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31화 (31/293)

<-- 31 회: 1-28 -->

“그러니 우리가 도와줘야지.”

“우리가요?”

“물건 한번 만들어 보자.”

“단태를요?”

“생각해 봤는데, 오늘보다 더 통쾌한 순간을 또 만끽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만약 단태가 10년 후에 당고를 밟아 버린다면 어떨까? 그 순간 당고의 표정, 꼭 보고 싶다.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 거 같아. 넌 안 그래?”

“사부님.”

착 가라앉은 여화의 목소리.

“내가 직접 가르칠 거야. 승급 시험 따위 생각할 필요 없어. 생도 교육도 무시하면 돼. 마법사는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니까.”

“……단태가 그걸 원할까요?”

“이봐, 나 용마야. 저 녀석이 날 거부할 것 같아? 어딜 가서 나 같은 사부를 만나겠어?”

“그건 그래요.”

여화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구실 밖으로 나가는 륜사를 보다가 몸을 돌려 단태 옆에 앉았다. 단태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정말 이 아이는 당고를 살려 달라고 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하니, 속에서 열이 솟구쳤다. 진묘를 보내어 자신을 죽이려 한 그 여자를 죽일 기회가 생긴다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을 텐데.

여화는 한숨을 내쉬며 단태를 내려다봤다.

*출발

위연미는 새벽 4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자마자 낡고 냄새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새벽 공기는 쌀쌀했다. 그녀는 옷을 여미고 하녀 숙소를 벗어나 외양간으로 달렸다. 몸에 열이 나면 덜 춥기 때문이다. 외양간 한쪽에 마련된 닭장에는 달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져온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위연미는 닭장의 문을 열고 엎드려 안으로 들어갔다. 짚이 깔린 바닥에는 닭똥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는데, 그걸 피해서 안쪽으로 이동할 방법은 없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아직 굳지 않은 닭똥이 묻었지만 위연미는 개의치 않고 이쪽을 노려보는 닭을 옆으로 밀치고는 달걀을 모았다.

다 합쳐서 35알이었다.

“다들 수고했다. 매번 이렇게 가져가서 미안한데, 앞으로도 계속 부탁해.”

위연미는 닭들에게 말했다.

바구니 가득 쌓아올린 달걀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본채 주방 쪽 문으로 들어간 위연미는 선반에 달걀을 올려놓고는 물을 길러 밖으로 나왔다. 새벽마다 할 일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함께 온 설희의 몫까지 하는 터라 더 바빴지만 그 일을 스스로 맡은 결정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희 덕분에 오히려 더 견뎌 내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거, 오전까지 다 빨아.”

“네, 윤춘 백주녀님.”

‘주녀’는 하녀 대신 쓰는 말이었는데, 위연미는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있는 주녀들은 보통의 하녀와 달리 자부심이 강했다.

“서둘러.”

“네.”

위연미는 두 손으로 들기 힘든 빨래 바구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통을 채우고, 빨래를 거기 넣었다. 그런 다음 양잿물을 가져와서 풀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는 연신 신음을 흘리며 빨래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곧 발로 밟기도 했다. 한참 빨래를 했더니 둥실 아침 해가 솟아 있었다.

“언니.”

설희가 다가와 있었다.

“밥은 먹었어?”

“조금 전에. 언니는?”

“……나도 먹었어.”

“거짓말.”

설희는 구운 감자와 치즈 바른 빵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기 몫에서 남겨 온 것이다. 위연미는 감자와 빵을 받아서 먹었다. 아이의 마음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 오늘부터 교육 받아.”

“열심히 해. 뭐든지 배워. 알겠지?”

“응.”

손을 흔들며 주녀 교육이 이루어질 별채로 달려가는 설희의 뒷모습에 위연미는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썼다. 한동안 설희는 엄마, 오빠를 부르며 울면서 지냈다. 윤춘 백주녀가 노예 매매소로 보내 버린다고 위협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위연미가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쫓겨났을지도 몰랐지만, 곧 설희는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엄마, 오빠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말을 하지 않더니, 씩씩하게 하루를 활기차게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위연미에게 설희는 가족이었다. 헤어진 엄마와 언니를 언젠가 다시 찾겠지만, 그때까지는 설희를 동생으로 여기고 살 생각이었다. 설희를 보면 힘겨운 삶에도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어.”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다가 고개를 돌린 위연미는 코앞에 다가와 있는 남자의 얼굴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아프겠다. 미안해. 그렇게 놀랐어?”

반중치가 다가와 위연미를 일으키려 손을 내밀었지만 위연미는 옆으로 몸을 옮겨서 일어섰다.

“……도련님, 무슨 일이신지요?”

“도련님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나, 반중치야. 너와 난 동갑이니까 중치라고 불러.”

“그럴 수 없다는 것, 도련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위연미는 저 반중치라는 남자가 부담스러웠다. 반중치는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님의 외동아들이었다. 노예로 팔려 와 주녀 생활을 하다 보니 높은 사람의 배려가 독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내지 않았는데도 위연미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반중치가 다가와서 말을 걸자, 주녀들은 하나같이 위연미가 반중치에게 접근해서 꾀었다고 생각했고, 철저하게 밟기 시작했다. 온갖 잡일이 위연미에게 몰린 것이었다.

“왜 빨래까지 그쪽이 하는 거지? 그건 공천애가 하는 일이잖아.”

위연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가 시킨 거지?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일이에요.”

“흥,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반중치는 화가 나서 주방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놀란 위연미가 그 앞을 막았다. 반중치가 날뛸수록 곤란해지는 건 바로 위연미였던 것이다.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러면 나랑 놀아 줄 거지?”

“……네, 도련님.”

“이얏호! 신 난다!”

위연미는 반중치가 일부러 화난 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래여서 순진하다고 생각했지만 반중치는 권력을 손에 쥔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는지 벌써 깨친 모양이었다. 나중에 돌아올 주녀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반중치를 노엽게 할 수도 없었다.

위연미는 어쩔 수 없이 반중치를 따라서 별채를 떠났다. 반중치가 위연미를 데리고 간 곳은…… 본채 뒤쪽의 커다란 뜰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모르겠어요.”

“깜짝 놀랄 거야.”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뜰을 덮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위연미는 거대한 무언가가 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용이었다.

“천마룡이야.”

반중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햇살을 받아 더욱 파랗게 빛나는 천마룡은 바람을 일으키며 아래로 내려와 뜰 중앙에 착지했다. 바람이 사방으로 불었고, 위연미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렇게 가까이 용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위연미는 다리가 떨렸다.

용에서 예쁜 여자가 뛰어내렸다.

“누나!”

반중치가 그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반우현은 반중치를 노려보더니, 곧 시선을 옮겨 주녀복을 입은 여자를 쳐다봤다.

“누구니?”

“응, 위연미라고…….”

“또 장난질이니?”

“장난 아니야. 내가 좋아해서 그래. 이번엔 진심이야. 믿어 줘.”

“그 말 내가 몇 번 들었는지 알려 줘? 중치, 철 좀 들어라. 너 계속 그렇게 살래? ≪무무비경≫은 다 읽었니?”

“…….”

“안 읽었지? 아빠한테 얘기할까?”

“알았어. 이번 달까지 읽으면 되잖아.”

“내가 검사할 거다. 너, 천파 좀 본받아. 천파는 수십 번이나 읽었는지 그 책이 너덜너덜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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