로 던졌다. 약병은 박살이 났다.
당장 연구실로 가서 그 녀석을 잡아다가 죽여 버리고 싶었다. 평범한 노예였다면 죽였을지도 몰랐지만, 그 꼬마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일지도 몰랐다. 탑의 서고를 뒤졌는데도 그 꼬마의 체질에 대한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역시 용금탄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륜사가 인솔자라는 점이었다.
감정을 흩어 버린 뒤에야 연구실로 간 엄포윤은 자물쇠를 열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단태는 서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네, 어르신.”
“넌 내일부터 종자방으로 가야 한다.”
“종자방에요?”
“자세한 건 거기서 들을 거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 넌 내…… 손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
엄포윤은 단태를 노려보았다. 혹시 이 녀석이 의도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할아버지라고 불렀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심을 풀 수가 없었다.
“잘 들어라. 넌 내 손자다. 만약 네가 내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넌 죽는다. 내가 널 죽일 거고, 탑도 널 죽일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엄포윤은 살기를 담아 위협했다.
“네, 할아버지.”
겁먹었지만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단태.
“그리고…….”
엄포윤은 단태의 팔찌를 풀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빠진 단태는 엄포윤이 주머니에서 꺼내어 내민 비슷한 재질의 고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예요?”
“발목에 차거라.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이곳에서 너는 어떤 사고도 쳐서는 안 돼. 절대로.”
단태는 내키지 않았지만 팔찌와 비슷한 재질의 발찌를 받아 발목을 둘렀다. 거무스름한 발찌가 연결되자 몸이 나른해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왜 발찌를 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엄포윤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답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단태의 속내를 무시한 엄포윤은 이 위험한 도박이 어서 끝나기를 빌면서 나름대로 준비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튀어나온 저 녀석 때문에 아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같이 보낸 하룻밤 만에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가 성장해서 단태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엄포윤이 만든 아들은…… 병약해서 공기 좋은 시골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탑으로 찾아올 일은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자,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