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회: 1-26 -->
“사람들이 읽을까요? 아, 죄송해요. 선생님의 글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 몰라서요.”
“수련사님은 아직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군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그들에게 탑은 미지의 세계나 다를 바 없어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 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더 알고 싶은 겁니다. 원래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거든요.”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십시오. 신문사도 이런 원고를 좋아하거든요. 신문을 많이 팔아야 이문이 많이 남으니까요.”
웃으며 지하 창고를 나가려던 명국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 무리가 창고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몽둥이를 손에 든 사내들이었다. 명국영의 얼굴을 보고 돌아선 여화는 당장 명국영 앞을 가로막았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명국영이었다.
까딱까딱 몽둥이를 흔들며 다가온 사내들은 모두 얼굴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살려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들이 내뿜는 기세에 담겨 있었다. 여화는 빠르게 그들을 훑었으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고가 외부인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하나, 둘, 셋…… 일곱, 여덟…… 열둘, 열셋…… 열일곱이었다. 한꺼번에 외부인을 열일곱 명이나 데려오다니, 역시 당고였다. 마탑의 출입문을 통제하는 마영국 출입 관리실이 당고의 손에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싸울 줄 아십니까?”
“이 주먹으로 싹 쓸어버릴까요?”
명국영이 주먹을 움켜쥐며 호기를 부렸지만, 여화는 당장 그 자세를 보곤 허세임을 간파했다.
“이 원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여화는 두루마리를 꺼내어 찢었다. 파란 원이 명국영 주변에 나타나더니 아래로 가라앉아 바닥에 새겨졌다. 그 빛나는 원형의 문양이 명국영을 에워싼 셈이었다.
명국영의 안전을 확보한 여화는 팔다리를 풀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려니 마음까지 떨렸다.
“쳐라!”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여화는 가볍게 뛰며 준비를 마쳤고, 윙 소리를 내며 날아온 몽둥이를 피하며 그 몽둥이를 쥔 손목을 쳐서 뼈를 부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발로 바닥을 쓸어 손목이 부러진 사내의 발목까지 박살 냈다. 머리를 깰 듯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뒤로 몸을 날린 여화는 손바닥을 마주 대고 속삭였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푸르스름한 기운이 팔과 어깨까지 타고 올라가자, 여화는 거침없이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내가 휘두른 몽둥이를 팔로 막자, 몽둥이가 부서졌다. 놀란 사내는 강화 마법 ‘수궁’이 걸린 여화의 주먹에 코뼈가 주저앉았다.
여화를 피해 명국영을 없애려고 다가간 사내들은 있는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바닥에 새겨진 원형의 문양이 만들어 낸 방어 막을 뚫을 수 없었다. 방어 막 안에서 인간의 광기와 폭력을 지켜본 명국영은 놀라면서도 신이 났다.
“잘한다!”
일곱, 아니 여덟 명이 여화에게 맞아 나가떨어졌다. 이제 사내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젊은 여자라고 깔봤는데 상대는 마법사였다. 실은 수련사였지만 륜사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여화는 타마 이상의 실력자였던 것이다.
“누가 보냈지?”
여화가 한 걸음 다가섰다.
한 걸음 물러서는 사내들.
그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가 여화에게 날아갔다.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물러선 여화는 불덩이의 열기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태울 뿐 아니라 아끼는 옷깃까지 태우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겨우 피한 여화의 눈이 커졌다. 그 불덩이는 여화 대신 명국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쾅!
불덩이는 푸르스름한 방어 막을 깨뜨렸다. 명국영은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기절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여화는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저 뒤에 숨어 있는 마법사에게 당하고 말 터였다. 무엇보다 마둔수탑에 이토록 염계 마법을 잘 쓰는 마법사가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사내들을 헤치고 몸을 드러낸 사람은 진묘였다. 마영국 통윤이 이곳에 직접 내려온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알지?”
“……진묘 어르신 아닙니까?”
