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0화 (20/293)

<-- 20 회: 1-17 -->

“내가 왜 그런 과제를 자네에게 주었을지 생각은 해 봤나?”

“…….”

“입이 뚫려 있으니 말해 봐. 멍청이처럼 눈만 껌벅거리지 말고.”

“노예 매매가 이 도시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았으니, 실제로 노예 매매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노예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노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등등 직접 경험하여 알아보라는 이유가 아닙니까?”

“말은 뻔지르르한데, 틀렸어.”

누천파는 스승을 노려봤다. 만나 본 사람 중에 웃으며 상대의 속을 긁는 기술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보다도 한 수, 아니 두 수 위였다. 아무리 오랫동안 명상을 해도 이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속에서 불이 솟구칠 것 같았다.

“……뭐가 틀렸습니까?”

“자넨 거기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나?”

“전 느낌이 아니라,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 지혜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만.”

“무무가 한 말이지. 지혜는 감정과 상극이라고. 한데 이런 말도 했지. 모든 지혜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고. 어떤가?”

“그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물과 같은, 그래서 이리저리 날뛰는 감정이 아니라 중심 잡힌 냉철한 사고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누천파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자네 마음은 냉철한가? 그래서 분을 삭이려고 밤새 이런 돌에 앉아 있었나? 아버지에게 상처 받은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

누천파는 몸이 떨렸다.

“흉내 내지 마라, 꼬맹아.”

스승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비아냥거리는 가볍고 투박한 말투가 아니라, 묵직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분위기가 목소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천파는 깜짝 놀라 스승을 쳐다봤다.

“넌 무무가 아니다. 무무를 동경하는 철부지 꼬맹이에 불과해. 그러니 너 자신을 학대하지도, 과장하지도 마라. 그게 지금 네가 가져야 할 지혜니까.”

“나는…….”

“네가 동정심을 가지길 바랐다. 세계의 지혜를 전부 머릿속에 담아도 타인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면, 그건 무시무시한 백정의 칼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게 무무의 주장이고, 내 생각이다. 그런 관점에서 넌…… 휴우, 말하기조차 싫다. 네 어머니뻘인 그 여자 노예를 돈 주고 사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네 환경을 고려하면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질 수도 있음을 나는 안다. 넌 계승자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계승자이기 때문에 더욱 다른 사람의 감정, 그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노예와 이야기는 나눠 봤느냐?”

누천파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스승의 말에 화가 났지만 그 감정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그때, 아침의 첫 햇살이 숲을 뚫고 두 사람을 비추었는데, 비웃는 스승은 햇살을 받아 더욱 비열해 보였다.

“전 노예 따위와는 말을 섞지 않습니다.”

“왜?”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더러워? 노예들이?”

“그 나약함이 제게도 묻을까 두렵습니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짜증이 나서 한 말이었다.

“자네는 시간이 흐르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탑주가 될 테지?”

“그렇습니다.”

누천파는 그때가 되면 이 수치를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 때문에 ≪무무비경≫을 읽었을 테고?”

“잘 아시네요.”

비웃는 누천파.

“계속 그런 식으로 살면 자넨 탑주가 될 수 없네.”

누천파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에게는 책만 읽은 서생 따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은 말을 이었다.

“무무는 군왕을 바다에 비유하고, 백성을 그 바다로 흘러드는 온갖 종류의 물에 비유했지. 바다는 거부하는 법이 없어. 똥물도, 깨끗한 샘물도 바다는 항상 받아들이거든. 아무리 더러운 물도 일단 바다에 흘러들면 곧 깨끗해진다네. 바다가 위대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무무가 왜 군왕을 바다에 비유했는지 아는가? 바로 나라를 이루는 백성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길 바라서야. 군왕은 누구보다도 먼 곳을 봐야 하지만, 또 누구보다도 더 깊이 볼 수 있어야 한다네. 지혜를 갖추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지. 자넨 ≪무무비경≫을 애지중지 아끼면서 노예와의 대화조차 거절했네. 그러고도 자네가 탑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노예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게. 자네가 탑주가 되면 아랫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네 비위나 맞추겠지. 그러면 탑은 어떻게 되겠나? 엉망진창이 되겠지. 어쩌면 자네가 탑을 무너뜨릴지도 모르지.”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남았네. 나 명국영, 수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그 지혜를 인정받아 황제 폐하까지 알현했네. 그런 내가 일곱 번이나 직접 찾아오신 자네 아버지, 누마탄 님의 얼굴을 봐서 자네를 지금까지 가르쳤네. 두어 달에 불과하지만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지. 겉으로는 고요하고 차분해서 인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오만하고 건방지며 이기적이지. 나 스스로 끈질기다고 자부하지만 자네의 그 태도를 참고 가르칠 만큼 마음을 단련하진 못했네. 아버님께는 송구하다고 전해 주게.”

30대 후반의 스승은 부채를 펼치더니 산책하듯 가 버렸다.

황제를 알현했다는 이야기에 누천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관리 등용 시험인 ‘용문거’에서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그 어렵다는 용문거에서 수석이었다니! 그런 인물을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누천파는 당장 달려가 명국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까져도 개의치 않았다.

“……어리석은 제자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일없다.”

명국영은 부채를 흔들며 갔지만, 누천파는 다시 그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하자 비단 옷은 찢어지고, 무릎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무릎으로 기다시피 쫓아오는 누천파를 본 명국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마음을 고쳐먹겠느냐?”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함부로 말했습니다. 스승님,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좋아.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마지막 기회야. 과제를 통과하면 제자로 받아 주고, 그게 아니면 더 이상 난 자네의 스승이 아닐 거야.”

“알겠습니다.”

누천파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과제를 주지. 용금탄에 가면 오금반서관이라는 곳이 있네. 들어 봤는가?”

“……제자, 불민하여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책 한 권을 찾아오게. 내가 거기 있는 책을 거진 다 읽었는데, 나라는 인간을 바꾼 책이 딱 한 권 있네. 그 책을 가져오게.”

“…….”

“그럼, 여행 잘 갔다 오게.”

명국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솔길로 사라졌다.

누천파는 홀로 숲에 남아 명국영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수도 용금탄의 서관이라면 못해도 수천 권, 어쩌면 수만 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을 터였다. 거기서 단 한 권의 책을 찾아오라니. 제목도 알려 주지 않고, 그저 명국영이라는 사람을 바꾼 책이라니.

기회를 준답시고…… 쳐 내려는 수작이 아닐까?

아니, 아니야.

그렇다면?

‘나더러 거기 처박혀서 책을 읽으라는 거로군. 서생다운 발상이야. 책에 길이 있다고 믿는 걸 보면.’

명국영의 의도를 간파했다고 확신한 누천파는 피부가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을 살폈다. 괜히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근처에서 적당한 약초를 찾아다가 입에 넣고 오물거려 만든 녹색 덩어리로 지혈했다. 어릴 때부터 탑을 드나든 터라 웬만한 마법사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명국영이 요구한 그 책을 찾아내어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말리라. 그런 다음, 평생 쌓았을 지혜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낼 것이다.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될 때, 오늘의 수치에 이자까지 더해서 내치리라.

누천파는 명국영이 자신에게 한 말, 그런 식으로 살면 탑주가 될 수 없다는 그 독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명국영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그가 옳다면 세상은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선량한 사람들로 가득 차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누천파가 보기에 명국영은 현실 감각이 부족한 사람 같았다.

“난 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