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30화 (30/293)

<-- 30 회: 1-27 -->

당고는 공작이 수놓인 비단 소매를 걷었다. 하얗게 기다란 손이 드러났다. 그 손은 단태의 가슴으로 향했다. 단번에 심장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심장이 뽑힌 가슴을 보면 륜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 분노해서 달려들까? 그러면 더없이 좋겠지만 륜사는 겉보기와 달리 신중한 녀석이었다.

새하얀 손이 아이의 가슴에 닿는 순간, 또 다른 손이 나타나 손목을 꽉 잡았다.

“반가워, 아줌마.”

“…….”

당고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왜, 내가 여기 있어서 놀랐나?”

“너는…….”

“날 잘 안다고 자부하는 모양인데, 이 륜사 그렇게 얕은 남자는 아니라구.”

륜사는 당고의 손목에 힘을 쏟아 넣었다. 저항이 느껴졌지만 오래지 않아 손목이 시꺼멓게 바뀌었고, 하얀 손도 거뭇거뭇해졌다. 륜사에게 손목이 잡힌 당고는 속수무책이었다.

“……뭐 하는 거냐?”

“나랑 한판 붙자며? 그래서 여화를 죽이라고 진묘를 보낸 거잖아. 그리고 벌써 잊었나 봐. 5년 전쯤인가? 탑 밖에서 날 죽이려다 된통 당했었잖아.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서 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 건가? 복잡하게 다른 사람들은 끌어들이지 말자구. 여기서 끝내는 거야. 내가 죽든, 당신이 죽든.”

“…….”

“잘 가, 아줌마.”

“잠깐! 뭘 원해? 말해라. 뭐든지.”

당고는 판단이 빨랐다. 혼자 이곳에 온 게 패착이었다. 륜사는 자기를 도와줄 갖가지 마법진을 깔아 놓았고, 이곳에서 당고는 열이면 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 수치를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당신 목숨.”

“……내가 죽으면 오라버니께서 마둔수탑을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당고는 11인위원회의 실력자 당현추를 언급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당현추 덕분에 용마의 자리에 올랐다는 주위의 시선이 싫었건만, 이 순간 그녀는 당현추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흔들겠지만 무너뜨릴 순 없을걸.”

륜사의 힘이 당고의 어깨를 돌파해 목과 가슴에 이르렀다. 하얀 피부는 점점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륜사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때, 낮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마세요.”

륜사와 당고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의식을 되찾은 단태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댄 단태는 륜사, 당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때문에라면,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단태…….”

“나중에…… 제가 할게요.”

륜사는 말없이 단태를 쳐다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막히는 동시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종자로 들어온 저 아이가 탑을 자기 집처럼 주무르는 천하의 당고를 살려 주다니, 또한 그 이유가 직접 복수하고 싶기 때문이라니. 아무것도 몰라서 허세를 부리는 것일까? 아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아이에게 부릴 허세가 어디 있을까?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저런 말을 한 것이리라.

륜사는 당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아이가 널 살려 주라는데, 살려 줄까?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고 여기서 죽을래?”

“……난, 살고 싶다.”

입술을 깨문 당고가 자존심을 접었다.

“단태, 이 여자를 풀어 주면…… 진심으로 널 죽이려 할 거다. 난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

“풀어 주세요.”

“좋다.”

륜사는 당고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몸을 부르르 떤 당고는 륜사를 쳐다보다 단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런 아이 때문에 목숨을 벌다니. 이대로 나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힘을 썼다간 륜사가 자신을 죽일 터였다.

“너, 힘을 길러라.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5년이다. 5년 후에 널 상대하겠다.”

“5년? 너무하잖아. 마법의 신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줘도 5년은 생도 과정을 마치고 승급 시험을 통과하기에도 빠듯해. 천하의 당고가 이제 갓 수련사 꼬리표를 뗀 애송이 마법사와 싸운다? 웃기는군.”

륜사가 끼어들었다.

“……10년.”

당고도 그 지적이 옳은지 기간을 늘렸다.

“알겠습니다.”

단태의 답을 들은 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륜사는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너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 거냐?”

륜사는 단태 옆으로 가서 몸을 살폈다. 확실히 마쇄를 제거했더니 몸의 회복이 빨랐던 모양이다.

“……겁나서 죽을 뻔했어요.”

“하하,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내 평생 오늘처럼 통쾌한 날은 없었다. 당고의 그 표정, 평생 즐길 수 있겠어!”

“전, 졸려서 죽겠어요.”

“그래, 자거라. 푹 자고 빨리 일어나거라.”

륜사는 단태에게 마법을 걸어서 재웠다. 당고를 엿 먹인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때, 여화가 들어왔다.

“사부님!”

“명 선생은 괜찮아?”

“……정신을 잃었을 뿐이에요.”

“다행이구나.”

“어떻게 된 거예요? 아까 사부님이 내려오셔서…….”

“분신이었다.”

“……분신이라구요?”

“드디어 완성한 거지. 자, 어떠냐?”

륜사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고, 곧 륜사의 몸에서 또 다른 륜사가 빠져나왔다. 둘 다 완벽한 륜사였다. 두 명의 륜사는 서로를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화는 입을 벌린 채 말이 없었다.

륜사는 오랫동안 분신 마법을 익히려고 애를 써 왔다. 단태가 봤던 흡체수 연습은 분신 마법을 완성하기 위한 수련 과정의 일부였는데 바로 어제 그 마법을 완성했던 것이다. 자신이 수계 마법을 총동원하여 만들어 낸 분신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물방울이 정교하게 이미지를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부딪힌다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속을 수밖에 없는 게 륜사가 익힌 분신 마법 ‘분형수체’였다.

분신은 천마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일곱 가지 조건 중 하나였고, 륜사는 분형수체를 완성한 덕분에 여섯 가지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수도 용금탄으로 가서 공식적으로 천마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부님, 정말 대단하세요.”

여화가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봐라, 살이 쏙 빠지지 않았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봐도 고생한 흔적이 없어서, 여화는 대충 얼버무렸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륜사는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여화에게 들려주었다. 무용담을 자랑하는 전직 군인처럼 침까지 튀기며 약간은 과장한 이야에 여화는 아무 말도 없더니, 한참 후에야 륜사에게 물었다.

“당고 님이 직접 찾아올 줄 아셨죠?”

“당고라면 치졸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

“함정을 파 놓으신 거네요.”

“맞아.”

“그런데 저 아이가 당고 님을 살려 주라고 했구요.”

“놀랍지 않느냐? 저 배포가.”

“……차라리 여기서 당고 님을 죽였어야 했어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마찬가지란다. 근데 저 녀석이 원하니, 놓아줄 수밖에.”

“좋은 기회를 놓쳤어요. 그런 기회,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왜 그렇게 웃고 계세요? 이제 단태는 이전보다 더 위험해졌어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몰라요.”

여화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단태는 안전해. 당고의 자존심은 나도 한 수 접을 만큼 대단하거든. 그러니 앞으로 10년은 안전할 거야. 누구든 단태를 건드리는 사람은 당고가 가만두지 않을걸.”

“……그럴까요?”

“내가 장담해.”

“하지만 10년은 금방 지나가잖아요. 당장 생도가 된다고 해도 승급 시험조차 통과하기 어려워요. 그런 단태가 어떻게 당고 님 같은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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