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7화 (17/293)

<-- 17 회: 1-14 -->

그 말에 엄포윤은 몸을 움찔 떨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직접 움직이기엔 부담이 있지 않겠습니까? 탑주님이 움직이면 그건 곧 마둔수탑의 공식적인 행보가 됩니다. 그러면 시장님과 11인위원회의 나머지 분들이 우려를 금하지 못할 겁니다만.”

“자네, 생각이 깊군.”

탑주는 진심으로 눈앞의 노인을 다시 봤다.

물의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권력의 정점에 선 시장과 그 아래에 있는 11인위원회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내부 관계와 치열한 경쟁, 미묘한 균형에 대해서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시민의 대다수는 숲처럼 뭉뚱그려서 볼 뿐, 나뭇가지가 어떻게 뻗어 있는지는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탑주께는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때 처벌을 해도 늦지 않을 테고, 성공한다면 천린풍탑을 찾은 명예와 거기 잠들어 있을 진귀한 마법서, 보물의 대부분이 탑주님의 몫이 될 테니까요. 어떻습니까?”

“음…….”

누마탄은 잠시 손익을 따져 보았다.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 잘못되더라도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탑주는 단순히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녔다고 해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마법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기술이 필요했는데, 그 기술의 핵심은 ‘신중함’이었다. 드러내어 움직였다가는 어둠 속에서 칼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시장은 언제든 늑대로 돌변할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긴 탑주를 보며 엄포윤은 바싹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늙어 가면서 나름대로 본 바를 기탄없이 말했는데, 탑주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이건 자네와 나만 아는 비밀일세. 만약 비밀이 새 나간다면?”

“이런 이야기 자체를 부인하시겠지요.”

“말이 통하는군. 따로 필요한 건 없는가?”

“경제적인 후원이 필요합니다만.”

“조치하겠네.”

“감사합니다, 탑주님.”

“난 결과를 원하네. 만약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날 원망하게 될 거야.”

“……그럴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가 보게.”

그 말에 일어선 엄포윤은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몸으로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다.

겨우 탑주실 밖으로 나왔는데, 속옷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막경탁이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다가왔다.

“당신, 가만두지 않겠어.”

“……죄송합니다만, 늙어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그렇게 말한 엄포윤은 비틀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무사히 빠져나오면 이런 기분일까?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도박이었다. 풍주를 쥘 때 바람이 조금 불었다고 해서 그 아이가 천린풍탑을 찾아내고, 거기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탑주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풋,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다. 은밀히 손을 잡았지만, 각자의 생각은 같지 않았다. 천린풍탑을 찾을 때까지는 협력이 유지되겠지만 그다음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조금씩 힘이 생겼다. 육체의 힘이 아니라, 이 탑의 권력구조 정점에 서 있는 탑주와의 담판에서 나름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주는 쾌감이었다.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용기를 발휘했더라면 이렇게 늙어가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녀석이었다.

또 무슨 짓을 해서 화를 자초할지 모르는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최소한 비밀은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다뤄야 할까?

둘 중 하나였다.

더 억누르고 겁을 줘서 아예 딴생각을 못 하게 만들거나, 감동시켜서 마음을 얻거나.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탑주가 한 것처럼 엄포윤도 계산을 했다. 어느 쪽이 좋은지. 마법은 강요와 협박으로 이룰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도 태산처럼 정복할 수 없는 게 마법이었다. 그러니 후자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진짜 할아버지가 되어야겠군.”

엄포윤은 웃는 연습부터 했다.

최대한 자상하게.

“아, 그렇지!”

단태의 마음을 얻을 방법 하나를 생각해 낸 엄포윤은 서둘러 탑을 빠져나갔다.

@

엄포윤이 소마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을 때, 단태는 수천 개의 약병이 빼곡히 쌓인 연구실 바닥에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강물 바닥에, 저 탑 바깥 분수대 바닥에 앉아서 깊이 고민한 것처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탑 밖으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나가 봐야 가족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이 냉혹한 도시에서 돈을 벌 방법을 찾는 것보다는 노예로 잡혀 팔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아! 그 구슬!”

