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화 (1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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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윤은 륜사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혹시 단태의 재능을 눈치챘을까?

발목에 채워 놓은 ‘마쇄’를 풀면 기초적인 마법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함정을 놓았을까?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포기해야 할 테지만, 문제는 단태가 마법사를 구하지 못하면 탑에서 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동안 단태를 탑 밖에 숨겨둘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 다른 사람이 낚아챈다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다.

손자만 아니라면 직접 종자로 삼았을 텐데. 은밀하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먼 곳으로 보낸 바보 같은 종자는 쫓아 버리면 그만이다. 안타깝게도 가족, 친척은 종자로 삼을 수 없었다. 탑의 규율이었다.

이 모든 게 저 멍청한 녀석이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벌어진 사태였다. 일은 커져서 남모르게 덮어 둘 수준이 아니었다. 들통이 나서 끝장나거나 계속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엄포윤은 처벌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탑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탑은 청춘을, 삶을 고스란히 바친 곳이 아닌가.

살다 보면 언젠가 한번쯤은 일생을 걸고 도박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내몰려 도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제3의 선택이 남아 있다. 저 녀석을 없애버리고 탑을 떠나는 것이다. 먼 곳에 정착해서 이름까지 바꾼다면 현상금 사냥꾼도 쉽게 따라붙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엄포윤은 스스로 도박을 택했다.

한 번 사는 인생이 아닌가.

그는 단태에게 꼼짝 말고 있으라고 말한 다음, 20층으로 올라갔다. 탑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업무를 보조하는 보주관 막경탁에게 탑주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부마인 막경탁은 황당하다는 듯 엄포윤을 노려봤다.

“무슨 일로 탑주를 만나려는 거지?”

“그게…… 직접 탑주를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당신, 노망났어?”

30대 중반인 막경탁의 말에 엄포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수치를 참고 살아야 하다니.

그때, 탑주가 밖으로 나왔다. 엄포윤과 막경탁을 본 그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엄포윤이 선수를 치자 막경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짧게 끝낼 수 있다면 들어 보지.”

“금방 끝날 겁니다.”

“좋아. 따라오게.”

탑주는 엄포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막경탁은 문 앞을 서성거리며 어떻게 건방진 노인을 응징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자, 말해 보게.”

“소문, 들으셨습니까?”

“소문? 아, 자네에게 손자가 있다는 소문 말인가?”

“……그렇습니다.”

“나도 귀가 있네.”

탑주는 별 뜻 없이 웃었지만 엄포윤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탑주가 알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평생 마법에 헌신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건만, 그 녀석 때문에 명성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탑주를 쳐다봤다.

“손자가 아니라, 노예입니다.”

“노예?”

“얼마 전에 매매소에서 구입한 노예입니다.”

“……그래서?”

탑주는 웃음기를 지웠다. 손자로 둔갑한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까지 와서 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그 아이의 몸이 심상치 않습니다. 생전 처음 본 소마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걸 보고 거금을 들여 사들인 그 아이에게 칠보주를 쥐어 보라고 했는데, 확실히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풍주를 쥐자 제 연구실이 아수라장이 될 정도로 강풍이 불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탑주께서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풍주라면……?”

“천린풍탑입니다.”

엄포윤은 내부가 갈라져 금이 간 구슬을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투명한 구슬을 집어 든 탑주는 꼼꼼히 안쪽을 살폈다. 힘을 가한다면 바깥쪽 표면부터 부서지는 구슬인데, 이처럼 중심부에 균열이 생겼다면 저 노마법사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정말 천린풍탑과 관련이 있는 아이라는 말인가?”

탑주는 풍주를 엄포윤에게 돌려주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가능성은 높은 편입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재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엄포윤은 풍주를 주머니에 넣었다.

“한 가지 묻겠네. 그 아이를 구입한 이유가 뭔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운세초의 효능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실험을 위해 그 아이를 구입했습니다.”

“……실험용 노예 구입은 금지된 지 오래라네.”

“알고 있습니다.”

엄포윤은 손으로 깍지를 꼈다. 터질 듯한 긴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마법 연구에 사용할 수 없다는 ‘하랑의 선언’은 마둔수탑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탑 모두가 준수하는 협약 중 하나였다. 그걸 깨뜨렸다고 자백한 셈이니 만약 탑주가 밖에서 이를 가는 보위관을 불러 그 사실을 알리면…… 엄포윤은 당장 지하 기율옥으로 끌려가고 말 터였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그는 탑주가 말하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계속해 보게.”

다 들은 후에 판단을 내리겠다는 뜻이다. 엄포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에 설명을 이었다.

“천린풍탑은 그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천파 대제국 시절부터 대륙을 휩쓸었던 마법의 탑이 아닙니까? 천린풍탑의 역사는 족히 천 년이 넘습니다. 멍청한 역사가들은 천린풍탑이 완전히 무너져 형체도 없다고 말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면 어디엔가 천린풍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인생의 후반기를 천린풍탑의 소재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던 대마법사 하랑의 결론을 탑주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천린풍탑은 바람을 다스리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게 하랑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이용해서 천린풍탑을 찾고 싶다는 건가? 재미있군.”

탑주는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압니다. 그래서 은밀히 오금반서관에 가서 그 아이가 정말 ‘바람의 몸’을 타고난 것인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변동 사항이 생겼구만.”

탑주는 예리했다.

“그 아이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저를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그로 인해 졸지에 제겐 손자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공식적으론 부인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탑의 내규로 인해 그 아이를 종자방에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종자방은 그 아이를 륜사의 종자로 결정했습니다.”

“사제의 종자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엄포윤은 륜사의 종자가 되지 못하면 탑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럴 경우 단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왜 탑주를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때, 막경탁이 들어왔다.

“11인위원회에 늦지 않으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나가서 기다리게. 곧 끝날 테니.”

“……알겠습니다, 탑주님.”

막경탁은 문을 닫고 나가기 전 엄포윤을 사납게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 날 찾아온 이유를 말해 보게. 넋두리를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나?”

“륜사 님께서 그 아이를 종자로 받아들이게 도와주십시오.”

“그로 인해 내가 얻는 것은 뭔가?”

“천린풍탑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그런 탑, 먼지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지금 당장 기율실에 연락을 취하셔도 됩니다.”

엄포윤은 승부수를 던졌다.

어느 정도는 확신을 했지만, 사람의 마음만큼 예측 불가능한 것도 없었기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탑주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누마탄이 천린풍탑의 전설에 매료되어 한동안 대륙을 돌아다닌 적이 있음을 엄포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니 이런 기회를 발로 차 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다른 방법도 있지. 만약 자네를 없애 버리고,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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