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회: 1-24 -->
륜사를 보낸 명국영은 책상 앞에 앉은 후에 자기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국의 빛과 그늘≫을 쓴 이후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렇게 높은 곳에 앉은 사람이 종자처럼 밑바닥 인생을 위해 이런 부탁을 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종자가 숨겨둔 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저 남자가 풍기는 청량한 기운 때문인지…… 이번 일은 제대로 알아보고 싶었다.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었을까? 어쩌면 부탁 자체를 잊어 달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명국영은 제발 그 사람이 아니기를 빌면서 문을 열었다.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스승님, 여쭐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날 다 찾아오고. 들어와. 거기 앉게.”
누마탄이 탑 한편에 마련해 준 이 방에서 명국영이 공부를 하고 글을 쓴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누천파가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실은…….”
누천파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가 명국영을 찾아온 이유는 명국영이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편견 없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사실 누천파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명국영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의 결정을 미심쩍어한다면 석학 명국영의 생각도 같다고 말할 참이었다.
말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한 명국영은 누천파를 쳐다봤다. 이 자존심 강한 아이가 그 용마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에 이어 종자 사이의 다툼을 의논하러 자신을 찾아오다니. 곧 명국영은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깨달았다. 겉모습은 종자 사이의 다툼이지만, 본질은 륜사와 당고라는 실력자의 충돌이었다.
‘륜사라는 사내가 마음에 드는걸. 이런 상황에서 나를 찾아오다니. 종자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고위 마법사와는 다르군. 륜사는 나를 통해 민심을 움직여서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는 거로구나. 오랜만에 술 한잔 하고픈 사내야.’
“음, 자네의 결론은 뭐지?”
명국영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단태라는 종자를 탑 밖으로 내칠 생각입니다. 그러면 당고도, 륜사도 만족하지 않을까요?”
“둘 다 만족할 거라고 확신하는가? 당고라는 마법사가 쫓겨난 단태를 해코지까지 할 가능성은 없나?”
“…….”
누천파는 자존심 강한 당고라면 끝까지 추적하여 단태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냥꾼을 풀어 제국 끝까지 쫓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복수니만큼 탑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누천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단태의 할아버지는 만나 봤나?”
“……그 생각은 못 했습니다.”
“사소한 결정이라고 해도 최대한 자료를 모아야 하네. 그래야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을 할 수 있지.”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학자 특유의 비현실적인 꼼꼼함에 누천파는 괜히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결론을 내려야 뒤숭숭한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 이론에 밝은 학자라서 그런지 이런 현실 감각은 부족한 것이다.
“나라면 조급해서 후회하느니, 좀 느리더라도 천천히 결정하겠네.”
누천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륜사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죠. 주위 사람들 배려는 눈곱만큼도 안 하는, 그런 사람 있잖습니까.”
“알았네. 가 보게.”
“네, 스승님.”
“용금탄에는 언제 가는가?”
“엿새 후에 떠납니다.”
“기대하겠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누천파는 찝찝해서 닫힌 문을 노려봤다. 괜한 짓을 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
누천파는 당장 탑주실로 올라갔다.
@
“나야.”
“사부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단태라는 아이를 보러 왔어.”
여화는 입구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아이를 건드리겠어? 그러니 어, 서, 비, 켜.”
반우현이 차갑게 말하자, 여화는 옆으로 물러났다. 그 말이 옳았다. 장차 도시의 지배자가 될 저 여자가 종자의 몸에 손을 댈 리가 없었다. 다만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불안할 뿐이었다.
“의외로 작네. 배망식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내가 추천해서 보낸 사람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륜사 오라버니가 종자로 들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거든. 오라버니는 왜 이 녀석을 종자로 받아들인 거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저는 모릅니다.”
“네가 부탁한 거지?”
“그런 적, 없습니다.”
여화는 힘주어 강조했지만 반우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야 알아보면 될 거고. 오라버니에게 인정 좀 받았다고 건방지게 굴었다가는 그 목을 꺾어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알아서 자중해. 그보다, 잘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아는 당고라면, 저 아이 꼭 죽일 테니 말이야.”
반우현은 여화의 답은 듣지도 않고 나갔다. 탑주를 만나기 위해 승강기 앞에 선 그녀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륜사를 발견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냐?”
“반갑게 맞아 주면 어디가 아파요?”
“도시의 계승자가 특정 마탑에 자주 나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너도 잘 알 텐데?”
“아주 잘 알죠. 그래서 일부러 마둔수탑에는 자주 오지 않았잖아요. 두 달 만에 본 건데, 섭섭해요.”
“탑주님을 만나러 가는 거냐?”
“네.”
“그래, 볼일 보고 가거라.”
륜사는 자기 연구실 쪽으로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모습에 반우현은 입술을 꼭 깨물며 저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륜사는 심사가 뒤틀리면 황제 앞에서도 등 돌릴 사람이었다.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면을 좋아하면서도 계승자인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아 섭섭하다니.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이중적이었다.
연구실로 들어선 륜사는 여화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넌 명 선생을 도와라. 그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줘.”
“단태는요?”
“내가 옆에 있겠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여화는 자신이 막아 봐야 당고는 물론 당고의 측근으로부터 단태를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종자는 곧 수련사의 종자였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 하나 보호할 힘이 없다니. 자괴감에 마음이 괴로웠다.
“조심해라. 이 아이 대신 널 노릴 수도 있으니, 문제 생기면 연락하고.”
“네, 사부님.”
여화는 방으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챙겼다. 보통 괴물이 출몰하는 위험한 지역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나 가져가는 물품이었다. 허리에 달린 조그만 주머니에 마력석을 채워 넣었고, 마법 실행 속도를 높여 주는 반지를 네 개나 꼈고, 목걸이도 빼놓지 않았다. 당고의 마법사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는 말에 속이 서늘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저 아이가 꼼짝도 못하고 죽는다는 점을 떠올렸다. 내버려 두고 싶다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떨쳐 버렸다. 만약 륜사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종자는커녕 탑에서 쫓겨나 물의 도시를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운하에 시체로 가라앉아 있을지도 몰랐다.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와라.”
“네, 사부님.”
여화는 고개를 숙이고 복도로 급히 나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종자를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리는 마법사, 수련사는 없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한에서는.
륜사는 살갑게 배려하는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일단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목숨까지 거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어서 도시의 계승자까지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것이리라. 여화는 륜사를 만나서 자기 삶에도 의미가 생겼다고 확신했다.
“휴우, 해 보자.”
어릴 때부터 1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이 탑…… 왠지 낯설었다. 친숙한 얼굴들이 오가는 이 복도가 예리한 발톱을 지닌 맹수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어두운 밀림보다도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