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36화 (3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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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네가 세상이며, 세상이 너다.[편지]

단태는 그 문장을 보고 또 보았다.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그 문장이 단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책에 특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단태의 머릿속을 헤집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세상이라니?

세상이 나라니?

불과 한 달 전에 이 책을 봤다면, 같은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이었던 시절에 그런 문장은 욕처럼 들릴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힘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람들에게 속아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자신이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 번 보면 다 욀 만큼 똑똑하지도 않고, 배경이 놀랄 만큼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태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마둔수탑은 물론 탑은 종자를 받아들임에 있어 엄격한 자격 기준을 적용했다. 장차 탑을 이끌 마법사들이 될 사람들을 함부로 뽑을 수는 없다. 그 진실이 알려지면 단태는 즉시 탑 외부로 내쳐질 터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무너졌었다. 믿고 고민을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엄포윤은 진실을 움켜쥔 채 가짜 할아버지 역할에 관심이 있었고, 여화와 륜사는 진실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혼자 짊어지고 가기에 단태가 지닌 삶의 무게는 만만찮았다. 마음이 무너져 다 포기하고 싶을 때, 단태를 붙잡은 건…… 엄마와 여동생이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난 할 수 있어. 반드시 해낼 거야.

수도 없이 되뇐 그 말이 서서히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 줌의 모래처럼 허약한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사소한 자극에도 무너지고, 붕괴되었다. 단태는 겉으로는 웃고, 겉으로는 당당한 척해도 속은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아이였다.

이런 단태에게 세상이 곧 너라는 선언은…… 거대한 위로였다. 네가 곧 세상이라는 대담한 선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따뜻한 자극이었다.

단태는 눈물을 흘렸다. 그 책을 붙잡고.

그 문장 다음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쉬운 듯하면서도 깊어서 쉽게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문장만으로도 단태는 한없이 좋은 것을 책으로부터 받은 것만 같았다. 누가 쓴 책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단태는 명국영이라는 사람이 요구하지 않아도 이 책을 통째로 외우리라 마음먹었다. 책을 쓴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할 수 없지만, 지금 심장이 떨릴 정도로 느끼는 위로와 자극에 대한 최소한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단태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 책을 읽었다. 원래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도 집중하면 몇 배나 기억력이 좋아지는 법이다. 단태는 그 책에 기록된 모든 문장이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 이해되는 부분만이라도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여 외웠다. 그런 방식을 취하자, 외우는 속도는 월등히 빨라졌다.

저자인 무무는 군왕을 위한 조언으로 ≪무무비경≫을 썼다. 물론 군왕만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질문하는 다양한 부분을 깊이 있고, 풍부하게 풀어낸 것인데, 세상을 꿰뚫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군왕이기 때문에 무무는 그런 의도를 밝힌 것이다.

단태는 군왕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았다. 무무가 누구인지, ≪무무비경≫이 어떤 책인지, 얼마나 유명한지, 융 왕국으로부터 용령 제국까지 얼마나 깊은 영향력을 끼쳤는지 알지 못하기에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태에게 ‘너’는 군왕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단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륜사도, 명국영도 그런 의도로 책을 주지 않았다. 명국영에게 고소공포증이 없었다면 아이에게 책 한 권 달랑 주며 외우라고 하기 전에 무무가 누구인지, ≪무무비경≫이 어떤 책인지 설명부터 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단태는 그 책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저 세상 꼭대기에 있는 황제를 위한 책이라고 선입견을 가진 채 읽기 시작했을 터였다.

여러 가지 조건이 우연처럼 맞아들어 갔다. 그 우연한 조건들이…… 이 순간 단태에게서 필연이 되었다. 그 조건은 무무조차 예측하지 못한 것들의 조합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 별이 쏟아질 무렵까지 ≪무무비경≫에 빨려들 듯 책을 읽은 단태는 책을 꼭 쥔 채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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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오후 무렵, 먹구름이 몰려왔고 곧 비가 쏟아졌다.

