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35화 (35/293)

<-- 35 회: 1-32 -->

“무섭지 않니?”

고개를 돌린 단태는 가볍게 웃었다. 여화였다.

“아찔한데, 신나요.”

“체질이구나. 난 그쪽으론 못 가겠다.”

여화는 생명줄을 꽉 잡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단태는 낄낄 웃었다. 등을 덮은 쇠사슬은 거북등판 형태였는데, 이동하려면 두 개의 생명줄 중 하나를 먼저 다른 쇠사슬에 묶은 다음, 다른 생명줄을 풀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 때문에 소수만 자유롭게 천마룡의 등을 돌아다녔는데, 단태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왜 기분이 좋은지 깨달은 단태는 힘차게 웃었다. 연구실에서 단태는 여화에게 맞고, 륜사에게 당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웬만한 마법사만큼이나 강한 여화나, 마둔수탑 최강의 마법사인 륜사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올라오니…… 너무나 쉽게 상황이 바뀌었다. 여화는 근처로 오지도 못했고, 륜사도 이동을 즐기지 않았다. 게다가 용금탄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유였다. 책을 읽을 필요도, 목적도 모르는 수련에 매진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 멀리 드리워진 구름이 빨갛게 빛났다. 그 아래의 녹색 들판은 어두워졌는데, 곧 보라색 구름 아래 남색의 들판이 신비한 분위기마저 풍기며 하나가 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은 흐릿한 구분만 남겨두고 있을 뿐이었다.

“아!”

단태는 햇살이 세상과 함께 만들어 내는 대향연에 흠뻑 젖었다. 이런 광경,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동안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빛이 그려 내는 변화의 경이가 단태의 눈을, 감각을, 마음을 그보다 더 깊은 곳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명당이네.”

낯선 여자가 단태 옆으로 와서 앉았다. 단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명줄이 없잖아요.”

“그런 거, 필요 없거든.”

여자는 활짝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단태는 천마룡을 조종하는 용마사마저 신경 쓰는 생명줄 없이 날갯죽지로 다가온 여자를 천천히 들여다봤다. 20세가량의 젊은 여자로 자신감이 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물의 도시에 와서의 경험 덕분에 단태는 조금이나마 사람을 볼 줄 알았는데, 이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천마룡 위에서 생명줄도 없이 돌아다니는 여자가 절대 평범할 리는 없다.

“내가 누군지 모르지?”

“……네.”

단태는 종자로서 짐을 옮기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도시의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다.

“반우현이라고 해. 너는 단태지?”

“……그렇습니다.”

단태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쑥스럽고,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그 사건 이후, 단태는 유명해졌다. 종자들뿐 아니라, 탑의 마법사들까지 단태를 보면 불러서 말을 걸곤 했다.

“륜사 님의 종자지?”

“네.”

“나, 륜사 님을 좋아해.”

단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앞으로도 좋아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줘. 너도 알겠지만, 륜사 님은 좀 무뚝뚝하고 엉뚱하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요.”

“말이 좀 통하네.”

반우현이 활짝 웃자, 단태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단태는 속내를 감춘 채 반우현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둔수탑의 지하 창고에서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고, 살기 위해 배망식을 쓰러뜨렸던 그 일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단태는 여화와 륜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마음으로 믿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엄포윤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혔다. 단태가 보기에 엄포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단태는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그 순간에만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난다고 확신했다. 스스로 반우현이라 밝힌 저 여자의 본모습도 그런 순간에만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적당히 맞춰 주되 속내를 보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반우현은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마법사 농담’이라는 건데, 그중 하나는 생각할수록 웃겼다.

“마법사가 용을 잡는 방법이 뭔지 아니?”

“모르겠는데요.”

“수련사에게 시키는 거야. 그러면 수련사가 용을 잡는 법은 뭔지 아니?”

“……설마, 종자에게 시키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반우현은 깔깔 웃어 댔다.

처음엔 그게 왜 웃길까 생각했는데, 마법사 대신 온갖 일을 다 하는 수련사, 종자와 마법사 사이의 관계를 절묘하게 비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반우현이 물었다.

“요즘 륜사 님 얼굴이 어두워. 안 그래? 내가 보기엔 그래. 혹시 고민 없대? 넌 가까이 있으니까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잖아. 지난번에 당고와 부딪혔다면서? 그 일 때문이지? 그렇지?”

“사부님은 요즘 얼굴이 밝아지셨는데요?”

단태는 무심하게 반문했다. 질문한 사람이 당황할 만큼이나.

“그래? 아, 그런데 오라버니를 사부님이라고 불러?”

화제를 바꾼 반우현.

“네, 그렇게 부르라고 하셔서요.”

“오호, 인정받은 모양이야. 축하해.”

“……고맙습니다.”

단태는 고개를 숙였지만 반우현의 태도를 통해 그 질문을 던지려고 마법사 농담이니 뭐니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믿어선 안 된다.

반우현이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순간, 단태가 선수를 쳤다.

“사부님과 할아버지께 식사를 드려야 해요. 그래서 먼저 가겠습니다.”

생명줄을 빠르게 옮겨 등 쪽으로 이동하는 단태가 살짝 고개를 돌렸을 때, 반우현은 아름답다고 감탄했던 풍경이 아니라 단태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역시.’

단태는 앞으로 저 여자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태, 이리로 오너라.”

륜사가 손짓하며 불렀다.

그쪽으로 갔더니 아까 늦게 온 남자가 옆에 앉아 있었다. 몸을 바르르 떠는 그 남자는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다행히 멀미는 하지 않은 듯했다.

“인사드려라. 앞으로 널 가르칠 분이시다.”

“……네?”

“인사부터 드려.”

“아, 네. 저는 단태입니다.”

륜사의 재촉에 단태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천마룡이 몸을 틀어 자신을 아래로 떨어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분은 용태학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또한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용문거에서 수석을 하신 명국영 선생이시다. 앞으로 네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 주실 거다. 그러니 나에게처럼 정성을 다하거라.”

“……네.”

륜사답지 않은 장황한 설명에 대답은 했지만 단태는 이런 곳에서 눈도 못 뜨는 남자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사부님이 인정한 사람이니 최소한의 예의는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단태는 이 남자가 마둔수탑의 탑주가 일곱 번이나 찾아가서 겨우 모셔 온 석학이며, 현재 계승자인 누천파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겨우 눈을 뜨고는 책 한 권을 건넸다. 책을 쥔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책을 받기가 어려웠다. 제목을 본 단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무비경≫,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이, 이걸 외, 외우거라.”

“……전부 다요?”

“요, 용금탄에 도, 도착하기 전까지다.”

“…….”

울상을 지은 단태는 사부님을 쳐다봤지만, 륜사는 못 본 척했다. 책을 들고 물러선 단태는 ≪무무비경≫의 두께와 내부를 살폈다. 앞으로 사흘 안에 이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래도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인들이 만든 음식을 륜사와 명국영, 여화 그리고 엄포윤에게 갖다 준 단태는 모닥불이 피워진 곳으로 다가가 책을 펼쳤다. 천마룡의 등은 워낙 넓어서 강철로 만든 화로에 불을 피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무무비경≫의 첫 번째 문장을 읽는데, 번개를 맞은 듯 몸에 전율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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