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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뭐든 열심히 했다.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서였다.
시간만 나면 약제실, 배급실, 세탁실, 마주방, 마구방, 우편실, 지하 서고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들어갈 때 크게 인사했고, 나올 때도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종자방의 종춘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자로 들어왔다가 결국 생도가 되지 못해 평생 탑에서 종자로 늙어 가는 많은 사람들이 단태를 마음에 들어 했고, 뭐든 알려 주곤 했다.
단태는 오래지 않아 그들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직 어리거나 젊어서 생도가 될 가능성이 높은 종자들 대부분이 그들을 무시하고, 가끔은 아예 아랫사람 취급했던 것이다. 단태는 그들이 무언가 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내비치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특히 관절염 특효약에 꼭 들어가는 형운세초를 약세실에서 가져올 때면 소량이라도 덜어서 무릎이 아파 고생하는 늙은 종자들에게 나눠 주곤 했는데, 그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관절염으로 고생하셨기 때문이었다.
탑은 철저하게 서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늙은 종자들 밑에는 잡다한 일을 위해 구입한 노예들이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이 탑의 밑바닥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무시를 당하면서도 탑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동안 부지런히 심부름을 하면서 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한 단태는 표정이 가장 좋고, 여유도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늙은 종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젊은 종자는 어떻게든 마법사의 눈에 들어 생도가 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모시는 마법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종자는 생도가 될 수 없어서였다. 그러니 여유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생도라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어서 교육 과정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중시하기에 어떤 사람은 몇 년 만에 졸업하는데, 가끔은 십 년이 넘도록 생도로 불리는 사람도 있었다. 과정을 마쳐 수련사가 된 사람들도 쫓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승급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으로 마법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승급 시험도 만만찮았다.
단태가 보기에 마법사들도……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마법사들도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던 것이다. 타마는 부마가 되려고 했다. 부마는 진마가, 진마는 강마, 강마는 용마 그리고 용마는 천마가 되고 싶어 했다. 그 천재 마법사인 륜사조차 강박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을 쪼개어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 최고의 경지인 천마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 구조를 알게 된 단태는 노예 매매소에서 자신을 사들인 엄포윤이 타마라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곧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종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종춘은 단태가 마주방에서 가져온 동그란 과자를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엄포윤 어르신, 자네 할아버지는 참 안타까운 분이야. 실력은 충분한데, 줄을 잘못 섰거든. 위로 올라갈 절호의 기회가 있었는데 선택을 잘못한 거야.”
“줄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겉으로 보면 마법사님들은 다 공평하고 오로지 마법을 위해서만 살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과 비슷한 면도 많지. 실력으로만 승급 시험을 치른다면 그분은 벌써 진마는 되셨을걸. 하지만 승급위원회는 마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서 추천을 받지 못하면 아예 승급 시험을 칠 수가 없어. 젊은 시절의 엄포윤 어르신은 혈기가 넘쳐서 선을 넘고 말았지. 용마 당고 님이 발표한 마법이론을 학회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니까. 괘씸죄에 단단히 걸린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단태는 질문을 퍼부어 종춘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후에야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엄포윤이 젊은 시절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실력과 상관없이 승급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공평해야 할 시험에 불이익을 주다니.
종춘은 비슷한 경우가 탑에는 많다고 했다. 탑 자체가 윗사람에게 찍히면 더 이상의 승급은 불가능한 구조라도 덧붙였다. 그러고는 자신 역시 실력이 아니라, 찍혀서 이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겠네요.”
“그런 걸 잘하는 놈들이 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거지. 대가리들은 대부분 그런 놈이야. 아부를 잘 떨거나, 아예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거나. 가끔 실력이 출중해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진 않아.”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다니요?”
“태어난 순간부터 고생과 담 쌓은 사람들 말이야. 탑주의 아들로 태어나면 당연히 탑주가 되잖아. 시간만 흐르면. 뭐, 그네들도 고민은 있겠지만 우리만 할까. 난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계승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계승자…….”
울림이 큰 말이었다. 그저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장차 이 거대한 탑을 이끌 계승자가 된 것이다.
현 계승자는 아직 탑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이미 마법사 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종자, 생도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승급 시험을 볼 거라고도 했다. 부러움 섞인 질투가 사람들의 말투에서 배어 나왔다.
“아, 오늘 종자회 열린다는 거 알지?”
“그게 뭔데요?”
“오늘 밤 늦게 탑에 있는 모든 종자가 모인다네. 당연히 자네도 참석해야 돼. 자네를 위한 환영식도 열릴 거야.”
“아! 꼭 참석할게요.”
시간과 장소를 머리에 새긴 단태는 무엇보다 또래의 종자를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비슷하면 질문하기가 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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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각 층에는 차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구와 업무에 집중하는 마법사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전대의 탑주가 만든 장소였다. 마법사만 출입이 가능한 차실은 조용한 연구실과 달리 가끔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거기서 마음껏 떠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주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들이었다.
그 때문에 엄포윤은 차실에 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승급 시험에서 미끄러져 안타까운 마음에 차실로 갔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한 뒤로는 발길을 뚝 끊었으니까.
마음을 가다듬은 엄포윤은 차실의 문을 열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함이 섞인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차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이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역시 구석진 곳에 륜사가 앉아 있었다. 엄포윤은 용기를 내어 륜사 앞으로 다가갔다. 여러 시선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저,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어르신. 앉으세요. 말씀도 편하게 하시구요.”
륜사는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포윤에게 용마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대우를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손자를 맡겨 놓았으니…… 인사는 한번 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네.”
“똑똑한 녀석이더군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시골에서 자랐죠?”
“……맞네.”
“어쩐지 행동거지가 다르다고 생각했죠. 도시 출신은 빠릿빠릿하지만 가벼워요. 지나치게. 게다가 다 아는 것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녀요. 건방지게 말이에요. 단태는 그렇지 않더군요.”
“예쁘게 봐줘서 고맙네.”
“있는 그대로 보는 거죠, 뭐.”
“아, 부탁할 게 있어서 왔네.”
“말씀하세요.”
“용금탄에 들러 용혈로 간다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륜사는 뺨을 부풀려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간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나도 같이 갈 수 없겠나? 용금탄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천마룡을 타고 가는데, 괜찮겠습니까? 어르신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난 괜찮네. 고맙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세요. 아, 그러면 단태도 데리고 가야겠네요. 눈치가 빨라서 쓸모가 있을 것 같던데, 괜찮죠?”
“자네 종자가 아닌가? 자네 뜻대로 하게. 가 봐야겠군. 나중에 또 보세.”
엄포윤은 벌렁대는 가슴을 의식하며 차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를 썼는데, 정말 그렇게 보였을까? 아니면 틈을 노출하고 말았을까? 그 예리한 륜사가 수상쩍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다시 차실로 들어가서 륜사의 반응을 살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이겨 내고 연구실로 올라온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륜사의 속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최대한 빨리 용금탄에 가는 방법은 해결되었다. 용을 타고 가니 사흘이면 용금탄에 도착할 터였다.
그러나 엄포윤은 평생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았던 터라, 자신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