단태는 연구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손에 쥔 순간 돌풍을 일으킨 그 구슬을 찾으면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몸을 천장에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서랍이며 나무 상자며 다 뒤졌지만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엄포윤이 다른 곳에 숨긴 모양이었다.

지친 단태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무슨 수로 천장이 달라붙은 그 마법을 하루 만에 익힐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앞이 깜깜했다.

단태는 아예 누워 버렸다. 이 순간 엄포윤이 들어와 야단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여기서 쫓겨나면 가족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생각만 했다. 어떻게든 여기 남아야 한다.

잠시, 탑 밖으로 가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도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탑이 있는 조그만 섬에서 탈출할 수도 있을 테고, 더 운이 좋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돈을 벌 수도 있으며, 그보다 더 운이 좋다면 엄마와 설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운수대통이라면…….’

단태는 이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올렸다. 운을 믿어? 다른 사람을 믿어? 그랬다가 이 꼴이 되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길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때, 연구실을 가득 채운 약병이 눈에 띄었다. 상체를 일으킨 단태는 저 약병에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마법을 펼친다는 엄포윤의 말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단태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손을 뻗어 약병을 손에 쥐었다. 처음 몇 병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황록색 잎사귀가 든 병을 들자 희미한 전율이 느껴졌다. 뚜껑을 열어 그 잎사귀를 만지자 전율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바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병을 꺼냈다. 만져 보고 무언가 느낌이 있는 약병은 한쪽으로 모았다.

그런 식으로 수백 개의 병을 만지자 열 개 남짓한 약병이 추려졌다. 짜릿한 느낌이 강한 순서대로 모았지만 어딘지 부족한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는데 약병이 쌓여 있던 선반 아래 벽에 있는 미세한 틈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가서 자세히 살피니 숨겨진 수납공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위에 있던 약병의 반도 안 되는 조그만 약병들이 거기 가득 들어 있었다.

단태는 작은 약병들을 꺼내어 쥐는 순간 깜짝 놀라 약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위에 나와 있는 약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율이 강했던 것이다.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약병을 만졌는데, 그중 하나를 손에 쥐니 주위에 미풍이 불었다.

“이거다!”

단태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희열은 빠르게 사라졌다. 미풍만으로는 안 된다. 좀 더 강한 바람이 필요하다.

망설이던 단태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푸르스름한 약초가 건조 상태로 약병 안에 들어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 그 약병을 흔들어 약초를 잎사귀 하나를 손바닥에 꺼내고는 입으로 털어 넣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물을 찾아서 마신 단태는 잠시 기다렸다.

반응이 왔다.

몸 안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가슴과 배 속이 서늘해지는 듯하더니, 몸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희미한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자 주위에 널린 약병들이 서로 부딪쳐 청명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놀란 단태가 언젠가 들었던 노래를 떠올리자, 약병들이 부딪혀 만드는 소리가 그 노래의 선율로 변했다.

“어……?”

선율은 사라졌다. 착각이 아닐까 싶을 만큼 빠르게.

‘일단, 이 약초가 효과가 있으니…… 더 먹어 보자.’

단태는 한꺼번에 잎사귀 다섯을 입에 넣고 삼켰다. 훨씬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나 몸을 띄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바람의 방향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마법사는 몸을 천장에 붙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바람이 아래쪽으로 집중되더니 몸이 살짝 떴다. 단태가 놀라서 버둥거리자 바람은 흩어졌고, 단태의 발은 바닥에 붙었다.

‘생각하는 대로 되는 거야?’

단태는 확인하기 위해 그 약초를 먹었다. 바람이 불자, 집중하여 천장에 붙은 륜사를 떠올렸다. 그러자 바람이 몸을 밀어 올렸다. 바람의 세기가 일정하지 않아서 몸이 흔들리자 단태의 집중력도 덩달아 흔들렸고, 몸무게가 바람의 힘을 이겨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