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회: 1-35 -->
엄포윤은 생각에 잠긴 계승자를 남겨두고 서관 밖으로 나왔다. 마차를 잡아탄 그는 누천파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왜 혼자 서관에 왔을까? 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누천파 같은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닐 텐데.
‘내가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난 사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풍혈지체라고 해도 문제야. 하루라도 빨리 천린풍탑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명의 위기를 넘기는 방법도 알아봐야겠어. 아, 그렇지. 그렇게 해야겠어.’
좋은 계책을 떠올린 엄포윤은 마음이 편해서인지 졸기 시작했다.
*용의 유언
용혈은 바위산이었다. 햇빛의 방향에 따라서 색깔이 바뀌는 용혈은 해 질 무렵 주홍색 바위산으로 계곡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개의 천막들 사이로 개미처럼 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천막들은 모두 용혈의 시꺼먼 입구 앞을 바라볼 수 있게끔 세워져 있었다.
천마룡은 멀찌감치 만들어진 착륙장으로 내려갔다. 천마룡만 한 몸집의 용들이 서너 마리였고, 그보다 작은 용들은 스무 마리 남짓이나 되었다. 단태는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용들을 모두 합치면 천 마리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여화로부터 들었다. 천마룡에서 내린 단태는 거대한 용의 눈을 올려다봤다. 맑고 깊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하인들이 빈자리에 천막을 쳤다. 이번에도 세 개였다. 붉은 천막, 푸른 천막 그리고 새까만 천막. 단태는 양손에 짐을 들고 새까만 천막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았다. 명국영은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 버렸고, 륜사도 여화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린 터라 천막에는 단태 혼자였다. 엄포윤은 용금탄에 남았다. 돌아갈 때 들러서 엄포윤을 데리고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심심한 단태는 ≪무무비경≫을 꺼내어 읽었지만 곧 덮었다. 처음 본 순간의 환희는 더 이상 없고, 아리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이어졌던 것이다.
단태는 착륙장 근처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식사를 마친 용들은 어두워지는 들판에 앉아 용혈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용들이 그런 자세를 취했다니, 신기했다. 거기에 고룡 암탄주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을까?
암탄주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고룡이었다. 고룡은 제국력이 시작된 천파 대제국 시절부터 살아온 용을 말하는데, 지금이 제국력 1489년이니, 거의 1,500년 가까이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역사로만 전해지는 천파 대제국, 율진 연방, 무현 제국, 가파랑 연방 그리고 용령 제국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변화를 고스란히 견뎌 낸 용이 저 바위산 안쪽의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서 죽어 가고 있었다.
언덕은 용들의 착륙장도 볼 수 있지만, 반대편에 펼쳐진 천막들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였다. 단태는 고개만 살짝 돌려 제국 곳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쳐다봤다. 대부분 탑에서 지시를 받고 온 마법사, 수련사, 종자 그리고 하인이었다. 용금탄에서 날아올라 남쪽인 용혈로 비행하는 동안, 단태는 여화에게 왜 용혈로 가는지 물어봤었다.
“유언 때문이야.”
“유언이라니요?”
“용의 유언은 좀 특별하거든. 이왕 말이 나왔으니 알려 줄게.”
여화는 약병에 든 말린 여러 종류의 수초를 섞어 조그만 알약인 ‘환’을 만들며 말했다.
저주에 걸리기 전, 용은 인간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로 군림했다. 인간과 달리 용은 워낙 강하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법에도 능해서 태생적으로 독립적이었다. 인간이 이웃과 힘을 합쳐 밭을 일구고,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급기야 도시와 국가를 성립시킨 반면에 용은 오랜 세월을 지나도 홀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삶의 방식에도 예외가 있었다. 바로 죽음 직전, 임종을 당한 용은 유언을 통해 자기가 평생 모아 온 보물, 깨달은 지혜, 더 확장된 마법 등을 다른 용에게 전달했다. 용은 서로 협력하지 않지만 그 유언을 통하여 인간보다 강한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파 대제국 시절에는 인간과 용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천파 대제국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간은 용을 제압하고 이기기 위해 애를 써 왔고, 그로 인해 마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불에 벼린 창과 칼로는 용의 두꺼운 피부를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주가 용을 덮쳤고, 하나 둘씩 용은 죽어 갔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 태어난 용은 저주 때문에 용의 유언을 받을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천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담긴 용의 유언은 흐름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그러면 암탄주라는 용이 곧 유언을 남긴다는 뜻인가요? 하지만 그 유언을 받을 용은 없다면서요?”
