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9화 (1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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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처음 엄포윤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노마법사는 친절, 배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어린 노예를 작은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 단태가 느끼는 고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단태가 의도치 않게 ‘할아버지’라고 부른 이후 엄포윤의 행동이 바뀌었다.

잠시 동안은 엄포윤이 마음이 변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진실을 숨기려는 엄포윤을 보면서 단태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직감했다. 의심이 시작되자, 단태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노마법사는 왜 매매소에서 자신을 샀을까?’

불쌍해서?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태는 두루마리를 찢으라는 엄포윤을 기억해 냈다. 엄포윤은 고통 때문에 두루마리 찢는 걸 두려워하는 단태에게 그걸 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었다.

‘그 노인은 날 이용하기 위해서 사들인 거야. 두루마리를 찢은 후에 내 몸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려고 날 산 거지.’

단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엄포윤은 아이를 더 기쁘게 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 기쁜 소식이 있다. 용마 륜사 님이 널 종자로 받아들일 거다. 내가 널 그분에게 보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엄포윤을 향한 단태의 의심이 커졌다. 스스로 애를 써서 륜사의 허락을 받았는데, 저 노마법사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내가 널 돈으로 샀지만, 이제부터 넌 내 손자다. 손자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손자. 알겠느냐?”

“그러면 발찌, 풀어도 될까요? 그거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조금만 걸어도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아요.”

“그 발찌, 다 널 위해서 채운 거란다. 조금만 참아라. 곧 풀 날이 올 테니까.”

“네, 할아버지. 아! 아까 어떤 마법사님이 지나가던 절 부르시더니 물어보셨어요.”

“……뭘 물었지? 어떻게 생긴 놈이었어?”

엄포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냥 평범한 분이었어요. 그분은 최근에 두루마리를 찢은 적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그, 그래서?”

눈에 띄게 당황한 엄포윤.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런 적 없다고 했어요. 저, 잘했죠?”

“……아주 잘했구나. 착한 손자니까 용돈을 줘야겠다.”

엄포윤은 돈주머니에서 1마전을 꺼내어 단태에게 건넸다. 단태가 돈을 보고 좋아하자 엄포윤이 슬쩍 덧붙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럼요.”

단태는 순진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부러 있지도 않은 마법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륜사의 수련사 여화를 빗대어 한 말로 엄포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엄포윤은 적잖이 당황했고, 흔들리는 마음을 단태에게 들켰다.

단태는 또 다른 질문을 찾아냈다.

‘노마법사는 왜 노예를 손자라고 인정했을까?’

며칠 지내 보니 노마법사는 평소 살뜰하게 사람을 아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노예를 손자로 인정할 리는 없다. 도양이 친절한 이유는 빚을 지워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저 노인도 이유가 있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리라.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래, 순진하고 귀여운 손자가 되자. 그러면서 노마법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손자로 받아들였는지 알아내자. 그 이유를 찾는다면 언젠가 탑을 벗어나 엄마와 여동생을 찾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손자인 척할 수밖에 없으리라.

*신고식

누천파는 눈을 감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감고 있었다. 명상은 처음 접할 때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왜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익숙해지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을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딱이었다. 어젯밤 늦게부터 그는 저택 뒤쪽 숲 중앙에 높인 납작한 바위에 앉아 명상을 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새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서늘해진 공기에서 미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어젯밤 누천파는 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꼭 가고 싶었던 용혈에 왜 하필 륜사와 함께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종일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불평에 시달렸던 아버지 누마탄은 망토를 벗어 아내에게 건네고는 아들을 쳐다봤다. 냉정한 시선이었다. 문득 누천파는 형이 죽은 이후 한 번도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싫으면 가지 마라.”

“……아버지!”

이번 임무는 현존하는 용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진 고룡 암탄주를 직접 만나 볼 유일한 기회였다. 암탄주는 죽어 가고 있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터였다.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아버지 때문에 누천파는 속이 상했다.

“내가 네 비위까지 맞춰야 하느냐?”

“…….”

“쉬고 싶다.”

“륜사 님은 안 돼요.”

“벌써부터 탑주가 된 것 같구나.”

산적한 문제로 골치가 아파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른 아버지는 비꼬듯 말했다.

“……륜사 님이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륜사는 내 사제다. 제멋대로지만 그 임무엔 적임자야. 그래서 결정한 거고. 그러니 왈가왈부하지 마라. 넌 탑주가 아니라, 계승자다. 벌써부터 선을 넘으려 한다면, 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아버지…….”

계승자의 지위를 흔들 수도 있다는 말에 누천파는 깜짝 놀랐다.

“경쟁이 당사자에겐 힘겹지만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제법 많지. 너무 안심하지 마라. 꼭 아들에게 탑주의 자리를 넘겨 줘야 할 이유는 없단다. 피곤하니 나가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온 누천파는 안쓰러워하는 어머니의 시선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끼어들어 아들의 편을 들어주는 대신 그저 듣기만 하는 어머니의 나약함이 싫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고함을 지르며 책과 장식품을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왜 아버지는 저렇게 냉정할까?

씩씩거리던 누천파는 저택 밖으로 나왔고, 돌아다니다가 그리 크지 않은 숲으로 들어섰다. 처음 명상을 배웠던 납작한 그 바위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았다.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하늘은 별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그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누천파는 눈을 감았고, 동틀 무렵까지 마음을 채운 잡다한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제거하고 있었다.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 있어서 춥지는 않았다. 눈을 뜬 누천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약점을 잘 아는데도 한번 화가 나면 참기가 어려웠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곤 했는데, 다행히 어제는 이 납작한 바위 덕분에 흥분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군왕은 바다와 같다.”

“……≪무무비경≫?”

누천파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무무가 쓴 ≪무무비경≫은 군왕의 길을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풀어 놓은 책이었다. 누천파는 그 책을 욀 정도로 읽었는데, 매번 융 왕국 초기에 활동한 현자이자 지혜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무무의 깊은 통찰력은 누천파의 내면을 흔들었다. 왕을 아버지에, 백성을 자식에 비유한 무무는 제왕학의 기둥이기도 했다.

부채를 손에 쥔 스승이 다가왔다.

누천파는 일어서려다 다리에 쥐가 나서 다시 앉고 말았다.

“앉아 있어. 여기서 밤을 새운 건가?”

“……그렇습니다.”

스승은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는 바위로 올라가 누천파 맞은편에 앉았다.

“과제는 했겠지?”

“네, 스승님.”

노예 매매소에서의 일을 떠올린 누천파는 자신 있게 답했다. 그 중년의 여자는 한동안 아들과 딸을 찾으면서 질질 짰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잠잠해졌다. 집안 관리를 도맡은 방굉이 버릇을 단단히 잡은 것이다. 노예는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굉장해 중요했다.

스승은 가만히 누천파를 쳐다봤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과제를 안 했구먼.”

“지금이라도 저쪽 숙소로 가서 매매소에서 구입한 노예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누천파는 슬슬 약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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