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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윤의 질문에 단태는 또박또박, 설득력 있게 말했다. 아이다운 상상력이 가미되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진짜 같았다.
엄포윤은 단태가 상당히 똑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들은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각색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엄포윤을 보며 단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 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나요?”
“지난번처럼 탑 밖으로는 나가지 말거라.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은 아예 하지 마라.”
“네, 할아버지!”
깡충깡충 뛰고 싶지만 다리가 묵직해서 그저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단태의 반응을 살피던 엄포윤은 몸을 돌려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저 아이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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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한마디 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너무나 평범한 호칭인 ‘할아버지’가 기적을 이뤄 낸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 노마법사의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는데 마음껏 탑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쇄되었다.
종자방은 탑의 지하에 있었다. 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책상이 있고 그 너머에 체구도 작고, 얼굴도 작은 주름진 노인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여기로 가라고 해서요.”
“이름은?”
“단태입니다.”
워낙 익숙해서 이름을 바꾸었다가는 오히려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포윤은 단태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었다. 단태도 같은 생각이었다.
“단태? 아, 엄포윤 타마 어르신의 손자로구먼. 종자방에 대해서는 알고 왔나?”
“잘 몰라요.”
“좋아.”
그 노인은 단태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조그만 책자들이 빼곡히 쌓인 탁자, 수십 개의 약병들, 여러 종류의 서류들, 정사각형의 나무 상자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종자는 기본적으로 마법사를 위해 존재하지. 마법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내는 게 종자의 본분이야.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무조건 해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능력 있는 종자의 자세라네. 알겠나?”
“……네.”
단태는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싫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으면 육성국 산하 마교원으로 옮겨 갈 수 있네. 거기 가면 진짜 마법을 배우겠지만, 종자로서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거기 과정을 따라갈 수가 없지. 말하자면, 종자는 마법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는 걸세.”
“아!”
단태의 탄성에 기분이 좋은 종자방의 터줏대감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알려 주었다. 마법사의 심부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마법사가 될 수 있는지, 탑은 어떤 조직인지를 알 수 있으며, 주로 어떤 심부름을 하는지도 설명했다.
종자가 자주 드나드는 곳은 온갖 종류의 마법 재료가 비치된 약제실, 마력석을 공급하는 배급실, 망토를 비롯해서 옷을 빨아 주는 세탁실, 마법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요리를 만들어 주는 마주방, 반지와 팔찌 등 마법과 관련된 물건을 보관하는 마구방, 각종 편지를 관리하는 우편실 그리고 지하 서고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단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기뻤다. 이곳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오너라.”
노인은 단태를 큼지막한 방으로 데려갔다.
벽에 백 명이 넘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엄포윤도 있었다. 이름 앞에 있는 타마, 부마, 진마 등이 무슨 뜻인지 단태가 묻자 노인이 알려 주었다. 마법사의 경지였는데, 모두 아홉 개였다.
제일 아래는 당연히 종자였다. 그 위로 생도, 수련사가 있었는데 생도는 육성국 산하 마교원에서 본격적으로 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었고, 수련사는 마교원 과정을 끝마치고 마법사가 되려고 승급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타마는 최초의 승급 시험을 통과한 정식 마법사의 경지였다. 타마가 되어야 공식적인 마법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 위로 부마, 진마, 강마, 용마 그리고 천마가 있었다.
“천마의 자리에 오른 마법사님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단 일곱 명뿐이야. 아쉽게도 우리 마둔수탑에는 없지.”
설명은 이어졌다.
단태는 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두 번 다시 모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당하기 싫어서였다.
그런 태도 때문에 노인은 더욱 열정적으로 알려 주었다.
“자, 대충 설명은 끝났으니 네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마. 원칙은 마법사님이 종자를 선택하는 것이지만, 넌 예외적으로 들어왔으니 빈 곳으로 가야겠지? 어디 보자, 여기가 좋겠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벽에 있는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마법사들의 명단은 나무뿌리를 뒤집은 형태였는데, 노인이 가리킨 곳은 위쪽이었다. 단태는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는 순간이어서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런 단태를 보더니 노인이 웃음 지었다.
“까다로운 분이야. 벌써 몇 명의 종자를 쫓아 버렸거든. 하지만 자네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네, 어르신.”
“어르신?”
노인은 박장대소했지만 만족하는 눈치였다.
보통 종자라고 해도 마법사를 꿈꾸는 부잣집 출신이거나 명망 있는 집안 자제여서 오만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앞으로 마법사가 되어 천하를 호령할 꿈에 부푼 그들에게 종자방에서 늙어 가는 노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매번 종자가 새로 올 때마다 건방진 행태에 화가 나는데도 후환이 두려워 참을 수밖에 없었는데, 솔직하면서도 예의 바른 단태의 행동에 노인은 해 줄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분이 절 싫어하시면 어쩌죠?”
“음, 다른 마법사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은 배속 기간이 아니라서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거다. 규정 때문에 탑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지. 넌 엄포윤 어르신의 손자니까 당분간 바깥에서 지내도 상관없을 테니, 너무 애쓰지 마라.”
단태는 얼굴이 노래졌다. 무일푼으로 쫓겨나면 저 바깥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뻔했다. 엄마, 여동생을 찾기는커녕 광장을 벗어날 수조차 없을 터였다.
자신을 ‘종춘’이라고 밝힌 노인은 단태의 표정을 가벼운 불안이라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장 깨끗한 종자복을 내주었고, 신발은 덤으로 두 켤레나 주었다. 요대도 두 개, 속옷은 세 벌, 들고 다녀야 할 작은 흑판은 두 개를 챙겨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몸에 딱 맞는 종자복으로 갈아입고 위로 올라온 단태는 말의 위력을 새삼 깨달았다. 그저 잘 듣기 위해서 애를 쓰며 ‘어르신’이라고 불렀을 뿐인데, 대우가 달라졌다.
그래, 륜사라는 마법사도 사람이다. 최선을 다하면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2층까지 올라온 단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7번 방을 찾아냈다. 문 앞에 선 단태는 옷매무새를 살피고는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좀 더 세게 두드렸다.
“누구야?”
터져 나온 목소리.
“새로 온 종자인데요.”
“들어와.”
문을 연 단태는 엉망진창이 된 방을 볼 수 있었다.
방이 상당히 낯익었는데, 어제 탑 밖으로 빠져나가다 만난 그 빨간 목도리 두른 여자가 데려온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그 여자가 여기 있을까? 엄포윤의 손자라는 거짓말을 알아내면 어쩌지?
“이쪽이야.”
목소리만 들렸다.
쓰레기처럼 흩어진 물건들 사이로 조심조심 걸어간 단태는 텅 빈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는데.
“위쪽.”
천장에 붙어 있는 남자를 발견한 단태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등을 위로 해서 천장에 찰싹 들러붙은 남자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단태는 넋을 잃고 그 사람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저런 자세로 있을 수 있지? 혹시 마법인가? 너무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름?”
“……단태입니다.”
황급히 대답한 단태.
“아, 그 유명한 타마 엄포윤 어르신의 손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