단태가 물었다.
“암탄주는 마법으로 자기 목숨까지 연장시킨 최고의 용이야. 인간으로 따지면 대마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암탄주는 인간에게 유언을 남기겠다고 했어. 그 때문에 마법사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고 있고.”
“아!”
“암탄주는 이전에 죽은 모든 고룡의 유언을 받은 용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모르겠는데요.”
“암탄주는 이제까지 세상에 살아왔던 모든 용의 지혜, 보물 그리고 마법까지 인간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한 거야. 누구든 그 유언을 받는다면, 그게 탑이든 마법사든 상관없이, 그는 마법의 기원은 물론 아직 출현하지 않은 마법까지 손에 넣는 셈이야. 그러니 황제까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여화는 환을 만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듣는 단태는 이제 막 눈을 뜬 맹인처럼 새로운 세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 광활한 땅에서 살다가 죽은 모든 용의 지혜, 보물 그리고 마법이 한 마리의 용 안에 담겨 있다니. 믿기 어려운 만큼 신기했다.
언덕에 앉아 그 대화를 떠올린 단태는 고개를 들고 용혈을 쳐다보는 저 용들이 유언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유언을 받고 싶으나 받을 능력이 없어서 저토록 슬픈 눈을 하고 있지 않을까.
“너, 륜사 님의 종자지?”
“……그런데요.”
단태는 그 남자를 올려다봤다. 인기척도 없이 언덕까지 올라와 버린 이 남자는 붉은 용을 타고 와서 천마룡으로 뛰어내린 그 사람이었다. 이름이……? 그래, 하쿠. 염종화탑 출신이라고 했다.
“이름이 뭐냐?”
“……단태인데요.”
하쿠는 자연스럽게 단태 옆에 앉아, 단태가 보는 방향을 쳐다봤다.
“종자가 된 지는 얼마나 됐니?”
“왜요?”
“성깔 있네. 그냥 물어본 거야.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3년 정도 된 거 같아요.”
단태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몇 번 죽을 뻔한 경험을 했더니 이런 거짓말에는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3년? 꽤 오랫동안 종자 생활을 했구나. 힘들진 않고?”
“그냥 그래요.”
단태는 친한 척하며 이것저것 묻는 하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염종화탑은 마둔수탑과는 여러 모로 불편한 관계라고 여화가 알려 주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은근히 륜사를 무시하는 하쿠의 태도가 단태는 보기 싫었다.
“종자 생활 5년은 지나야 생도가 되고, 또 몇 년이 흘러야 수련사가 될 수 있고, 그래도 승급 시험은 어려워서 평생 마법사는 못 되고 늙어 죽는 사람들이 많잖아. 안 그러냐?”
“그렇죠.”
“단번에 마법사가 될 기회가 있다면?”
하쿠의 목소리는 달짝지근했다. 종자, 아니 수련사라고 해도 혹할 만한 질문이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난 염종화탑의 계승자거든. 내가 힘쓰면 못 할 일은 없어. 지난번에 그 붉은 용 봤지? 그게 내 용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단태는 호기심 있는 척하며 물었다.
“이걸 천막 안에 넣어두면 된다. 그리고 이건 수고비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내 널 잊지 않고 염종화탑으로 데려가마.”
하쿠는 시꺼먼 구슬과 묵직한 돈주머니를 건넸다. 구슬을 쥐자 찌를 듯한 고통에 인상을 구긴 단태는 돈주머니를 받고 좋아하는 척했다. 하쿠는 잠자코 단태를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한 듯 단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만 믿는다.”
하쿠는 단태에게 손을 흔들며 먼저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에 앉아 흑주와 돈주머니를 손에 든 단태는 하쿠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장 천막으로 달렸다. 이 사실을 륜사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쿠가 왜 자신에게 다가와 이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