“역시 아는군.”
“무슨 일입니까?”
“탑에 첩자가 잠입했다는 정보가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찰마국 관할이 아닌가요?”
“찰마국 통윤이 내 절친 아닌가? 부탁을 받았다네.”
진묘는 빙긋 웃었다. 살기가 깃들어 시체처럼 창백한 미소였다. 여화는 진묘를 본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고위 마법사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이번 일이 그만큼 당고에게 중요했을까?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진묘 같은 마법사가 직접 죽이러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여화는 주머니에 넣은 수정구를 떠올렸다. 이곳 상황을 알린다면 륜사는 즉시 달려오겠지만…… 그러다 진묘와 싸운다면 일은 더 커질 것이다. 륜사가 진묘에게 패하는 일은 없다. 마둔수탑에서 실력으로 륜사를 꺾을 수 있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분노한 륜사는 진묘를 죽일 테고, 당고는 기다렸다는 듯 륜사를 제거할 것이다. 일이 그쯤 되면 탑주는 사제인 륜사의 편을 들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면 륜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쫓겨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 것이다.
‘나만 죽으면…… 여기서 끝난다.’
죽음을 각오하자 기적처럼 홀가분했다. 여화는 자세를 잡았다. 이왕 죽는다면 저 잘난 마법사의 옷깃이라도 잡고 싶었다.
“오호, 덤비겠다? 재미있군.”
진묘의 옷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 어둠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나도 재미 좀 볼까?”
“…….”
진묘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가만히 있지? 내가 도와줄까?”
륜사가 다가오자, 진묘는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그는 강마였으나 륜사 앞에서는 자신감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돈덕실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고조차도 속수무책이었다. 륜사의 마법은 독특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진묘는 기세를 풀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소맷자락은 가라앉았다.
“하하, 륜사 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첩자가 있다고 해서.”
“첩자라니요?”
“염종화탑이 우리 마둔수탑을 집어삼키려고 애를 쓴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아, 자네 그 마법은 어디서 배웠나? 염종화탑의 마법 같은데, 아닌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제가 취미로 익힌 열화수입니다. 괜히 트집 잡지 마십시오.”
“아니면 말고.”
륜사는 천천히 걸어가 기절한 명국영 앞에 섰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진묘를 노려봤다.
“탑주의 손님인데, 자네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
“…….”
“당고도 손쓰기 힘들겠어. 계승자의 스승이니 말이야.”
“……전 몰랐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네를 죽이고, 아 진묘인지 몰랐습니다, 바퀴벌레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변명해도 될까?”
진묘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륜사에게 덤비지는 않았다. 그와 륜사는 한 등급 차이였지만 실력은 열 배, 어쩌면 그 이상이나 차이가 났다. 그 사실을 알기에 진묘는 경거망동을 자제했다.
“계속 거기 있을 텐가? 밟아 줄까?”
“나, 나중에 뵙겠습니다.”
진묘는 사내들을 이끌고 가 버렸다.
잔뜩 긴장한 채로 죽음을 각오하고 진묘와 싸우려 했던 여화는 륜사를 보고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여화를 쳐다보던 륜사는 점점 투명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여화는 할 말을 잃었다.
@
당고는 바닥에 쓸리는 기다란 바다색의 망토를 걸친 채 엉망진창인 연구실로 들어섰다.
“륜사다워.”
방으로 들어서자 그 아이가 보였다. 의외로 작았다. 배망식이 저런 아이에게 얻어맞아 의식을 잃었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배망식을 죽이고 싶을 만큼.
방어 마법진으로 보호받는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고는 손짓 한 번으로 마법진을 깨뜨렸다. 지금쯤 화들짝 놀란 륜사가 지하 창고에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겠지만 늦을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진묘더러 여화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네게 감정이 없단다. 배망식은 맞아 마땅한 놈이니 말이야. 한데, 안타깝게도 배망식을 없애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다음에 태어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먼저 배운 다음에 행동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