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5화 (25/293)

<-- 25 회: 1-22 -->

생각에 잠긴 여화는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어젯밤 종자회가 열린 곳이었다. 사부님처럼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면 사소한 실마리도 놓치지 않겠지만, 여화는 아직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여화는 바닥에 남은 오물 자국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거기 뚜껑이 있었다. 힘들게 뚜껑을 들어 올리자 검은 물이 보였다.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는 당장 뚜껑을 닫았다.

쾅.

뚜껑은 바닥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아귀가 잘 맞았다. 여화는 손가락으로 그 오물 흔적을 문질렀다. 말랐으나…… 바싹 마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어젯밤에 흘린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 그 손가락을 코에 댄 여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악취 때문이었다. 저 뚜껑 아래에서 올라왔던 악취와 같았다.

그렇다면?

여화는 벌떡 일어섰다.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알아낸 것이다. 아무리 신고식이라 해도 저 어둡고 더러운 곳에 신입 종자를 빠뜨리다니. 어쩌면 단순한 신고식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장난 같은 신고식이었다면 종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 리는 없다.

“……죽이려고 했구나.”

여화는 진실을 알아냈다. 말하자마자 그게 사실임을 직감했다. 그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약제 창고 높은 곳에 필요한 재료가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는데, 갑자기 사다리가 흔들려 추락하고 말았다. 꽤 높은 곳이어서 손목이 부러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 쉽게 부러지도록 사다리의 한쪽 다리에 손을 댄 것이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여화는 조심 또 조심했었다.

이유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오랫동안 혼자 지냈던 륜사가 여화를 종자로 받아들였고, 생도로 인정했으며, 급기야 수련사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이유였다!

같은 일이,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단태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여화는 단태 옆에 서 있는 륜사에게 가서 알아낸 것을 알려 주었다. 륜사는 말이 없었다. 여화는 륜사가 이미 다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녀석 곁을 떠나지 마라.”

“네, 사부님.”

당고 측이 단태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여화는 몸을 떨었다.

“나 때문에 이 아이가 피를 봤구나.”

“사부님 때문이라니요?”

“내가 두 명의 계승자를 데리고 용혈로 가게 되었잖아. 누군가의 눈에는 권력을 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그건 사부님의 결정이 아니었잖아요.”

“너와 달리, 놈들은 날 안 믿잖아. 내가 꼼수라도 쓰는 줄 알고 있으니까.”

륜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여화는 조심스러웠다.

“해 봐.”

“사부님도 세력을 키우세요. 마음에 안 들어도 사람들과 친해지고,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사부님의 뜻에 따를 만한 사람을 요직에도 앉히세요. 탑주께 말씀드리면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야 그들과 싸울 수 있어요.”

“나더러 당고처럼 되라는 거냐?”

륜사는 피식 웃었다.

“죄송해요.”

“답답해서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큼 바보는 아니야. 그보다, 저 녀석의 발을 봐라.”

륜사는 단태를 가리켰다. 그 말에 담요를 들추고 발목을 살핀 여화는 깜짝 놀랐다. 거기 ‘마쇄’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재미있지 않니? 강마의 수준에 오른 마법사는 물론 용마의 힘까지 어느 정도는 무력화시킬 수 있는 최고급 마쇄가 이런 아이의 발목에 있다니 말이야.”

“풀까요?”

“내버려 둬. 당분간은.”

“누가 채웠을까요?”

“그보다, 난 이 녀석이 저런 걸 차고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하다. 평범한 녀석은 아니야.”

륜사는 껄껄 웃었다.

@

“부르셨습니까?”

“앉아서 잠시 기다려라.”

책상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는 탑주의 말에 누천파는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이 방은 언제 들어와도 가슴 벅찬 감동을 주었다. 역대 탑주의 초상화가 벽 위쪽에 걸려 있었고, 탑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푸른색의 진주와 지팡이 그리고 반지가 장식장에 들어가 있었다. 앞으로 저 책상에 앉아 물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탑주로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손에 쥔 듯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임무를 주마.”

“……임무를요?”

“종자와 생도 단계를 건너뛰고 승급 시험을 치고 싶다면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라. 그러면 자격을 주마.”

“……알겠습니다.”

누천파는 종자, 생도 단계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다 아는 것을 왜 다시 배워야 하나? 지금 당장 승급 시험을 치러도 타마가 될 실력이라고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이 좋은 기회,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탑주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차를 마신 후에 계승자를 쳐다봤다.

“오늘 아침에 식당에서 소란이 있었다. 단태라는 종자 아이가 배망식을 폭행했다. 네가 그 일을 처리해라.”

“제가요?”

중요한 임무를 기대했던 누천파는 종자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라는 명령에 실망하고 말았다.

“쉽지 않을 게다. 나가 봐라.”

“네, 탑주님.”

누천파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집뿐이었다. 어릴 때 멋모르고 탑에서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회초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

밖으로 나온 누천파는 기분이 좋았다. 종자 간의 다툼 같은 사소한 임무를 완수하면 승급 시험의 자격을 주다니.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선물을 주는 셈이다. 왠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는데, 난간을 잡은 채 멈춰 서고 말았다. 배망식, 자주 들은 이름이었다. 아, 맞다! 자존심 강한 당고의 종자였다. 그래, 배망식은 당고의 최측근인 돈덕실의 아들이었다. 그 배경 덕분에 배망식은 종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텐데.

“단태? 누군지 몰라도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군.”

혀를 찬 누천파는 기율옥으로 내려갔다.

탑주의 명령으로 내려왔다는 누천파에게 곽진은 열과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오래지 않아 누천파는 아버지가 왜 이 일을 맡겼는지 깨달았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탑의 균형이 깨질지도 몰랐다. 두 명의 용마가 싸운다면…… 적잖은 후유증이 생길 터였다. 계승자가 맡아야 할 만큼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누천파는 배망식을 찾아갔다. 목에 부목을 대고 코와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고 있는 배명식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의사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더 놀라운 건, 아들 옆을 떠나지 않으려는 돈덕실이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이었다. 기율옥으로 내려가 마음대로 단태를 때렸다가 륜사에게 당했다는 의사의 설명에 누천파는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사소한 실수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망식에 이어 돈덕실까지 당한 셈이니 당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하면 균형을 잃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용마 사이의 싸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누천파는 단태가 있는 륜사의 연구실로 향했다. 몇 번 봤지만 마음에 안 드는 수련사 여화가 문을 막더니, 수정구로 탑주의 명령을 확인한 뒤에야 옆으로 비켜섰다. 륜사는 없었다.

단태는…… 의외로 체구가 작고 여윈 편이었다. 이런 녀석이 배망식을 해치우다니!

“어젯밤 종자회에서 배망식이 단태를 창고 아래에 있는 물웅덩이에 빠뜨렸습니다.”

“사실입니까?”

여화의 설명에 누천파는 깜짝 놀랐다.

“확인해 보세요.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 협박했는지 거기 참석했던 종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누천파는 종자방으로 내려가 몇 명의 종자를 불러냈다. 그들은 처음부터 고개를 푹 숙였는데, 종자회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종자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막 탑에 들어와 종자가 된 그 조그만 녀석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다 모인 식당에서 배망식을 구타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배망식이 먼저 그 아이를 건드린 것이다. 아, 어쩌면 죽이려 했는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