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8화 (28/293)

<-- 28 회: 1-25 -->

당고는 대나무 의자에 앉았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와서 쉴 수 있지만, 유독 19층 차실은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드러내 놓고 금지하지 않았는데도 마법사들은 당고를 위해 아래쪽 차실을 이용했던 것이다. 각종 난초로 꾸며진 그 차실에 오늘 단 두 명의 마법사만 들어와 있었다.

당고와 진묘.

당고는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북쪽 마륙천에서 들여온 ‘용향’은 정말 향이 좋았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고, 깊이가 있으면서도 향이 넓게 퍼져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에게 차는 수행의 연장이었다. 반투명한 액체가 찻잔을 채우자, 향은 더욱 짙어졌다.

“가만히 계실 겁니까?”

“그럴 리가요.”

당고는 찻잔을 들여 빨간 입술에 살짝 갖다 댔다. 첫 한 모금의 차는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칼이었다. 당고는 차를 마실 때면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잠시나마 완벽한 격리를 느낄 수 있으니, 주먹만 한 금덩이를 들인 보람이 있는 셈이다.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륜사는 뭘 하고 있나요?”

“그 종자 곁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륜사답네요.”

당고는 차를 마시며 말을 아꼈다. 륜사는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에겐 파격적인 행동이겠지만 당고가 보기에 륜사는 단순해서 손금 보듯 어디로 튈지 뻔히 보이는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그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당고가 진묘를 쳐다봤다. 진묘는 탑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마영국의 책임자인 통윤이었다.

“당신이 륜사의 종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나요?”

“……명령하진 않습니다.”

“그러면 배망식 스스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그런 셈입니다.”

진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망식이 찾아와 륜사의 종자를 끝장내고 싶다고 했을 때 만류하지 않았는데, 그 내용을 당고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문제가 커지더라도 의식불명 상태인 배망식이 책임을 지면 될 것이다.

“여화를 죽이세요.”

“알겠습니다.”

진묘는 고개를 숙이고 차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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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사는 마쇄에 손을 댔다. 진동이 느껴졌다. 마쇄는…… 마법사들의 천적으로,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법사가 용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무기였는데, 융 왕국의 대마법사 동혁이 당시 날뛰던 용 서혈웅을 제압하기 위해 처음 마쇄를 만들었다.

누가 이 아이에게 마쇄를 채웠을까?

“……엄포윤이겠지.”

륜사는 마쇄를 풀었다. 묵직한 금속 안쪽에 마력을 억제하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쇄에서 벗어난 탓인지 단태가 신음을 흘렸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이 아이는 빠르게 회복될 터였다. 륜사는 손을 뻗어 식은땀으로 젖은 단태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손자가 크게 다쳤는데도 마쇄를 채운 엄포윤은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을 숨기려고 그랬을까?

그 재능이겠지.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재능은…… 매우 희귀한 자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자의 목숨보다 그게 더 중요할까?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천린풍탑은 하루아침에 사라진 전설의 탑이었고, 그 때문에 탑에 얽힌 이야기와 소문이 많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쇠락해져 탑까지 무너지는 보통의 탑과 달리, 위치까지 망각의 늪에 묻혀 버린 천린풍탑에는 아직도 값비싼 마법서와 희귀한 마법 재료, 물품이 가득 쌓여 있을 거라는 소문 때문에 꽤 진지한 마법사도 시간을 내어 천린풍탑이 어디 있는지 찾곤 했다. 용령 제국이 건국되고 몇 년 후에 갑자기 나타난 바람의 마법사는 자신이 바로 천린풍탑 출신이라고 말했는데, 수백 명이 그를 따라 천린풍탑으로 갔다가 실종된 일도 있었다. 그런 일 때문에 천린풍탑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다양하면서도 황당하게 바뀌었다. 한때는 륜사 자신도 천린풍탑을 찾고 싶어 했다.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졌다.

륜사는 단태가 누워 있는 침대 주위에 직접 그려 놓은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시킨 다음, 연구실 입구로 나왔다.

엄포윤이었다.

“……단태는 잘 있는가?”

“자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먼.”

“마쇄가 발목에 있더군요.”

“봤나?”

“단태의 재능을 숨기려고 마쇄를 채운 것이죠?”

“맞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네만, 사정이 있었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적잖은 소동이 일어났을 걸세. 자네도 알지 않나?”

“그건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륜사는 주름진 얼굴로 검버섯이 올라오는 늙은 마법사를 살폈지만 능구렁이 같아서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손자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이용하려는 사악한 할아버지 같기도 해서 어느 쪽이 진실인지 속단하기 어려웠다.

“단태가 한 짓 때문에 당고 쪽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대책은 있나?”

“……시간이 흐르면 흥분도 가라앉을 겁니다.”

그리 자신감 없는 말투였다.

“원로회를 움직이게나.”

“…….”

“그분들은 자네를 지지하고 있지 않나? 아무리 당고라 해도 그 어르신들이 움직인다면 아무 말도 못 할 거야. 안 그런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륜사는 단호했다.

원로회는 전대의 탑주가 죽고 누마탄이 탑주로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한 마법사들의 모임이었다. 은퇴 이유는 신임 탑주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사람으로 탑을 채울 수 있도록 스스로 물러난 것이지만, 실상은 탑의 규율 때문에 은퇴는 불가피했다. 만약 은퇴를 거부하면 그것은 곧 탑주의 자리에 흑심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원로회에 속한 노마법사들이 움직인다면, 그로 인해 탑주의 권위가 크게 손상될 터였다. 륜사는 단태를 살리기 위해서 사형인 누마탄의 자리를 뒤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륜사는 엄포윤을 쳐다봤다. 이 노마법사는 지위가 낮아 은퇴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제 보니 생각이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전체적인 상황 파악이 빠르고 정확한 것 같았다.

엄포윤도 륜사를 마주 보았다.

“내가 주제넘었네. 잊어버리게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 단태가 자네 종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고 말았을 테니까.”

“아닙니다.”

엄포윤이 나가자, 륜사는 단태 옆으로 가서 앉았다. 원로회를 동원하라?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륜사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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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명국영은 오물 자국과 정교하게 제작되어 닫아 놓으면 바닥과 분간이 어려운 뚜껑을 자세히 살폈다. 이리저리 오가며 흔적을 확인한 그는 여화를 쳐다봤다.

“혹시 이 뚜껑, 열 수 있을까요?”

“……필요하시면, 열겠습니다.”

“열어 주십시오.”

그 말에 여화는 당장 종자방으로 가서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서 뚜껑을 열었다. 악취가 올라오자 사람들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명국영은 뚜껑의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애쓴 사람의 발악이었다. 죽음 직전에 몰리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흔적이라고 판단한 명국영은 종자를 돌려보내고 다가온 여화 앞에 섰다.

“단태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명국영이 상황을 설명하자, 여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아, 그렇겠네요.”

명국영은 그 마법사에 그 수련사라고 생각했다. 마법사 밑에 수련사가 있듯, 수련사 밑에는 종자가 있었다. 수직적인 관계여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나 다를 바 없는데, 이 여자 수련사는 마치 자기 일처럼 열정적으로 도와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글을 쓸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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