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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사람들은 더 환호했다.
배망식의 지시를 받은 종자 몇 명이 단 바로 앞 바닥에서 뚜껑을 열었다. 뚜껑 아래는…… 물이었다. 시꺼멓고…… 악취 나는 물. 단태는 버티려 했지만 발찌 때문에 힘이 약해져 너무도 간단히 끌려가고 말았다. 배망식이 사람들을 자극하며 다가와 단태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단태는 버둥거리다 꼴사납게 풍덩 물에 빠졌다.
허우적거리는 단태를 향해 배망식이 상체를 숙였다.
“너 같은 녀석이 용마의 종자라니…… 퉤!”
침을 뱉은 배망식은 명령을 내려 뚜껑까지 닫아 버렸다.
빛이 사라져 깜깜했고, 소리까지 들리지 않았다. 비웃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이처럼 무섭지는 않을 텐데. 그저 겁주려는 신고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시골 마을에도 군대에서 복무하다 기한을 채워 전역한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 부대에 배치되면 호된 신고식으로 사람의 정신을 빼놓는다고 말했었다. 그래, 그런 것이리라. 곧 저 뚜껑이 다시 열릴 것이다.
물은 고여 있었다. 다행이었다. 흐름이 빠른 운하였다면……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흐름이 없어도, 마냥 헤엄쳐서 물밖에 코를 내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발찌 때문에 몸이 금세 피곤해졌고, 몸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살려 줘!”
그 소리, 멀리 퍼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다가 구정물을 삼킨 단태는 물 아래로 잠겼다. 겨우 몸을 꿈틀거려 수면으로 나온 그는 손을 뻗어 뚜껑을 밀었다. 뚜껑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점점 두려움이 몸집을 불렸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왼쪽 다리에 쥐가 났다.
버둥거리다가 물 아래로 가라앉은 단태는 손톱으로 마비된 다리에 상처를 냈다. 피가 나자 마비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그는 있는 힘껏 뚜껑을 밀었다. 미세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신고식이 아니었다.
겁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태는 살려 달라고, 꺼내 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버둥거리다 그 더러운 물을 마셨다. 목은 물론 배까지 아픈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가라앉지 않으려고 버틸 뿐이었다. 정말 여기서 죽이려는 것일까? 마지막에 본 배망식의 눈빛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뚜껑이 열렸다.
횃불이 보였다.
그리고 아래로 내미는 손.
그 손을 잡았더니, 몸이 당겨졌다. 겨우 위로 올라온 단태는 계속 기침을 했다.
“너, 배망식하고 무슨 일 있었냐?”
창수가 물었다.
그 넓은 창고에는 창수 혼자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고 없었다. 단태는 헐떡거리다 배망식을 만난 순간을 알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창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배망식에겐 일상인데, 왜 널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 환영식이 좀 거칠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거든.”
“……내가 륜사 님의 종자이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관계…… 아, 그렇구나, 네가 용마의 종자라서 그런 거야. 우리 탑에는 용마가 딱 세 분이니까. 누마탄 님은 따로 종자가 없어. 탑주님이시니까. 그분을 제외하면 륜사 님과 당고 님뿐인데, 그동안 륜사 님에겐 종자가 없었으니, 배망식 그 새끼가 유일한 용마의 종자였던 거지. 바로 그래서 널 죽이려 한 거야.”
“죽이려 했다니?”
단태는 직감하고 있었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아직도 몰라? 내가 여기 남아서 널 건져 내지 않았으면 넌 거기서 죽었어.”
“아무리 그래도 나는 륜사 님의 종잔데…….”
“발을 헛디뎌 죽었다고 말해 버리면? 목격자는 없어. 배망식이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단태는 등골이 오싹했다. 또 다른 용마의 종자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광기 어린 눈빛을 떠올리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꺼내 줬다고 말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네가 불쌍해서 도와준 건데, 앞으론 아는 척하지 마. 나도 배망식 그 새끼는 무서워.”
“그러면 이제 난 어쩌지?”
“내가 너라면 당장 도망칠 거야.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
횃불 하나를 남겨둔 창수는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갔다. 지쳐서 일어설 힘도 없는 단태는 거대한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을 말없이 쳐다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어서려다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없는 세탁실로 겨우 걸어간 단태는 몰래 몸을 씻었다. 악취 풍기며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서 그는 배망식의 눈빛을 떠올렸다. 용마의 종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사람을 증오하다니.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머리를 감고 옷을 빨면서 단태는 무서워 떠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죽을 뻔했기에 당연한 반응인데도, 단태는 자신이 싫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어디론가 팔려갔는데, 두려워할 게 뭐가 있을까?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없다!
역부족이라 해도, 물어뜯고 말리라.
후회하게 만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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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단태는 평소처럼 식당으로 갔다. 륜사와 여화의 몫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마법사는 연구에 몰두해서 먹는 것도 잊는 족속이어서 종자가 꼭 챙겨야 했다. 그러니 식당은 모시는 마법사들 때문에 내려온 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 명의 종자들이 보는 가운데, 단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살아 있는 단태를 보고는 배망식이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가 뭐라고 말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배꼽 빠져라 웃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생쥐처럼 단태는 그쪽은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는 척했다. 곧 흥미를 잃은 배망식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패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종자는 주로 그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것이다.
음식을 갖다 주고 내려온 단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배망식 쪽으로 갔다. 놈의 등 뒤에 이르자, 단태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들어 배망식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며 의자가 부러졌고 배망식은 그 충격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태는 부러진 의자 다리로 배망식의 얼굴을, 특히 코를 있는 힘껏 때렸다.
종자들은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배망식의 패거리조차 아무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단태가 배망식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후에야 종자들이 달려들어 단태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미 배망식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마영국 기율실에 속한 수련사가 달려왔다. 배망식의 패거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가 자초지종을 고하자, 수련사는 단태를 기율옥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패거리는 단태를 붙잡아 지하 감옥으로 데려갔다.
단태는 말없이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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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엄포윤은 종종걸음으로 지하 기율옥으로 내려갔다. 기율옥은 종자, 생도, 수련사 그리고 가끔은 규율을 어긴 마법사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15년 전쯤에 쫓겨난 사제 엄숭이 거기 갇혀서 고통으로 울부짖었던 일이 생각났다. 엄숭은 처벌을 받을 만했다. 약제실에서 약병을 훔쳐다가 암시장에다 팔았으니까.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기율실 책임자는 비교적 승급이 빠른 부마 곽진이었다. 30대 중반에 부마라면 결코 느린 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탑의 실력자라 할 수 있는 당고의 먼 친척이라는 소문이었다. 엄포윤이 들어서자 곽진이 다가왔다.
“자넨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손자 간수를 잘했어야지! 자네 손자가 종자들이 모여 있는 식당에서 용마 당고 님의 종자를 반쯤 죽여 놨어. 맞은 놈은 아직 의식도 없고.”
대뜸 야단부터 치는 곽진의 태도에 엄포윤은 어이가 없었다. 이 젊은 놈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었지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태도는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비굴이 몸에 밴 모양이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로군.”
“……단태는 어떻게 됩니까?”
엄포윤은 당고의 종자를 건드렸으니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길 빌었다.
“기율옥에 가둬야지.”
“얼마나요?”
“못해도 십 년은 있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