하인들이 먼저 반응해서 날고 있는 용의 등에 세워진 천막에 가죽을 덧대었다. 빗물을 막기 위해서였다. 반우현의 붉은 천막이 가장 컸고, 그다음은 누천파의 파란 천막이, 륜사 일행의 검은 천막은 가장 작았다. 그래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편히 앉을 정도의 공간은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멀미에 적응한 엄포윤은 륜사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같아서 불편했지만 밖으로 나가 비를 맞고 싶지는 않았다. 불을 피운 천막 안은 아늑해서 졸리기까지 했다. 그는 낯선 사람을 살폈다. 내뱉는 말투를 보니 학자 같았다. 륜사와 꽤 친해 보이는 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는데,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륜사가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고, 여화가 뒤따랐다. 륜사는 명국영을 향해 말했다.

“여기 있어. 괜히 나왔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알겠네.”

높은 곳을 싫어하는 명국영은 아예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엄포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갔다 오겠습니다.”

단태는 생명줄을 옮겨 가며 재빨리 비 오는 밖으로 나갔다. 륜사는 능숙한 동작으로 암벽을 타듯 비스듬한 천마룡의 목을 타고 올라가 용의 정수리에 서 있는 용마사 옆으로 다가섰다. 용마사가 뿔 나팔을 분 모양이었다. 단태는 여화 옆에 섰다.

“무슨 일이에요?”

“……다른 용이 접근하는 모양이야.”

“정말요?”

단태는 마을에 들른 음유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용과 용이 하늘을 날면서 발톱을 앞세우고 싸운 장면에서는 숨조차 쉬지 못했었다. 혹시 그런 싸움이 벌어질까?

“저기다!”

여화가 손가락으로 왼쪽 허공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뜬 단태는 쏟아지는 비 속 너머에서 붉은 용을 발견했다. 천마룡보다는 몸집이 작은 그 용은 다가오고 있었는데, 빛나는 깃발이 용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깃발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단태는 여화를 쳐다봤다. 여화는 용마사들이 먼 곳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의사를 표시하는 신호 체계를 잘 알고 있었다. 륜사의 지시로 미리 공부한 것이다.

“접근을 허락해 달라는 거야.”

여화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비를 맞으면서 단태는 점점 커지는 붉은 용을 쳐다봤다. 그 용의 등에도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저 용은 어디에서 왔을까? 무엇보다도 용을 어떻게 길들였을까? 천마룡에 타고 비행을 할 동안에는 용이 왜 인간을 등에 태우고 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용마설이라는 마법의 기원 이론이 있을 만큼, 용도 마법을 펼치는 종족인데 왜 이 두 용은 인간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가축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단태는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여화에게 물었다.

“저주 때문이야.”

“……저주라구요?”

“지금 태어나는 용은 거의 다 돼지나 소처럼 본능만 남아 있거든. 예외도 있는데, 극소수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용뿐 아니라 인간도 궁금해하는데, 저주라는 것 외에는 단서가 없어. 어떤 저주인지, 누가 걸었는지, 얼마나 지속되는지도 알 수 없는 모양이야.”

“그런 저주도 있어요?”

단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설에 등장하는 저주는 모두 고약하지만, 용에게 걸린 저주만큼 사악한 종류는 없는 것 같았다.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 몰라도 종족 전체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 아닌가?

인간에게 그와 같은 저주가 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간이…… 생각할 수 없어서 평생 기어 다닌다면? 걸어 다닌다고 해도 본능에 따라서 살아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을 딛고 있는 천마룡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했다. 이 비행을 당연시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제야 단태는 물의 도시에서 이륙한 이후 천마룡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 용, 배고프지 않을까요?”

“천마룡은 용금탄에 도착하면 소 다섯 마리로 포식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원래 비행할 때는 먹지 않는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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