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6화 (2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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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천파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시원한 바람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물의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보다 높은 건물은…… 시청의 시계탑뿐이었다. 건축물의 높이는 곧 권력의 높이였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이 골치 아픈 문제의 묘안을 찾으려 애썼다.

한쪽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다. 그랬다가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탑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현실적인 당고에겐 세력이 있었다. 고지식한 륜사에게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륜사를 엿 먹이고 싶지만, 계승자로서 탑의 장래를 위해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옥상을 덮었다. 고개를 드니…… 천마룡이 허공에 떠 있었다. 누군가 천마룡에서 뛰어내렸는데, 반우현이었다. 경악한 누천파는 곧 반우현이 부풀어 오른 거대한 헝겊 주머니를 몸에 달고 천천히 내려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옥상에 착지한 반우현은 단검을 빼 낙하산과 연결된 줄을 잘랐다. 바람에 밀려 낙하산과 함께 옥상 밖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낙하산은 저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휴우, 살았다.”

“너, 미쳤니?”

“헤헤, 얼마나 재미있는지 넌 몰라. 나중에 한번 맛보게 해 줄게.”

“정중히 사양한다.”

누천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반우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시장님은 이런 녀석을 계승자로 삼았을까? 아직 어리지만 남동생도 있는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면서?”

벌써 소식이 그쪽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시청의 정보력은 역시 최고였다.

“……골치 아파.”

“어느 쪽 손을 들지 고민이지?”

“어느 쪽 손도 들 수 없어서 문제야.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누천파는 가끔 예리한 분석력을 보여 주는 소꿉친구에게 물었다.

“단태라는 녀석, 죽여 버리겠어.”

“왜?”

의외로 단호한 결정이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너라면, 그러니까 계승자라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까? 당연히 용마 당고잖아. 신임 탑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말이야. 안 그래? 단태라는 녀석이 잘못했다고 결정을 하면, 당고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거야. 그러면 넌 순풍에 돛 단 것처럼 계승자 딱지를 떼고 탑주가 될 수 있겠지.”

명확한 논리였다.

누천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고에게는 무시 못 할 세력이 있음을 상기했다. 탑주가 되어 조직을 장악하려면 당고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에 반해 륜사는…… 혼자나 다를 바 없었다. 마법 실력은 당고보다 약간 앞서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그 멍청한 종자를 죽이면, 난 널 안 볼 거야.”

“무슨 소리야?”

“사랑하는 륜사 오라버니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 오랜만에 들인 종자인데, 그런 식으로 죽어 버리면 얼마나 오라버니가 슬프겠어? 그러니까 절대 안 돼.”

“너!”

“내가 륜사 오라버니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는 거, 너도 알잖아. 잘 생각해서 결정해. 난 오라버니에게 가 볼게.”

반우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혼자 남은 누천파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론을 내렸다. 단태라는 종자를 탑에서 내쫓기로. 그게 최선이었다. 아무리 과격한 신고식이 있었다고 해도 신입 종자가 종자장을 폭행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결정이면 당고도, 륜사도 만족할 것이다.

마음은 굳혔지만 누천파는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한 군데 들를 생각이었다.

*10년

명국영은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투라체에서 발행되는 신문 중에서 영향력이 큰 수청보에 청탁을 받아 보낼 글이었다. 원고는 벌써 열흘 전에 써 놓은 상태였지만, 이 글이 일으킬 파장 때문에 읽고 또 읽으며 고칠 곳을 찾고 있었다. 어쩌면 걱정할 필요도 없이, 글을 본 수청보 편집인이 고개를 흔들며 이런 글을 실을 수 없다고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래, 이대로 보내자.

노예 매매를 대놓고 까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면 볼 만할 것이다. 탑에서, 어쩌면 도시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시장이 퇴출 명령을 내리면 탑주 누마탄도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흠칫 놀란 명국영은 원고를 책상 서랍에 넣은 후에야 말했다.

“누구십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명국영은 수도 용금탄에서 감시당하는 줄도 모르고 불온한 글을 썼다가 구금된 동료를 기억해 냈다. 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그에게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간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낯선 사람이 밖에 서 있었다.

“명 선생이시죠?”

“……그렇습니다만.”

“수상한 사람 아니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붙임성 좋은 말투가 인상적인 그 남자는 미끄러지듯 방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봤다. 벽은 물론 바닥까지 책이 쌓여 있는 그 방은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명국영은 혹시 몰라 책상 앞으로 가서 이 수상쩍은 사람이 그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원고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십니까?”

“륜사라고 합니다.”

“……륜사? 그러면?”

“여기서는 제법 인정받고 있는 마법사죠.”

“저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명 선생께서 쓰신 ≪제국의 빛과 그늘≫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다가 여기 계신다는 이야기를 최근에야 듣고 용기를 내어 찾아왔습니다.”

“…….”

명국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륜사를 바라봤다. 천재 명국영이 20대 중반에 쓴 ≪제국의 빛과 그늘≫은 전대의 황제 연장춘이 읽고 찢어 버린 책으로 유명했다.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국의 빛과 그늘≫을 모두 회수하여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부분의 책이 타 버렸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명국영의 명성이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희귀한 그 책을 구하려고 원래 가격의 백 배 이상이나 주고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다행히 현 황제 연무혁의 즉위 이후로 판금 조치는 풀렸지만 제국의 중심, 황가의 명암을 가감 없이 파헤친 그 책은 여전히 기득권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런 이유로 명국영은 어디를 가든 부정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았는데, 여기 물의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명국영을 백안시했다. 누마탄의 간청에 파티도 참석했는데 다가와서 살갑게 반겨 주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천파를 가르친다면서요?”

“그렇게 됐습니다.”

돈 때문에 가르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한때는 자부심만으로도 살 수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녀석, 쓸 만합니까?”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초면에 실례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륜사는 본론을 꺼냈다. 일종의 청탁이었지만, 명국영이 보기에 내용이 이상했다. 명국영은 제국의 역사와 구조를 깊이 들여다본 전문 역사가였고, 당연히 제국의 한 축을 담당한 탑의 생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탑은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권력이 집중되는데, 탑은 어떤 의미로는 제국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탑의 구조에서 밑바닥인 종자와 상층부를 이루는 마법사의 계급 차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마법사 중에서도 실력자인 이 사내는 자신의 종자를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건을 글로 쓰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만.”

“선생께선 마둔수탑의 내부 상황을 모르실 겁니다. 이대로 두면 그 아이는 죽습니다. 당고는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이라, 자기 종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단태를 없애 버릴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님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종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찾아왔군요.”

표정이 굳은 륜사는 일어섰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쓰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본 후에 알아낸 그대로 써도 되겠습니까?”

“진실을 쓰시면 됩니다만 서둘러 주십시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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